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은행은 없다"…71세 노인은 2km를 걸었다

머니투데이 오진영 기자 2021.12.15 07:00
글자크기
#서울 광진구에 거주하는 박모씨(71)는 최근 자주 방문하던 한 은행의 지점이 폐쇄되면서 곤혹스러운 일을 겪게 됐다. 무릎에 관절염을 앓고 있는 데다 가장 가까운 해당 은행 지점은 2km 가까이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가족은 다른 은행으로 바꾸거나 인터넷뱅킹을 사용하라고 하지만 이 역시도 엄두가 안 난다. 박씨는 "문자 전송도 반나절은 걸리는데 휴대전화로 어떻게 은행 업무를 보나"라며 한숨을 쉬었다.

최근 은행이 코로나19(COVID-19) 확산과 비대면 업무 증가로 잇단 지점 폐쇄를 결정하면서 고령층 이용자 사이에서 반발이 나온다. 전자기기 사용이 어려운 세대가 많고 이동에 제한을 받는 경우가 많아 지점이 줄어들수록 은행 이용이 어려워진다는 목소리다. 노인단체는 키오스크(무인주문기)나 온라인 적응이 안된 노인 세대는 필수적인 은행 이용을 못하게 돼 기본권 박탈로 이어진다고 지적한다.



"손자 용돈 보내줘야 하는데"…지점 폐쇄하는 은행, 대책 나와도 씁쓸한 노인들
 코로나19 장기화로 비대면 금융서비스가 급격히 확산하면서 시중은행의 점포 폐쇄가 잇따르는 가운데 13일 오후 서울 한 은행점포에 통합 이전 안내문이 부착돼 있다. / 사진 = 뉴시스 코로나19 장기화로 비대면 금융서비스가 급격히 확산하면서 시중은행의 점포 폐쇄가 잇따르는 가운데 13일 오후 서울 한 은행점포에 통합 이전 안내문이 부착돼 있다. / 사진 = 뉴시스


14일 서울 노원구 상계동 앞에는 50여명의 시민들이 모여 폐점 반대 기자회견을 열었다. 신한은행이 수익성 저하와 이용고객 감소 등을 이유로 이 장소의 지점 폐쇄를 결정하자 항의하는 시민들이 모였다. 시민들은 "폐점 반대 서명에 이미 1800여명이 넘게 동참했다"라며 "노인층뿐만 아니라 은행의 공공성·사회적 책임을 고려했을 때 폐점은 무책임한 조치"라고 반발했다.

해당 점포는 오랜 시간 폐합을 놓고 주민과 은행 사이 이견을 빚어 왔다. 신한은행 측에 따르면 이 점포는 아파트 단지 가운데에 있어 주민 외 신규 고객의 유입이 적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아예 없애는 게 아니라 같은 위치에 디지털 점포를 설치하고 직원을 상주시키는 등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여러 조치를 검토 중"이라고 설명했다.



이같은 문제는 전국 곳곳에서 발생한다. 은행업계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 등 국내 주요 시중은행은 내년에도 100여개 이상의 점포를 축소할 전망이다. 오프라인 채널(지점)을 통한 업무 비중은 점차 줄어드는 반면 인터넷뱅킹이나 전화 업무 등 비대면 업무는 증가하고 있는 경향을 반영한 결과다. 코로나19 시기 대면 서비스가 축소되는 것도 한몫했다.

직격탄을 맞은 것은 비대면 서비스에 익숙하지 않은 노인층이다. 키오스크(무인 주문기)나 온라인 서비스를 사용하는 기기 이용률이 낮아 지점을 폐쇄할 경우 은행 업무를 볼 수 없거나 먼 지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매년 발표하는 '인터넷 이용 실태조사'에 따르면 70대 이상의 국민 중 인터넷을 이용률은 2020년 기준 40.3%에 불과했다. 국민 평균 이용률 91.9%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치다.

노인들은 지점이 사라질수록 정보 격차가 심화돼 현실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경기 성남시에 거주하는 윤창섭씨(73)는 "단순히 식당이나 카페라면 몰라도 손자에게 용돈이라도 부쳐주려면 은행은 꼭 가야 한다"라며 "지점 대신 인터넷으로 업무를 본다지만 나같은 할아버지들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사회가 우리에게 '이제 필요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고 했다.


"은행 이용은 기본권"…단순 폐쇄보다는 중간장치 고민 필요할 때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시중은행들의 현금입출금 기기 모습. / 사진 = 뉴시스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시중은행들의 현금입출금 기기 모습. / 사진 = 뉴시스
노인단체들은 고령층의 경우 은행 이용이 보장되지 않으면 생존권과도 직결되는 문제라고 지적한다. 서울 종로구의 한 노인단체 관계자는 "고령층 기초생활수급자의 경우 은행에 가지 못하면 계좌 관리가 어려워 생활비나 필요한 지원을 제때 받지 못할 수도 있다"라며 "단순히 은행 운영방식의 차이라기보다는 취약계층을 고려해 최소한의 이용권은 보장이 필요하다"고 했다.

전문가들 역시 변화의 필요성에는 공감한다면서도 고령층을 위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했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무조건 지점을 없앤다기보다는 직원을 배치하는 등 중간장치를 만들어야 한다"라며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일종의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장치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