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사' 공정위의 위험한 가위질

머니투데이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2022.01.2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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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희의 思見]

지난 13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에 위치한 대한상공회의소 20층 챔버룸에서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이 대한상의 회원사 대표 기업들을 대상으로 2022년 공정위의 정책 방향에 대해 설명했다. 사진은 조 위원장의 강연 자료 화면 뒤로 전직 대한상의 회장들의 사진이 붙어 있다./사진=오동희 선임기자지난 13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에 위치한 대한상공회의소 20층 챔버룸에서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이 대한상의 회원사 대표 기업들을 대상으로 2022년 공정위의 정책 방향에 대해 설명했다. 사진은 조 위원장의 강연 자료 화면 뒤로 전직 대한상의 회장들의 사진이 붙어 있다./사진=오동희 선임기자


지난 13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에 위치한 대한상공회의소 20층 챔버라운지.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SK그룹 회장)을 비롯해 이인용 삼성전자 사장, 공영운 현대자동차 사장, 하범종 LG 사장, 조현일 한화 사장 등 주요 기업을 대표하는 경영진들이 약간의 긴장된 목소리로 간단한 자기 소개를 한 후 나란히 둘러앉았다.



'경제 검찰'이라고 불리는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성욱 위원장이 '2022년 공정거래위원회 정책방향'을 주제로 강연하는 것을 듣기 위한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첫 파워포인트 자료에 재계 관계자들은 약간 당황했다.



조 위원장이 '공정위는 시장경제를 가꾸는 정원사'라고 규정하는 대목에서 '규제기관이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와 시장을 바라보는 규제기관의 눈이 이렇구나'라는 걸 느끼게 됐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조 위원장이 여러 자리에서 자주 강조한 것으로 '조성욱식 공정위의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이다.

'시장경제는 정원'이고 그 속의 나무나 꽃들은 기업이며, 공정위는 그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는 정원사의 역할이라는 얘기다. 이 그림을 통해 조 위원장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오랫 동안 해 온 공정위의 이상적 역할을 짐작케 했다.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이 발표한 파워포인트 자료 중 '공정위는' 부분.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이 발표한 파워포인트 자료 중 '공정위는' 부분.
단순한 레토릭(수사학)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이처럼 기업을 정원 속에서 가꿔야할 관리의 대상으로 보는 비유법이 공정위의 진짜 기조라면 심각하게 토론해봐야 할 대목이다.

지난 18일 HMM 등 국내외 선사 23개사의 지난 15년간의 공동행위에 대해 962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공정위와 해양수산부 및 해운 업계의 갈등을 보면서 토론의 필요성은 더욱 강해졌다.


시장의 오랜 경험에 의해 도출된 '공동행위'에 대해서 주무부처인 해수부까지 나서 "해당 공동행위는 해수부 지도 하에 이제까지 평온하게 15년간 이어졌다"며 "우리는 공정위에 무혐의 심사 종결 필요성을 계속 주장했지만 듣지 않았다"고 말한데서도 알 수 있다. 같은 행정부 내 목소리도 외면하는 공정위의 자세가 옳은지는 논의의 대상이다.

담합은 시장 경제 하에서 용인될 수 없는 부정행위인 것은 맞다. 다만 전체 시장경제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예외적으로 인정됐던 부분까지 자신만의 '전지가위'로 재단하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다.

해운법 29조 1항에 '해운사의 공동행위가 가능하다'고 돼 있고, 공정거래법 58조에 '다른 법령에 따른 정당행위'일 경우 공정위의 규제대상이 아니라는 것에서도 공동행위의 역사성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해수부 장관에게 보고해야 한다는 해운법 29조 2항을 어겼다는 공정위의 주장에 대해선 해운업계에서도 할 말이 많다. 결국 누가 더 옳으냐는 법 해석의 문제인데 1심격인 공정위의 판단은 이제 2심 법원으로 가서 더 다퉈야 할 부분이다.

문제는 기업과 시장경제에 대한 공정위의 현실인식의 문제다. 사실 기업은 '정원' 속에서 피지 않는다. 기업의 현장은 정글이다. 정글은 누군가 와서 물주고 잡초 뽑아주고 농약도 쳐주고 자라지 못하면 영양제도 주사하는 그런 아름다운 정원의 환경이 아니다.

정원의 목적은 꽃을 아름답게 키워 그 주인이 즐기기 위한 것이다. 정원에서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 둥근 모양 너머로 뻗어나오는 가지를 모두 쳐내면 보기야 좋겠지만 제대로 된 성장은 없다. 주변 나무들보다 더 웃자라 아래 나무의 햇빛을 가리는 나무가 있다고 그 밑둥을 잘라 버리면 정원이야 아름답게 가꿔질지 모르지만 우리 경제 시스템 전체 성장은 없다.

또 공정위 시선에서 보는 '아름다운' 정원은 위험하다. 아름답다는 형용사는 각자 보는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공정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기관인 공정위가 '형용사적' 행위의 주체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성향에 따라 전지가위를 대는 기준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공정위는 세세하게 멀쩡한 나무의 가지를 쳐내는 정원사가 아니라 썩은 나무를 잘라내는 야산의 간벌 작업자 정도의 역할이면 족하다. 정글에는 우렁차게 뻗어 나가는 나무도 있고, 그 아래 자라 올라오는 나무들이 있게 마련이다.
(서울=뉴스1) 이승배 기자 =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이 13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조성욱 공정위원장 초정 정책 강연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22.1.13/뉴스1  (서울=뉴스1) 이승배 기자 =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이 13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조성욱 공정위원장 초정 정책 강연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22.1.13/뉴스1
이번 해운업계 공동행위와 관련 공정위는 유럽과 미국의 사례를 들어 해수부나 해운업계의 잘못을 지적한다. 정원을 가꾸는 정당성을 외국 사례에서 찾지만 우리와 다른 그들의 사례를 무조건 들이댈 수는 없다.

유럽은 선사가, 미국은 선주가 강세인 시장에서 각국이 자신들에게 유익한 룰로 규제하고 있다.

유럽은 경쟁 선사가 있는 아시아 국가들에 관대할 리 없고, 미국은 선주들 이익을 중심으로 해운선사에 규제의 칼을 들이민다. 특히 미국은 공정경쟁당국인 FTC가 해운사를 규제하지 않고, 연방해사위원회(FMC)라는 별도 조직에서 감독한다. 서로 다르다는 얘기다. 우리는 우리식대로 국익에 맞는 제도를 도입하는 게 옳다.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합병을 무산시킨 유럽의 공정경쟁 당국이 전세계 소비자의 이익을 위해 합병불승인 조치를 내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합병이 유럽의 이익에 반하기 때문에 불승인한 것이다.

해운업에 공동행위를 허용한 것에는 전세계적으로 긴 역사가 있다. 한국 최대 국적해운사인 한진해운이 구조조정 과정에 무너지고, 현대상선이 국민의 혈세로 근근히 연명하며 산업은행에 넘어가 관리를 받던 그 시기에 생존을 위한 해운사들의 몸부림에 대해 '공정위만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은 문제다.

직접적 운임 담합행위는 엄벌해야 하지만, 일반적 공동행위에 대해선 오랜 역사를 인정해야 한다. 이번 해운사 결정을 포함해 '공정'이라는 말이 어느 한쪽에서 위안받는 언어가 아니라 양 당사자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언어가 되길 바란다. 공정이라는 그릇은 모두를 담아야 한다. 그게 공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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