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 국장
'조상제한서'는 요즘 세대에겐 생소하지만 과거 금융권에 몸담았다면 대부분 알고 있는 역사 속 이름이다. 조흥(1897년 창립) 상업(1899년) 제일(1929년) 한일(1932년) 서울(1959년) 5대 시중은행을 순서대로 부른 약칭이다. 과거엔 은행 기사를 쓰면서 이 역사 서열을 흔들고 순서를 바꾸면 항의를 받곤 했다.
2003년 조흥은행 노조가 신한은행과 합병에 반발하며 서울 광교 본점을 점거하고 철야농성을 벌이는 와중에 밤새워 당시 홍석주 조흥은행장의 동선을 추적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년 가까이 지났다. 1998년 배찬병 상업은행장과 이관우 한일은행장의 합병선언으로 탄생한 한빛은행.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관악지점 불법대출 사건, 금융지주로 재탄생 및 윤병철 초대회장 영입 등 역사 초 취재현장도 20년이 훨씬 지났다.
실제 전반적 정서인지, 일각의 과도한 해석인지 궁금해서 몇몇 금융권 지인에게 물어보니 약간의 온도차가 있다. 일선에서 영업하는 사람들은 "다 잊어버리고 현장에서 뛰는데 출신이 어딨나. 이젠 어디 출신인지 서로 묻지도 않는다. 1960년대 후반 출생 이전 정도를 빼면 어디 출신이라고 할 것도 없다"는 분위기다.
그런데 승진 얘기가 나오면 표정이 좀 달라진다. 임원승진이나 '권력' 근처로 가는 거엔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뉘앙스다. "조직안정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윗분이 부리기 편한 사람을 고르기 위해서인지 출신 안배 등에 신경 쓰는 것 같다. 본점엔 아직도 이마에 출신성분이 붙어 있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는 얘기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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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분위기면 출신을 이용해 이득을 보거나 다른 출신을 배척하려는 '내부' 세력 또는 사람, 출신을 이용해 권력이나 힘을 써주고 떡고물을 챙기려는 '외부' 세력이나 사람이 어디선가 끈질기게 기생한다. '출신보다 능력'이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누군가는 줄을 서고 누군가는 절치부심 때를 기다리려 한다. 고향(출신)이 흘러간 노래처럼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으려면 얼마나 더 시간이 지나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