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 50년 대만 TSMC가 일본으로 간 까닭은

머니투데이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2021.10.16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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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임기자가 판다]대만 TSMC가 일본에 생산라인을 지으려는 3가지 이유

일본 TBS 방송이 14일 대만 TSMC가 자국 내에 2024년 가동을 목표로 반도체 파운드리 공장을 짓을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TBS 방송 화면 캡쳐.일본 TBS 방송이 14일 대만 TSMC가 자국 내에 2024년 가동을 목표로 반도체 파운드리 공장을 짓을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TBS 방송 화면 캡쳐.


대만 TSMC가 일본에 약 8000억엔(한화 8조 4000억원 규모)의 첫 파운드리 공장을 짓기로 하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왜 일본일까?

TSMC가 대만 이외에 중국, 미국에 이어 세번째 해외 생산시설을 2024년까지 일본에 짓기로 한데는 크게 3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확실한 시장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 자동차 업계는 전세계 시장의 25%를 차지한다. 여기에 들어가는 자동차용 반도체를 일본 현지에서 생산할 필요가 있어서 일본에 생산진지를 구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밑바탕에는 양국간의 오랜 IT협력과 국가간 우호 관계가 있다. 경쟁자인 한국을 이기고 싶어하는 의지도 내포돼 있다. 한국과 묘한 관계에 있는 양국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극한(克韓: 한국을 이기자)에 대한 공동인식을 갖고 있다. 게다가 중국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응하는 안보적 차원에서의 협력도 이번 파운드리 공장 공동설립이 갖는 의미다.



가장 큰 이유, 시장이 있으니까…일본 자동차 시장 찾아간 TSMC
일제 강점 50년 대만 TSMC가 일본으로 간 까닭은
한국자동차산업협회에 따르면 2020년 국적별 자동차 판매 비중 순위는 유럽계가 31.1%로 1위, 일본이 25.8%로 2위, 미국이 18.6%로 3위를 기록했다. 중국(14.8%)과 한국은 한국(7.5%) 4위와 5위를 차지했다.

올해 상반기에도 이 순위에는 큰 변동이 없다.

올 상반기 주요 시장 메이커 국적별 판매 현황을 보면 전체 2857만 2000대 판매 중 유럽계가 29.2%로 지난해말보다 1.9%포인트 소폭 하락했고, 일본계는 26.4%로 0.6%포인트 늘었다. 미국계는 17.5%, 중국계 16.2%, 한국은 8% 순이다. 전체 시장의 1/4 이상을 일본계 자동차 업체들이 차지하고 있다.


자동차용 반도체의 파운드리 사업을 위해서는 전세계 시장의 25% 이상을 차지하는 일본 현지에서의 생산이 필요하다는 TSMC의 필요성 때문이다. TSMC가 센서 분야에 강점을 가진 소니와 자동차 핵심 부품 생산업체인 덴소와 협력을 통해 구마모토현에 새 공장을 지으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주요 고객이 일본에 있기 때문이다.

첨단 공정보다는 다소 기술력이 떨어지는 22~28 나노 공정 제품을 양산하기로 한 것도 일본의 공장에서 자동차 및 산업용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웨이저자 TSMC 총재가 지난 14일 오후 기자회견에서 현지 생산공장 건설과 관련해 "우리의 고객, 일본 정부 쌍방에서 프로젝트를 지원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기 때문이다"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일본 정부는 토요타나 혼다, 닛산 등 자국의 자동차 기업들의 차량용 반도체 수급차질을 막기 위해 TSMC의 생산시설이 절실한 상황에 올해 추가경정 예산에 TSMC에 보조할 수천억엔(수조원)의 예산을 포함시킬 예정이다.

50년 식민 지배에도 우호적인 대만-일본 관계, IT 협력 이어와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8년 6월 28일(현지시간) 위스콘신 주 마운트플레전트에서 열린 대만 전자통신 장비업체 폭스콘의 디스플레이 공장 착공식에 참석하면서 손을 흔들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트럼프 대통령,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 궈타이밍 대만 홍하이(폭스콘 모회사) 회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8년 6월 28일(현지시간) 위스콘신 주 마운트플레전트에서 열린 대만 전자통신 장비업체 폭스콘의 디스플레이 공장 착공식에 참석하면서 손을 흔들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트럼프 대통령,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 궈타이밍 대만 홍하이(폭스콘 모회사) 회장.
한일관계의 경험으로 볼 때 청일전쟁 이후 50년간 일본에 피지배된 대만이 일본과의 관계가 나쁠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대만의 원주민과 외성인(1945년 이후 본토에서 이주한 한족), 본성인(명 청 시대 푸젠성 등의 이주민 출신 한족) 등 다양한 인구 구성 속에 대만인들은 본토인 중국보다는 오히려 일본과 가깝다. 일본의 식민 지배 방식이 한국과 대만에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대만 역사 속 본토인에 의한 다양한 박해의 과정에서 생긴 감정도 한몫하고 있다. 일본이 대만의 개화기를 함께 한데 대한 대만인들의 동질감이 강해 '반일 감정'이 거의 없다.

1960년와 70년대 한국과 IT기술의 파트너십을 맺던 일본은 반일 감정이 덜한 대만과 훨씬 더 많은 협력 관계를 맺어왔다. 1980년대 전세계 D램 시장을 장악했던 일본이 1990년대 삼성전자 (76,700원 ▲400 +0.52%)와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 (177,800원 ▲7,200 +4.22%)), LG반도체 등 한국 기업들에게 밀리자 기술이전과 제휴를 맺은 곳도 대만 기업들이다.

당시 D램 업체인 대만 난야테크놀러지, 파워칩, 프로모스, 이노테라메모리, 윈본드일렉트로닉스 등은 직간접적으로 일본과의 협력관계를 유지한 기업들이다. 특히 렉스칩은 2002년 대만 파워칩과 일본 메모리반도체 기업인 엘피다가 합작해 만든 기업이다.

2016년에는 대만 홍하이 그룹이 100년 역사의 일본 전자기업의 자존심인 샤프의 지분 66%를 약 7조원에 인수하기도 했다. 샤프 인수에 대해서는 2013년 삼성전자가 공을 들였으나 일본 내 반한 정서 등으로 삼성이 일부 투자(1200억원, 지분 3.04%)에만 그쳤었다. 하지만 홍하이 인수는 일본 내에서 대대적으로 반겼다.

궈타이밍 홍하이(폭스콘의 모회사) 회장은 대만과 일본이 힘을 합쳐 삼성을 무너트려야 한다며 강한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2015년 3월 샤프에 투자하겠다면서 "샤프의 첨단기술은 삼성전자보다 우수하다"며 "샤프와 협력해 삼성을 이길 것"이라고 반한감정을 불러 일으켰고, 그 다음해 샤프를 인수했다.

반도체 부활 꿈꾸는 일본...안보동맹 유지에 힘쓰는 대만
대만 TSMC 본사/사진=머니투데이 DB대만 TSMC 본사/사진=머니투데이 DB
대만은 국제적·지정학적으로 '하나의 중국 정책'으로 고립돼 있는 상태다. 대만의 숨통을 틔워주는 국가가 중국을 함께 견제하는 미국과 일본이다. 우리는 1992년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대만과는 공식적인 국교관계는 단절된 상태다.

반도체의 기술을 대만으로 이전했던 일본이 자국 내 반도체 경쟁력 강화를 위해 대만에 러브콜을 보낸 것도 이런 정치적 배경이 있다.

일본은 여전히 반도체나 기계, 중화학 공업에서 무시하지 못할 원천 기술 보유국이다.

우리 정부는 지난 2019년 일본이 반도체 핵심 소재인 불화수소와 포토레지스터,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을 규제하자 국내에서 자체적으로 국산화하는데 성공했다고 자부하지만 이는 단편적인 문제다. 일본이 자신들이 쓸 수 있는 패를 모두 보여준 것이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반도체 업계의 핵심 관계자는 "일본이 우리나라에 불필요한 제재를 한 것은 맞지만, 제대로 된 압박 수단을 쓴 것은 아니다"며 "일본이 전력투구를 해 한국 반도체 산업에 족쇄를 채우겠다고 하면 우리나라의 피해는 만만치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런 일본의 반도체 부문의 소재 및 부품 경쟁력이 대만 TSMC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TSMC도 일본에 투자하려는 것이다.

일본이 반도체 제조 분야에서 경쟁력을 잃은 가장 큰 이유 중 '적기 투자'를 하지 못한 시스템 때문이다. 반도체 투자는 기업의 사활을 거는 대규모 투자를 수반해 적기에 투자해 높은 수익을 올리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던'의 대표적 사업이다.

요즘엔 첨단 라인 1개를 구축하는데 15조원에서 30조원 가량이 투입된다. 이런 대규모 투자를 결정하려면 '결단'이 필요하고 그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사업구조가 돼야 한다.

하지만 일본 기업의 경우 2차 대전 이후 미 군정의 재벌 해체로 대부분 기업의 대주주가 금융권이다. 금융권의 마인드는 '리스크 헤징(위험 회피)'이다. 위험을 회피하는 업의 특성상 반도체와 같은 타이밍 사업에 투자하기 어렵고 실기한 것이 일본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다.

후카가와 유키코 와세대 교수는 몇년 전 일본 도쿄에서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일본 IT 기업이 망한 이유는 대규모 투자에 대해 과감하게 투자하고 결정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기 때문이다"며 "한국이나 대만 기업의 대주주의 과감한 의사결정이 부럽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일본 정부가 홍하이나 TSMC 등 대만 기업들로부터의 투자를 받는 이유도 이런 과감한 투자를 하면서도 일본에 우호적인 분위기 때문이다. 대만의 공격적 투자와 일본 민관의 협력을 통해 한국 반도체 기업들을 위협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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