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곡으로 돌아본 빅뱅의 15년

머니투데이 깅성대(대중음악 평론가) ize 기자 2021.08.24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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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YG엔터테인먼트 사진제공=YG엔터테인먼트


격세지감. 빅뱅이 아직 연습생 시절일 때 찍은 리얼 다큐멘터리와 지드래곤의 'One Of A Kind' 뮤직비디오를 나란히 보고 든 내 감정이다. 세븐의 콘서트 무대에 설 수 있을지 없을지가 프로로서 생사 갈림길이었던 그때 댄스 트레이너에게 유독 혼이 났던 탑(최승현)의 주눅 든 모습은 다시 봐도 안쓰럽다. 그와 달리 "난 좀 재수 없고 비싼 몸"이라며 "내 노랜 건물을 올리지" 힘껏 스웨그(Swag) 하는 지드래곤의 모습은 자신들에게 언제 그런 시절이 있기라도 했냐는 듯 시종 여유롭고 당당하다. 새삼 들춰본 빅뱅의 과거는 스무 살 탑의 소심함과 24살 지드래곤의 자신감이 6년이라는 세월 사이에서 재능과 노력이라는 변수에 둘러싸여 엎치락뒤치락했다. 대중적 인기와 성공이라는 대폭발(Big Bang)의 징후는 바로 그 안에서 포착되었다.

대한민국에서 아이돌 그룹의 원년을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한 1992년으로 잡을 수 있다면 2006년에 데뷔한 빅뱅은 정확히 그 역사의 중간에 있다. 물리적인 시간을 떠나 그들이 들려준 음악, 패션, 활동 방식 모두가 빅뱅 이전과 이후로 대한민국 아이돌 경향을 가르는 기준이 된 것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에서 댄서로 활약한 양현석의 회사 YG엔터테인먼트는 그런 빅뱅을 "아이돌의 진화"라 자평했다. 그들 표현대로 빅뱅은 "단 한 곡도 공개 않고, 단 한 번 단독 무대도 없"이 10부작 리얼 다큐만으로 스타가 됐다. 그리고 2008년도에 양현석은 "서태지는 열매와 잎사귀가 풍성하게 달린 올려다볼 거목이고 빅뱅은 '이 싹이 얼마나 잘 자랄까'하며 굽어 살펴야 할 묘목"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 "굽어 살펴야 할" 묘목 역시 누군가가 "올려다볼" 거목이 된지는 이미 오래지만 말이다.

지난 8월 19일은 그런 빅뱅이 데뷔한 지 딱 15주년 되는 날이었다. 명과 암, 희와 비가 교차했던 그 파란만장한 시간을 한 번쯤 돌아보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고민을 거듭하다 이들의 기존 다섯 곡(리더 지드래곤의 솔로곡 포함)을 놓고 이야기를 풀어보기로 했다. 다룰 곡의 의미는 곡 제목에서 나올 수도 있고 그 노래의 역사적 위치 또는 가사 내용에서 나올 수도 있다. 꼭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자신들 스스로 곡을 만들고 부른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는 '아티스트형 아이돌'의 전형. 빅뱅 15주년의 반추를 위한 첫 곡은 이들의 첫 정규작에 수록된 'Big Boy'다.

Big Boy (from 'BIGBANG Vol.1 Since 2007')

지금도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힙합 아이돌'이라는 말은 늘 부당한 의심을 받아왔다. 랩을 하려는 아이돌들은 남이 주는 곡을 받아 부르고 춤추면 된다는 세간의 그릇된 편견과 아티스트로서 성찰, 살아온 이력, 장르적 정통성 등을 따지는 래퍼의 요건(?) 앞에서 쓸데없이 더 위축됐다. 빅뱅도 처음엔 그런 의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힙합을 좋아해 그걸 제대로 해보려는 그룹처럼은 보이는데 막상 히트곡들을 보면 어쩔 수 없는 아이돌 팝 그룹이라는 결론에 이르기 일쑤였기 때문이다.(사실 그렇게 보이면 좀 어떤가?) 하지만 이들은 데뷔 앨범에 실은 'Big Boy'와 '흔들어'로 외부자들의 의심 어린 시선에 균열을 냈다. 8살 때부터 SM엔터테인먼트에서 연습생 생활을 한 리더 지드래곤이 우탱클랜을 듣고 힙합에 빠지며 YG엔터테인먼트로 둥지를 옮긴 간접적 연유가 이 곡에는 담겨 있다. 난무하는 선입견에 맞서 빅뱅이 지드래곤의 프로듀싱과 탑의 바리톤 랩으로 안착시킨 힙합 아이돌의 계보는 물론 2021년 현재 BTS와 NCT, 블랙핑크 같은 팀들이 훌륭히 이어나가고 있다.

거짓말 (from 'Always')

뮤지션(그룹)이라면 누구에게나 도약과 반등의 징조, 계기가 되는 곡이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다. 아이유에겐 '좋은 날'이 그랬고 트와이스에겐 'OOH-AHH 하게'가 그랬다. 빅뱅에겐 '거짓말'이 있었다. '거짓말'은 마룬 파이브 샘플링이 포함된 싱글들과 정규작 한 장에 머물렀던 2007년 무렵 최고의 보이밴드로서 입지를 굳혀야 했을 이들에게 기적처럼 찾아온 곡이다. 어느 날 지드래곤이 잠들기 전 떠올라 컴퓨터에 저장해둔 서정적인 피아노 멜로디와 귀에 쏙 들어오는 코러스 멜로디를 거머쥔 '거짓말'을 계기로 빅뱅은 정말 거짓말 같은 인기를 누리게 된다. 발표한 그해 거의 모든 국내 차트, 음반(음원) 판매량 및 방송 횟수 정상을 쓸어 담은 '거짓말'은 빅뱅의 과거 영광이 아닌, 빅뱅 그 자체를 상징하는 곡으로 '하루하루'와 더불어 지금도 팬들의 추억 깊숙한 곳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Fantastic Baby (from 'Alive')

'빌보드'지는 이 곡이 "한국 가요계의 판도를 뒤엎었다"라고 평했다. 같은 소속사의 싸이가 '강남스타일'을 만들 때 분명 참조했을 법한 이 넘실대는 일렉트로 하우스 넘버는 '뱅뱅뱅'과 더불어 5억 회 안팎의 유튜브 재생 횟수를 기록하며 빅뱅의 글로벌 인지도를 넓혔다.(2021년 8월 24일 현재 재생 횟수는 4억 8천9백만 여회에 이르렀다.) 이는 데뷔 6년 차에 접어든 빅뱅이 데뷔 때부터 누려온 전성기의 정점이자 힙합과 알앤비, 퓨처 베이스를 포함한 그룹 내 장르 차원의 확장이었다. 2011년 MTV 유럽 뮤직 어워드에서 '최우수 월드와이드 액트 상'을 받고 이듬해 이탈리아 MTV TRL 어워즈에서 '베스트 팬 상'을 수상한 건 그 정황이었다. 물론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일본 돔 투어에서 420만 5500명 관객을 동원한 것 역시 'Fantastic Baby' 이후 빅뱅의 위상이 어디까지 뻗었는지를 보여주는 객관적 수치다.

무제(無題) (from '권지용')

빅뱅은 뭉쳐도 잘했고 흩어져도 잘했다. 2001년 발매된 힙합 컴필레이션 앨범 '2001 대한민국 Hip Hop Flex'에 열셋 나이로 'G-Dragon'이라는 곡을 실으며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예고한 지드래곤은 그중 좀 더 잘했다. 그는 이후 이 곡 '무제(無題)'를 담아 "USB도 음반이냐"는 업계 논쟁을 불러일으킨 세 번째 솔로 앨범 '권지용'까지 내며 입지전적의 트렌드 세터로서 정상에 섰다. '삐딱하게' 뮤직비디오에 댓글을 쓴 외국의 한 팬은 그런 지드래곤을 가리켜 "이 시대의 한국인 조커"라고 말했다. '소년이여'의 노랫말처럼 그는 정말 그렇게 "열세 살 나이에 와서 쉴 틈 없이 달려왔"다.

연습생 시절부터 알앤비/솔에서 타고난 끼를 보여준 태양도 빅뱅에서 가장 먼저 솔로 앨범을 내며 자신의 음악 취향을 그냥 묻어두지 않았다. 그리고 데뷔작 'Hot'과 곡 '나만 바라봐'로 그는 2009년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알앤비&소울 부문 앨범과 노래상을 함께 받으며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2014년작 'Rise' 역시 빌보드 앨범 차트와 미국 아이튠즈 알앤비 차트에서 각각 112위와 1위에 올리며 태양은 자신만의 음악 끈을 단단히 동여맸다.

데뷔 때부터 노래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대성도 발라드와 트로트, 엔카로 한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자신만의 시장을 개척해왔다. 그는 2013년, 딜라이트(D-Lite)라는 활동명으로 제이팝을 커버한 일본 데뷔작 'D'scover'를 내고 현지 전략에 차별성과 명분을 더한 끝에 이듬해 일본 아레나 투어에서 무려 17만 명 관객을 홀로 동원하는 뚝심을 보여줬다.

연기자로도 커리어를 쌓고 있는 탑은 지드래곤과 유닛으로 정규작을 내며 래퍼로서 자부심을 지켰는데, 그중 'Turn It Up'은 한국 힙합 역사를 다룬 책 '힙합코리아'를 쓴 일본 작가 토리이 사키코가 "한국 힙합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된 곡"으로 언급하며 뜻하지 않은 문화 가교 역할을 해내기도 했다.

이처럼 제목 없는 제목(無題)을 가진 지드래곤의 노래는 언뜻 떠난 사랑을 그리워하는 러브송으로 들리면서도, 그 제목을 넓고 멀어 끝이 없다는 뜻의 '무제(無際)'로 바꾸면 그간 빅뱅이 걸어온 길, 그들이 앞으로 걸어갈 길을 함축한 '다 이룬 자의 사색'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배경을 바꾸며 롱테이크로 찍은 뮤직비디오를 보며 그런 생각은 어느새 확신으로 굳어진다.

꽃 길 (from '꽃 길')

지금 빅뱅의 시계는 이 싱글이 나온 2018년 3월 13일에서 멈춰있다. '꽃 길'은 이들이 잘하는 일렉트로닉 팝도 완전한 힙합도 아니다. 그저 경지에 이른 지드래곤의 프로듀싱 아래 어쿠스틱 기타와 랩을 가미한 팝 알앤비 곡이다. 김소월의 시를 모티프로 좋았던 과거를 추억하고 떠난 사람이 다시 돌아오길 기다리겠다 쓴 가사는 언뜻 뻔해 보이지만 지금 꽃 길 대신 가시밭길을 걷고 있을, 또 어디에선가 가시방석에 앉아 있을 전 멤버와 현 멤버를 떠오르게 한다는 데서 곡 제목은 제법 복잡한 해석을 부른다.

군 복무를 마친 지드래곤과 태양, 탑과 대성은 지난해 3월 YG엔터테인먼트와 세 번째 재계약을 했다. 지드래곤은 같은 해 11월 "곡을 작업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근황까지 전해왔지만 이후 9개월이 지난 지금도 빅뱅의 복귀는 그저 가능성으로만 머물러 있다.

지난 2015년 6월 18일 JTBC와의 인터뷰에서 지드래곤은 "우리가 어떤 음악을 하고, 그 음악으로 어떻게 세상을 바꾸고, 문화를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느냐"를 말했다. 그는 빅뱅의 존재 이유를 "멋"이라는 한 마디에 담았다. 천하의 빅뱅도 "멋없으면 끝"이라는 얘기다. 그들의 '꽃 길'이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지 아니, 더 이어지긴 할 것인지, 이어진다면 언제쯤 다시 시작될 건지. 싱글 하나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언젠가 지디&탑의 '뻑이 가요'를 공동 작곡한 세계적인 DJ 겸 프로듀서 디플로는 두 사람의 "엄청난 플로우"를 극찬하며 "빅뱅에는 뉴 키즈 온 더 블록, 제이 지, 마일리 사이러스, 저스틴 비버가 믹스돼 있다"라고 말했다. 그랬다. 혹자의 말처럼 빅뱅은 "한국 주류 대중음악이 배출한 최초의 블랙 뮤직 아이돌"이었다. 그런 빅뱅을 2016년 빌보드는 "국제적인 경계와 케이팝 산업의 한계를 동시에 뛰어넘은 보이밴드"라고 썼다. 구글의 전 회장이었던 에릭 슈미트가 케이팝의 성공 비결로 꼽은 "감각과 스타일"은 그래서 결국 빅뱅의 성공 비결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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