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자'를 보면 '살인의 추억'이 떠오르는 이유

머니투데이 신윤재(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2.02.03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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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사건들을 소재로 수사물의 새 지평을 열다

김남길, 사진제공=SBS김남길, 사진제공=SBS


SBS 금토극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극본 설이나, 연출 박보람)은 영화로 따지면 ‘살인의 추억’ 같은 작품이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고? 바로 대외적으로 굉장히 널리 알려진 ‘완결된’ 사건을 기반으로 줄거리를 진행하는 작품이다. 2003년 봉준호 감독이 처음 ‘살인의 추억’을 연출한다고 했을 때 많은 의구심이 뒤따랐다. 이 영화가 다뤘던 화성연쇄살인사건이 개봉 당시에는 미제사건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는 ‘기승전결’이라 불리는 하나의 틀 속에서 움직인다. 사건이 시작되고 흘러가고 절정을 이룬 다음 어떤 형태로든 결론이 나야 보는 사람도 카타르시스를 느끼든 교훈을 가져가든 한다. 많은 작품들이 그 안에서의 반전을 관련자들에게 서약서까지 써가며 보호하는 이유는 어쨌든 극은 결론이 난다는 사실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은 어찌 보면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상징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살인의 추억’은 결론이 없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따르는 실제 사건이 결론이 없기 때문이다. 뚜껑을 연 ‘살인의 추억’은 결국 한국형 스릴러의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결국 범인은 잡지 못했지만 그 안에 많은 함의를 담았기 때문이다. 시대의 모순 때문에 일그러졌던 수사나 범인을 잡고 싶었던 형사들의 집념 그리고 살아 움직이는 여러 캐릭터들 덕이다.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역시 이러한 현실이 모티브가 된 작품이다. 현재 다양한 예능이나 교양 프로그램을 통해서 ‘대한민국 1호 프로파일러’라는 명칭을 얻고 있는 권일용 동국대 교수의 일대기를 담았다. 1989년 경찰이 돼 1993년 현장감식요원 겸 형사로 일했으며 2017년 퇴직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2010년대를 아우르는 우리나라 주요 강력사건의 프로파일링을 맡은 인물이다.

김소진, 사진제공=SBS김소진, 사진제공=SBS
드라마에는 우리가 그동안 익히 알고 있는 사건들이 다수 등장한다. 1회부터 등장해 극의 긴장감을 높였던 빨간모자 사건을 비롯해 3회부터 등장한 여아 토막 살인사건은 최인구가 실제 범인이었던 서울 성동구 여아 토막 살인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4회부터 등장한 부유층 대상 둔기살인사건은 유영철의 살인행각을 다루고 있으며, 6회 잠깐 등장해 경악을 안겼던 살인사건의 모티프는 서울 서남부를 2000년대 초반 공포로 가뒀던 살인범 정남규의 행적을 쫓았다.


우리는 이들의 과정과 결말을 모두 알고 있다. 드라마가 출발하는 지점은 바로 시작과 끝이 보이는, 어쩌면 ‘살인의 추억’과 같은 지점이었다. 드라마는 ‘살인의 추억’과 마찬가지로 사건을 채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동안의 수사물과 다른 지점에 다다른다.

주인공 송하영 형사(김남길)는 어린시절부터 남다른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형사가 되서도 마찬가지라, 다른 형사들이 환멸하는 범죄자들의 심리 속으로 좀 더 걸어 들어가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이 같은 기질을 알고 있던 범죄행동분석팀 국영수 팀장(진선규)의 추천을 받아 송하영은 범죄행동분석팀에 합류하고, ‘프로파일링’이라는 기법을 국내에 처음 도입한다.

드라마는 사건의 양상도 양상이지만 프로파일링이라는, 당시로서는 낯선 수사기법이 어떻게 경찰 안에서 안착하게 됐는지의 과정을 전한다. 당연히 처음에는 ‘심리테스트’라고 폄훼하는 시선도 있었고, 수감자를 만나 수법을 묻는 행위가 경찰로서의 도리를 저버리는 큰 잘못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프로파일링을 하는 형사들의 집념 속에 사건의 실마리가 잡히고 이를 통해 시대가 갖고 있던 편견들이 조금씩 깨져나가는 상황을 제시하는 것이 드라마의 주요 전개 포인트다.

진선규, 사진제공=SBS진선규, 사진제공=SBS
이 과정에서 범죄행동분석팀원들도 팀원들이지만 이들과 처음에는 반복하던 기동수사대 팀장인 윤태구(김소진)가 점점 이들과 동화되는 과정을 보이고, 여성 형사로서 그가 당시의 남성중심적인 분위기 속에서 겪는 어려움 역시 현실적으로 제시했다. 결국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한 시대의 지배적인 이념이 어떻게 바뀌는지, 이 과정을 보이는 것이다.

줄거리의 중심을 이루는 사건들은 다시 한 번 섬뜩한 기억들을 소환한다. 하지만 극의 장치로는 이미 패가 드러났기 때문에 진부할 수 있다. 결국 드라마는 이 과정 속에서 성장하는 프로파일러들과 프로파일링 기법 그리고 프로파일링을 접하는 우리 사회의 자세를 차근차근 섭렵하고 있다. 범인이 등장하고 그의 행보가 보이고, 형사가 어떤 작업을 통해 이들을 잡게 되는지에 집중하는 기존 수사물과는 접근 자체가 다른 셈이다.

연출을 맡은 박보람PD나 대본을 쓰는 설이나 작가 모두 경력이 길지 않지만 뚝심을 갖고 드라마의 톤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덕분에 드라마는 그 흔한 러브라인 하나 없이도 계속 시청자의 눈을 붙들고 있다. 하지만 극중 김남길의 차나 ‘조흥은행’ 등 소품으로 등장하는 소재들이 시대가 맞지 않는 소소한 실수는 눈에 띈다.

우리는 수사물을 앞으로 어떻게 봐야할까. 범죄를 저지르고 잡는 단순한 틀거리에만 만족해야 할까.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은 조금만 시선을 바꾸면 수사물의 새로운 지평이 보일 수 있음을 조금씩 증명해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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