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한미관계…'이재용 가석방'엔 왜 낯선 단어가 등장했나

머니투데이 심재현 기자 2021.08.1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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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4월30일 삼성전자 화성캠퍼스 부품연구동(DSR)에서 열린 시스템반도체 비전 선포식에서 세계 최초 EUV(극자외선) 7나노 노광공정으로 출하된 실리콘웨이퍼에 서명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문 대통령의 서명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뉴시스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4월30일 삼성전자 화성캠퍼스 부품연구동(DSR)에서 열린 시스템반도체 비전 선포식에서 세계 최초 EUV(극자외선) 7나노 노광공정으로 출하된 실리콘웨이퍼에 서명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문 대통령의 서명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뉴시스


"국익을 위한 선택으로 받아들인다. 국민께서도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반대하는 국민의 의견도 옳은 말씀이지만 엄중한 위기 상황 속에서 특히 반도체와 백신 분야에서 역할을 기대하며 가석방을 요구하는 국민도 많다."



청와대가 지난 13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가석방을 두고 오랜 침묵 끝에 문재인 대통령의 입장을 공개한 것은 국민 여론과 이재용 역할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정치적 셈법으로 해석된다. 법무부의 지난 9일 이 부회장 가석방 결정 이후 이어진 찬반 양론을 두루 살피면서 이 부회장의 향후 행보에 대해서도 일종의 메시지를 던진 것이라는 분석이다.

특히 이 부회장 역할론에 대해 청와대 고위 관계자의 부연을 곱씹을 만하다. 이 관계자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구축과 한미정상회담 후속조치, 코로나19 백신 수급과 관련한 국민적 요구가 있다"며 "(이 부회장이) 그에 부응하는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반도체 위기에 투자·M&A 결단 필요
광복절 가석방으로 풀려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3일 오전 경기 의왕 서울구치소에서 나와 이동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이날 서울구치소 앞에서 취재진과 만나 "국민 여러분께 걱정을 끼쳐 죄송하다"며 "저에 대한 걱정과 비난, 우려, 그리고 큰 기대를 잘 듣고 있고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MTN 중계 갈무리광복절 가석방으로 풀려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3일 오전 경기 의왕 서울구치소에서 나와 이동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이날 서울구치소 앞에서 취재진과 만나 "국민 여러분께 걱정을 끼쳐 죄송하다"며 "저에 대한 걱정과 비난, 우려, 그리고 큰 기대를 잘 듣고 있고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MTN 중계 갈무리
재계에서 그동안 이 부회장 가석방 또는 사면을 요청하면서 든 가장 큰 이유도 '반도체'였다. 반도체 산업이 삼성전자 (82,400원 ▲1,600 +1.98%)의 주력 사업인 데다 국가경제의 핵심 축으로 자리잡으면서 이를 이끌 경영리더십 회복이 시급하다는 논지였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반도체 산업은 지난달 국내 전체 수출액 554억4000만달러(약 63조8669억원) 가운데 19.8%(110억달러)를 차지했다. 올 상반기 반도체 산업 누적 수출액은 571억3400만달러로 자동차(236억달러), 철강(163억달러), 조선(118억달러) 부문의 수출액을 모두 합한 것보다 많다. 반도체 산업이 흔들리면 국가경제가 휘청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달 들어 반도체 업황 우려가 커지면서 외국인 투자자들이 삼성전자 주식을 대규모 매도하자 원/달러 환율이 치솟는 상황도 국내 경제 구조에서 반도체 산업이 차지하는 위상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원/달러 환율은 지난 13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장중 한때 1169.5원까지 오르면서 지난해 9월29일 1171.2원 이후 11개월만에 최고치를 고쳐 썼다.

백신·한미관계…'이재용 가석방'엔 왜 낯선 단어가 등장했나
반도체 산업 자체만 놓고 보면 매년 수십조원의 자금을 쏟아부어야 하는 사업 특성상 최고 의사결정권자의 부재는 곧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업계 한 인사는 "최근 미세공정기술이 고도화하면서 공장 하나를 짓는 데만 20조원 이상이 들어간다"며 "투자 규모도 규모지만 이런 투자를 계획해 제품을 양산하기까지 2~3년이 걸리는데 몇 년 뒤 시장 상황을 예측해 최종 결단을 내리는 것은 현재 국내 기업에서 총수 없이는 진행되기 힘들다"고 말했다.

청와대가 이 부회장 가석방을 두고 '한미정상회담 후속조치'를 콕 찍어 언급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풀이된다. 삼성전자는 지난 5월 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한미정상회담 당시 미국 현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생산공장 신·증설 계획을 공식화했지만 현지 정부의 세제 혜택 등과 맞물린 수익성 문제로 4개월째 공장 부지조차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백신·한미관계…'이재용 가석방'엔 왜 낯선 단어가 등장했나
정부 입장에서는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중국의 '반도체 굴기(일어섬)'에 대한 견제책으로 한국과 대만 등을 포함한 반도체 동맹을 노골적으로 압박하고 삼성전자의 미국 현지 공장 신·증설이 동맹의 상징으로 오르내리는 상황에서 이 부회장의 결단이 필요한 셈이다.

업계에서는 올 들어 파운드리 세계 1위 업체인 대만 TSMC가 1000억달러(약 115조원) 투자안을 발표하고 반도체 종가인 미국 인텔이 파운드리 사업 재진출을 선언하는 등 공격적인 행보에 나서는 가운데 삼성전자가 골든타임의 막차를 탔다는 얘기도 나온다.

업계 또다른 인사는 "이 부회장이 자리를 비운 새 굵직한 투자 결단이 줄줄이 밀리면서 시스템반도체 시장에서 2030년까지 1위를 달성하겠다는 '비전 2030' 목표도 답보 상태에 빠졌다는 평가가 나왔다"며 "이 부회장이 경영에 복귀하면서 이제 메모리반도체와 시스템반도체 사업 전반에서 M&A(인수합병)를 포함해 대대적으로 고삐를 조이지 않겠냐는 관측이 나오는 게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인맥, 화이자 협상 때도 돌파구로
광복절 가석방으로 풀려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3일 경기 의왕 서울구치소에서 나서고 있다. 국정농단 사건으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 받고 재수감된 지 207일 만이다. /사진=뉴스1  광복절 가석방으로 풀려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3일 경기 의왕 서울구치소에서 나서고 있다. 국정농단 사건으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 받고 재수감된 지 207일 만이다. /사진=뉴스1
청와대가 언급한 반도체 역할론이 경제 부문에 대한 기대라면 코로나19 백신 수급과 관련한 발언은 이 부회장의 글로벌 인맥 네트워크를 통해 수차례 확인한 성공사례를 염두에 둔 당부로 풀이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말 글로벌 제약사 화이자의 코로나19 백신 조기 확보 성과다. 당시 화이자 백신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이 부회장의 역할이 적잖았던 사실이 지난 4월 뒤늦게 공개됐다.

☞ 4월24일 보도 '웃돈 줘도 못 구하는 화이자 백신…이재용은 어떻게 뚫었나' 참조

정치권 등에 따르면 정부 관계자들이 지난해 협상 마무리 시점으로 예정했던 12월 초까지 화이자 고위 인사와의 협상 창구를 확보하지 못해 아시아 지역 판매를 담당하는 실무 임원진과 소득 없는 논의를 이어가던 상황에서 이 부회장이 화이자 회장과 정부 협상단 사이에 다리를 놨다.

당시 이 부회장은 오랜 기간 교류해온 샨타누 나라옌 어도비 회장이 화이자 사외이사라는 점을 알게 되자 휴가 중이던 나라예 회장에게 직접 전화해 화이자 회장과 백신 총괄사장을 소개받았다. 이 부회장의 중재로 12월22일 화이자 고위임원과 박능후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 김강립 식품의약품안전처장, 정은경 질병관리처장 등이 참석한 화상회의가 열렸고 이를 계기로 백신 확보 논의가 급진전됐다.

지난 4월 경북 경주시 실내체육관에서 지역 75세 노인 등을 대상으로 진행된 코로나19 화이자 백신 접종을 앞두고 의료진이 주사기에 백신을 소분 조제하고 있다. /사진=뉴스1지난 4월 경북 경주시 실내체육관에서 지역 75세 노인 등을 대상으로 진행된 코로나19 화이자 백신 접종을 앞두고 의료진이 주사기에 백신을 소분 조제하고 있다. /사진=뉴스1
이 부회장은 지난 1월 사업차 아랍에미리트(UAE) 출장을 준비하면서도 사업 협력과 함께 UAE가 확보한 백신 물량 공유를 논의하려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 출장은 같은 달 18일 국정농단 파기환송심에서 이 부회장이 구속 수감되면서 무산됐다.

현재 개발된 코로나19 백신 가운데 화이자 백신은 아스트라제네카와 얀센 백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작용이 적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웃돈에 웃돈이 붙는 백신이 됐다. EU(유럽연합)가 내년과 내후년에 쓸 백신 18억회분에 대한 협상에서는 화이자가 지난해 11월 공급가격보다 26%가량 높은 가격을 부른 것으로 전해진다. 국내에서도 부작용 문제 등과 맞물려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남아돌아 일부 폐기 처분되는 반면, 화이자 백신은 공급이 딸리는 상황이 보고되고 있다.

재계 안팎에서는 청와대가 언급한대로 이 부회장이 광범위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 다시 한번 코로나19 백신 수급과 관련해 조력 역할을 하지 않겠냐는 예상이 나온다. 지난달 모더나 백신 4000만회분 확보에 차질이 빚어진 것과 관련해 모더나 백신을 위탁생산하고 있는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역할론을 거론하는 목소리도 고개를 든다.

실질 경영활동 보장할 듯…출소 첫날 출근으로 화답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이 지난 13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가석방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뉴스1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이 지난 13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가석방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뉴스1
법무부가 이 부회장 가석방을 결정한 사유로 국가경제와 관련한 역할을 언급한 데 이어 청와대도 '이재용 역할론'을 거들고 나선 것은 일부 정치권과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불거진 취업제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부회장의 실질적인 경영활동을 막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이 부회장이 지난 13일 출소하자마자 삼성서초사옥에서 사장단을 비롯한 주요 경영진을 만나 경영 현안을 논의한 데도 이런 교감이 바탕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 부회장 역시 취업제한 논란과 보호관찰 등 가석방 출소에 따른 여러 제약 속에서도 최대 성과를 내겠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던졌다는 평가다.

재계와 학계에서는 이 부회장이 무보수 미등기 임원인 만큼 주요주주이자 미등기 임원으로 경영활동을 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재계 한 인사는 "이 부회장이 정부와 국민의 기대에 화답하는 차원에서 반도체·백신 관련 사업 현장에 우선 방문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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