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부적절한 관계"…끝내 떼지 못한 '클린턴의 그녀' 꼬리표 [그 who]

머니투데이 송지유 기자 2021.10.17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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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3년만에 드라마 연출자로 변신한 전 美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

편집자주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됐던 화제의 인물, 그 후를 조명합니다.

모니카 르윈스키가 지난달 미국 드라마 TV시리즈 '탄핵' 공동 연출자로 홍보 행사게 모습을 드러냈다./사진=AFP모니카 르윈스키가 지난달 미국 드라마 TV시리즈 '탄핵' 공동 연출자로 홍보 행사게 모습을 드러냈다./사진=AFP


"나는 그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1998년 8월 17일, 빌 클린턴 당시(52세)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섹스 스캔들을 인정하며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하는 모습을 전 세계가 지켜봤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대통령이 20대 젊은 여성과 그것도 백악관에서 밀회를 즐겼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치욕스러운 성추문에 휘말린 클린턴은 대통령 탄핵 위기에 놓이는 등 정치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를 맞았다.



'클린턴의 그녀'였던 모니카 르윈스키(당시 25세) 역시 이 사건으로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언론의 관심이 쏟아져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는 것 조차 쉽지 않았다. '백악관 불륜녀'로 전 세계에 얼굴이 알려져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다.

23년이 지난 현재 클린턴은 75세, 르윈스키는 48세가 됐지만 미국을 뒤흔들었던 '98년 지퍼게이트'는 여전히 세계인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다. 둘의 관계는 끝났지만, 그들의 스토리는 계속되고 있다. 르윈스키는 지난달 미국 디즈니 계열 유료방송인 FX의 드라마 '탄핵'의 홍보를 위해 NBC방송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과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을 주제로 한 이 드라마의 공동 연출을 맡았다.



백악관에 입성한 22세 인턴, 4개월만에…
모니카 르윈스키 인턴으로 백악관에 입성했을 당시 모습/사진=AFP모니카 르윈스키 인턴으로 백악관에 입성했을 당시 모습/사진=AFP
모니카 르윈스키는 1973년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유명 종양 전문의였던 아버지 버나드 르윈스키는 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피신한 유대인 후손이다. 르윈스키 가족들은 비버리힐스, 벨에어 등 로스앤젤레스 일대 부촌을 옮겨 다니며 호화로운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르윈스키는 공부에 의지가 없었다. 비버리힐스 하이스쿨을 졸업한 뒤 2년제인 산타모니카 컬리지를 다녔다. 포틀랜드 소재 루이스&클라크 칼리지로 편입했지만 학업보다는 연애에 빠져있었다. 상대는 자신이 고등학교 다닐 때 연기수업을 지도했던 유부남이었다. 방황하는 딸을 보다 못한 그의 부모는 1995년 7월 리언 패네타 당시 백악관 비서실장 인맥을 동원해 르윈스키를 인턴으로 취업시켰다.

르윈스키는 백악관 입성 4개월 만인 1995년 11월 대통령과 비밀스러운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당시 클린턴의 나이 49세, 르윈스키는 22세였다. 클린턴 비서실 간부들은 특별한 용무도 없이 대통령 집무실 주변을 맴도는 르윈스키가 영 못마땅했다. 1996년 4월 르윈스키를 국방부로 보냈지만 둘의 밀회는 1997년 3월까지 약 17개월간 이어졌다.


르윈스키는 백악관에 입성한 지 4개월만에 클린턴과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사진=로이터르윈스키는 백악관에 입성한 지 4개월만에 클린턴과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사진=로이터
대통령 탄핵 부른 '지퍼게이트', 이렇게 터졌다
르윈스키와 클린턴의 관계가 시작된 1995년 11월 15일 이틀 뒤에 찍은 사진/사진=로이터르윈스키와 클린턴의 관계가 시작된 1995년 11월 15일 이틀 뒤에 찍은 사진/사진=로이터
르윈스키가 국방부로 자리를 옮길 때 백악관 여직원인 린다 트립도 같이 이동했다. 그는 트립에게 대통령과의 밀회 사실을 모두 털어놨다. 오랜 기간 백악관에서 일하던 자신을 클린턴 정권이 이유 없이 내쳤다며 앙심을 품고 있었던 트립은 르윈스키와의 대화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르윈스키 본인과 트립이 흘리고 다닌 염문은 워싱턴 정계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 소식은 당시 클린턴을 상대로 성희롱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던 전 아칸소 주정부 직원 폴라 존스의 변호인단에 포착됐다. 존스의 변호인단은 클린턴의 여성 편력 사례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르윈스키를 증인으로 채택해야 한다고 법원에 요청하기도 했다.

르윈스키가 변호인단과 함께 법원을 오가고 있다./사진=AFP르윈스키가 변호인단과 함께 법원을 오가고 있다./사진=AFP
트립은 르윈스키와의 통화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를 당시 이 사건을 맡았던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에게 건넸다. 1998년 1월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이 녹음 테이프를 입수해 대서 특필하면서 세상에 백악관 지퍼게이트의 전말이 공개됐다. 특검은 클린턴과 르윈스키가 1995년 11월부터 1997년 3월까지 10회 이상 성관계를 가졌으며 르윈스키가 제출한 푸른 드레스에 묻은 정액이 클린턴의 것이라고 밝혔다. 유사성행위 등 내용으로 구성된 이 보고서는 공개 당시 미국인 2000만명 이상이 읽은 것으로 전해졌다.

클린턴은 언론 보도와 특검 수사 등에서 르윈스키와의 관계를 부인하는 등 거짓말을 하면서 변호사 자격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하원에서 탄핵된 역대 두 번째 미국 대통령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탄핵안이 상원에서 부결됐지만 소속 정당인 민주당은 텍사스·아칸소 등에서 지지세력을 잃었다. 2000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앨 고어가 공화당의 조지 W 부시에게 패한 것은 클린턴에 대한 유권자들의 혐오감이 빚어낸 분석이 나올 정도였다. 이는 직장 내 성희롱으로 당사자 뿐 아니라 조직 이미지까지 실추되는 현상을 '르윈스키 효과'라고 부르는 배경이다.

책 출간·방송 출연, 다이어트 모델에 가방사업까지
르윈스키가 1999년 발간한 자서전 '모니카 이야기'와 서점에서 이 책을 구입하고 사인을 받으려고 줄 서 있는 사람들/사진=AFP르윈스키가 1999년 발간한 자서전 '모니카 이야기'와 서점에서 이 책을 구입하고 사인을 받으려고 줄 서 있는 사람들/사진=AFP
클린턴과의 스캔들 직후인 1999년 3월 르윈스키는 자서전 '모니카 이야기' 출간으로 50만달러(약 6억원)를 벌었다. 미국 뿐 아니라 유럽, 아시아 주요 국가에서 그의 책은 불티나게 팔렸다. 르윈스키는 사인회에 불려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책 출간 직후 유명 방송인 바버라 월터스와의 독점 인터뷰로는 100만달러(12억원)을 챙겼다.

책 출간과 방송 출연으로 큰 돈을 벌었지만 생활은 넉넉하지 않았다. 유명세로 취직 등 일상 생활이 불가능했다. 지퍼게이트 당시 법정에 불려 다니며 쓴 변호사 비용을 감당하는 것 조차 힘들었다.

(사진 위)르윈스키가 다이어트 스토리로 래리킹 토크쇼에 출연하고 있다. (사진 아래 왼쪽) 체중이 불어 은둔생활을 하던 시절, (오른쪽) 가방 사업가로 활동하던 모습/사진=AFP(사진 위)르윈스키가 다이어트 스토리로 래리킹 토크쇼에 출연하고 있다. (사진 아래 왼쪽) 체중이 불어 은둔생활을 하던 시절, (오른쪽) 가방 사업가로 활동하던 모습/사진=AFP
스트레스성 폭식으로 몸무게가 130㎏ 이상으로 불어났는데 이 역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친구 결혼식 등에서 포착된 그의 모습은 연예잡지 등에 경쟁적으로 실렸다. 체중감량 전문업체인 제니 크레이그가 르윈스키에게 다이어트 모델 계약을 제안했고, 이 프로그램을 통해 감량에 성공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르윈스키는 2000년 가방 디자이너로 변신해 자체 사업을 벌였지만 실패했다. 2000년대 초반엔 지큐·맨즈헬스 등 남성 잡지 행사의 단골 초대손님으로 불려 다니기도 했다. 클린턴 퇴임 이후 르윈스키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점점 약해졌다. 그는 2004년 영국 런던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석사과정을 밟았다.

"22세에 실수 안 한 사람 있나요?"…평생 꼬리표 달고 당당한 '셀럽' 행보
지난 2014년 미 경제지 포브스지가 주최한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는 르윈스키/사진=로이터지난 2014년 미 경제지 포브스지가 주최한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는 르윈스키/사진=로이터
자의 반 타의 반 은둔 생활을 하던 그녀를 대중들 앞으로 재소환한 건 다름 아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부인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힐러리 전 국무부장관이 민주당 유력 대선 주자로 떠오르자 르윈스키에게 여론의 관심이 쏠렸다. 측근의 말을 인용해 르윈스키가 클린턴을 잊지 못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그가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갖지 않은 것이 클린턴 때문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지퍼게이트 스캔들 이후 16년만인 지난 2014년 미국 경제지 포브스가 주최한 행사 연설자로 대중 앞에 선 르윈스키는 "22세에 실수 한번 안 해 본 사람 있나요?"라는 질문으로 포문을 연 뒤 "나는 22세에 상사였던 대통령과 사랑에 빠졌으며 지금은 많은 이유로 그 일을 깊이 후회한다"고 말했다.

르윈스키는 연예·미디어 행사에 적극 참여하는 등 셀러브리티(유명인)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자신이 사이버 폭력 첫 희생자 였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성폭력 고발운동인 '미투'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2020년 연예 정보 월간지 베니티 페어가 주최한 오스카 에프터 파티에 참석한 르윈스키/사진=AFP2020년 연예 정보 월간지 베니티 페어가 주최한 오스카 에프터 파티에 참석한 르윈스키/사진=AFP
최근엔 드라마 연출자로 분했다. 당시 성추문 사건을 10부작 드라마로 만든 TV시리즈 '탄핵'의 공동 연출을 맡은 것이다. 르윈스키는 "많은 사람들이 스캔들에 대해 알고 있지만 1998년 드러나지 않은 사실이 많다"며 "드라마를 통해 대중들이 몰랐던 것을 알게 되면 매우 놀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공동 연출을 한 것은 자랑스럽지만 나의 이야기인 것은 민망하다"고 덧붙였다.

세상의 반응은 달라졌다. 과거 그를 조롱했던 방송인들의 공식 사과가 잇따르고 있으며, 젊은 여성들은 르윈스키에게 지지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 그가 출연한 행사가 끝나면 '셀카'를 찍자고 달려가고 소셜미디어(SNS)로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르윈스키는 '클린턴의 그녀'라는 평생 떨어지지 않는 꼬리표를 가슴에 달고 2021년을 살고 있다.

르윈스키는 각종 행사에 초청돼 강연자로 대중들과 만나고 있다./사진=AFP르윈스키는 각종 행사에 초청돼 강연자로 대중들과 만나고 있다./사진=A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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