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순간까지 '사면' 고뇌한 文대통령, 이재명도 몰랐다

머니투데이 정진우 기자 2021.12.2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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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김진아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이 21일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영상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1.12.21.[서울=뉴시스] 김진아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이 21일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영상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1.12.21.


"아시다시피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권은 여러 차례 종교계나 시민단체 또 비공식적으로는 정치권의 요청이나 건의들이 있었고 이러저러한 얘기들이나 요청, 건의 같은 것들은 계속 있어왔던 것으로 제가 알고 있습니다. 세세한 내용은 제가 모릅니다. 구체적으로 언제쯤 결정하셨는지는 저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제가 참모로서 짐작한다면 아마 마지막 순간까지 고뇌가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24일 춘추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문재인 대통령의 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 결정이 언제 이뤄졌냐'는 질문을 받고 이같이 답했다. 다른 청와대 참모들도 사전에 전혀 알지 못했다고 입을 모았다.



청와대는 그동안 박 전 대통령 사면과 관련해 질문을 받으면 "검토된 게 없다"며 부정적으로 말했다. 실제 박 전 대통령 측이 형집행정지를 신청하지 않은 탓에 사면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19년 두 차례 형집행정지를 신청했으나 검찰이 받아들이지 않은 전례도 있었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이날 박 전 대통령과 한명숙 전 국무총리에 대한 특별사면을 전격 단행했다. 그동안 문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 사면과 관련해 거리두기를 해왔던 탓에 정치권에선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정치권에선 문 대통령이 '대선 개입' 논란을 피해 내년 3월 9일 선거가 끝난 후 대통령 당선인과 협의를 거쳐 물러나기 전에 전직 대통령 사면을 단행할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그러나 최근 박 전 대통령의 건강상태가 계속 악화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후 문 대통령이 결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사면 시점에 대해 "과거 전례를 비춰보면 이번 연말이냐 선거 끝난 이후 당선자와 상의해서 사면하느냐 두 가지가 있었을 텐데 그 두 가지 중 이번 연말로 하게 된 계기는 여러 고려사항들이 있었겠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의 건강 문제도 고려하지 않았나 싶다"고 설명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구속 이후 어깨·허리 질환으로 구치소와 외부 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아왔다. 지난달 22일에부터는 서울삼성병원에 입원 치료 중이다. 실제 문 대통령도 이날 입장문을 통해 "박 전 대통령의 경우 5년 가까이 복역한 탓에 건강 상태가 많이 나빠진 점도 고려했다"고 직접 밝혔다.


[서울=뉴시스] 백동현 기자 = 정부가 박근혜 전 대통령 특별사면을 발표한 24일 오전 서울 중구 황학동 시장에서 한 시민이 관련 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2021.12.24.[서울=뉴시스] 백동현 기자 = 정부가 박근혜 전 대통령 특별사면을 발표한 24일 오전 서울 중구 황학동 시장에서 한 시민이 관련 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2021.12.24.
만일 박 전 대통령의 건강이 지속적으로 악화돼 수감중에 비상 상황이라도 생길 경우 문 대통령으로선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문 대통령도 그간 청와대 민정수석실 등을 통해 박 전 대통령의 건강상태 등을 꾸준히 보고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3월 9일 대선 이후까지 박 전 대통령의 건강상태를 지켜보며 위험을 감수하기 어렵다면 대선일이 다가올수록 사면에 따른 정치적 논란이 클 수밖에 없는 점을 고려해 가장 빠른 시기인 연말 특사를 단행한 것으로 풀이된다. 가령 대선일 직전 3·1절 특사를 단행하는 것은 너무 큰 논란을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나 송영길 민주당 대표 등 여권 핵심 인사들과도 상의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과 논의를 하는 순간 정치적 중립 훼손 논란 등 또다른 문제가 생길 수 있어서다.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가 올해 초 박 전 대통령 사면 얘기를 꺼낸 후 지지율이 하락하는 등 안좋은 사례가 있었는데 문 대통령이 사면 문제가 불러올 정치적 파장까지 고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럼에도 정치권 인사들은 문 대통령의 이날 결단이 절묘한 시점에 이뤄졌다고 입을 모은다. 박 전 대통령의 언행에 따라 향후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대선 전략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의 행보가 TK 등 보수층의 여론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는데, 박 전 대통령이 국정농단 사건을 지휘한 윤 후보에 대해 어떤 입장을 보이느냐에 따라 윤 후보 등 야권의 기존 대선 전략도 차질을 빚을 수 있다. 대선을 70여일 앞둔 상황에서 지지율 정체를 겪고 있는 윤 후보 측에 큰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서울=뉴시스] 전진환 기자 =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2021.12.07.[서울=뉴시스] 전진환 기자 =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2021.12.07.
특히 이명박 전 대통령이 이번 사면 대상에 빠진 것도 야권에서 문제로 삼는다. 청와대는 이에 대해 곤혹스러운 입장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박 전 대통령과 이 전 대통령은 경우가 다르지 않냐는 게 제 생각"이라면서도 "두 분이 어떻게 드릴 말씀이 없다. 짐작하는 대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구체적인 설명은 하지 않았다.

다만 '국민적 공감대에 차이가 있었느냐'는 질문이 이어지자 "최소한 제가 본 여론조사에 의하면 두 분의 (국민적 공감대) 차이가 굉장히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을 아꼈다.

두 전직 대통령을 한꺼번에 사면하지 않은 것에 대한 청와대의 명쾌하지 않은 입장은 대선을 앞두고 '보수층 분열'을 꾀한 것 아니냐는 정치적 해석을 낳게 하고 있다. 홍준표 국민의힘 의원은 당장 자신의 페이스북에 "두 전직 대통령을 또 갈라치기 사면을 해서 반대 진영 분열을 획책하는 것은 참으로 교활한 술책"이라며 "반간계로 야당 후보를 선택하게 하고 또 다른 이간계로 야당 대선 전선을 갈라치기 하는 수법은 가히 놀랍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이같은 정치권 해석을 경계했다. 대선에 관한 고려는 전혀 없었으며 사면은 문 대통령 고유의 결정이란 입장이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이날 오전 춘추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박 전 대통령의 사면이 내년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지 않냐'는 질문에 "누구에게 유리하고 누구에게 불리할지 잘 모르겠다"며 "분명한 건 선거 관련 고려는 일체하지 않았다. 전혀 그런 것이 고려가 될 수 없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선거를 고려했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타이밍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며 "선거랑 연관짓는 것은 단연코 아니다"라고 재차 강조했다.

이어 "임기 중 사면 조치를 할 수 있다면 연말 사면과, 과거 전례에 비춰보면 선거 끝난 이후 당선자와 협의한 사면, 두 가지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 두 가지 계기 중에 연말로 하게 된 계기는 고려사항들이 있었겠지만 박 전 대통령의 경우에는 건강 문제도 고려하지 않았나 싶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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