걸그룹과 보이그룹의 콘셉트 트레이드

머니투데이 한수진 기자 ize 기자 2022.03.25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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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트로 문빈&산하, 사진제공=판타지오아스트로 문빈&산하, 사진제공=판타지오


요즘 보이그룹에게 '섹시'란 수식어가 낯설지 않게 붙는다. 위아이, 고스트나인, 베리베리, 몬스타엑스 기현, 아스트로 문빈&산하, 위너 강승윤 등 많은 보이그룹의 기획사는 공식 보도자료를 통해 "섹시美를 품었다"다던가 "섹시함을 더한 반전" 등의 설명으로 앨범 콘셉트를 소개했다.



단적으로 지난 14일부터 16일까지 컴백한 보이그룹 4팀이 섹시 콘셉트를 내세웠다. 이쯤 되면 최근 섹시란 수식은 보이그룹이 주도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걸그룹에게는 섹시란 설명구가 다소 요원해졌다. 위클리, 브레이브걸스, (여자)아이들, 레드벨벳 등 이달에 컴백한 걸그룹 중 어느팀에게도 소속사는 '섹시'라는 수식을 하지 않았다. 7~10년 전 만해도 걸그룹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섹시가 시대의 흐름 앞에 보이그룹 앞으로 안착한 것이다.

걸그룹은 한때 청순과 섹시로 콘셉트가 양분됐을 만큼 그 쓰임이 지배적이었다. 씨스타나 A.O.A가 대표적인 섹시 걸그룹이었다. 아래로 레인보우, 나인뮤지스, 달샤벳, 스텔라 등이 존재했다. 또 다른 인기 걸그룹인 포미닛, 티아라, 시크릿, 카라 등도 섹시 콘셉트를 곧잘 활용하곤 했다. 보이그룹은 2PM 정도가 '짐승돌'이라는 애칭으로 "섹시하다"는 말을 듣곤 했다. 아이돌에게는 성별에 따라 주어진 콘셉트가 명료했다. 걸그룹은 청순과 섹시, 보이그룹은 카리스마와 청량.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세계관을 포용한 앨범 콘셉트를 한 가지 이미지로 단정할 수 없을 뿐더러, 걸그룹과 보이그룹 사이에 정형화 된 틀마저 허물어진 지 오래다. 마마무가 2016년 '넌 is 뭔들'로 음악방송 첫 1위를 했을 때, 그들은 청순이나 섹시로 양분되지 않은 '개그'나 '익살' 콘셉트로 대중의 사랑을 이끌어냈다. 이듬해 샤이니 태민이 '무브'(MOVE)로 젠더리스한 섹시 콘셉트를 선보였을 때는, 걸그룹과 보이그룹 할 것 없이 모두 열풍처럼 커버하곤 했다. 이 두 팀이 지금의 변화를 주도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이 때를 계기로 조금씩 고정된 경계가 허물어진 것은 맞다.

사진출처=(여자)아이들 '톰보이' M/V 스틸사진출처=(여자)아이들 '톰보이' M/V 스틸
요즘 걸그룹의 대세는 크러시(Crush)다. 크러시는 섹슈얼한 감정이 동반되지 않은 강렬한 호감 혹은 감탄을 뜻한다. 크러시 콘셉트에서 주요하게 운반하는 건 파워풀함이다. 노래로는 자의식 강한 주체성을 강조하고, 퍼포먼스에는 역동적이면서 파워풀한 안무를 활용하는 것이 크러시의 완성이다. 다리나 엉덩이 같은 섹슈얼한 신체 부각은 최대한 지양하고, 칼군무 중심의 절도 있는 브레이킹 등을 적극 이용한다. 파워 퍼포먼스를 하던 보이그룹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니스커트가 아직 주 무대 의상으로 쓰인다는 점에서 섹시 요소가 전혀 배제된 것은 아니지만,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은연 중에 띄우는 것이 추세다.


한 가요 관계자는 "성인지 감수성이 높아지면서 섹시 콘셉트에 대한 위험 요소가 많아졌다. 신인 걸그룹의 경우 10대 멤버들이 많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럽다"며 "크러시한 콘셉트의 경우 이러한 위험 요소를 배제하면서도 글로벌 팬들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진다. K-팝의 인기 요인은 파워풀한 퍼포먼스인데 이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게 크러시한 콘셉트다. 특히 청순 콘셉트의 경우는 아시아권에선 잘 먹히지만, 미국이나 유럽 등에선 그렇지 못하다"고 설명했다.

사진출처=2PM '해야 해' M/V 스틸사진출처=2PM '해야 해' M/V 스틸
걸그룹에게서 탈락된 섹시는 이제 보이그룹에게 넘어갔다. 이는 걸그룹에게 성인지 감수성이 작용한 것과 마찬가지로, 젠더리스(genderless)라는 시대의 흐름이 바꿔놓은 풍경이다. 젠더리스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하나로 통합시켜 휴머니즘을 강조한 양성성을 일컫는다. 패션으로 치면 지드래곤이 한 패션쇼장에 여성복으로 출시된 트위드 재킷을 입고 샤넬 핸드백을 들었던 것이 예가 될 수 있다. 노래로는 태민의 '무브'가 대표적이다. '무브'는 끈적한 멜로디와 함께 퍼포먼스에 슬로우 모션을 활용한 섹시한 웨이브나 섬세한 춤선을 선보였다. 태민은 여성 댄서들의 바이브에 맞춰 이 같은 퍼포먼스를 소화했다. '무브'가 발매됐을 당시 '파격적'이라는 반응이 인 것도 이 때문이다.

젠더리스가 시대의 변화를 이끌면서 보이그룹도 걸그룹의 전유물이던 섹시 콘셉트를 자연스럽게 흡수했다. 태민처럼 과감한 접근은 아니더라도 퍼포먼스에 있어 파워나 카리스마가 깃든 남성성만 강조하지 않고, 몸을 쓸어내리거나 웨이브를 타고 몸매 윤곽이 드러나는 의상을 입는 식으로 소화하고 있다. 섹시함을 운반한 2PM의 '우리집'이 알고리즘을 타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시대의 변화 앞에 더욱 다양성을 품게 된 K-팝. 글로벌 음악 시장의 메인스트림으로 올라서게 된 건 이러한 시대 흐름을 잘 읽어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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