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소부장 자립, 원천연구가 답이다

머니투데이 이길우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부원장 2021.08.13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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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이길우 부원장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이길우 부원장


일본 정부의 예고 없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분야 3개 품목의 수출규제로 촉발된 한일 무역분쟁이 2년을 지나고 있다. 그동안 정부와 산업계의 신속한 대응으로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소재·부품·장비(소부장)와 관련된 위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미중의 무역분쟁과 보호주의 확대,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으로 인한 글로벌 가치사슬(GVC)의 균열은 상존하는 불안요소다. 소부장 수출규제로 무역 상대국을 압박한다는 점에서 일본과 미국은 닮은꼴이다. '중국 제조 2025'에 대한 미국의 견제로 시작된 미중 무역전쟁은 5G(5세대 이동통신), 인공지능, 반도체 등 첨단기술 분야의 기술패권주의 양상을 보인다. 우리나라도 제조업뿐만 아니라 전 산업분야에서 큰 도전에 직면할 것으로 예상된다.

소부장은 제조업 가치사슬의 출발점이자 제품의 부가가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제품의 경쟁력은 이를 구성하는 소재, 부품의 질에 의해 결정되며 완제품 조립, 생산능력이 전세계적으로 평준화함에 따라 산업경쟁력의 패러다임도 소재, 부품으로 이동한 지 오래다. 소부장은 기업 경쟁력의 핵심요소일 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의 전략자산이기도 하다. 소부장 없이는 대외의존이 불가피하고 자립적인 경제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소부장 경쟁력 확보의 요체는 바로 원천기술이다. 원천기술은 소재의 성능한계를 극복하거나 새로운 기능을 창출하는 기술이다. 장기간, 대규모 R&D(연구·개발) 투자가 필요하지만 성공 가능성은 낮기에 기업이 선뜻 뛰어들기 어렵다. 대신 성공했을 때 경제적 파급효과는 막대하기에 선진국들은 기술우위를 바탕으로 소재 원천기술 개발에 힘쓴다.

미국은 경쟁력강화계획(American Competitiveness Initiative)을 통해 고위험 혁신연구(Transformative Research)를 장려한다. 연방정부 차원에서는 투자위험이 큰 원천기술 개발을 지원하는 R&D 프로그램(Advanced Technology Program)을 운영한다. 잠재력이 큰 원천연구 프로젝트에 대해 대기업, 중소기업, 대학을 연계해 상업화 이전 단계까지 지원하는 것이다.



일본은 부처별, 기술분야별, 연구단계별, 연구주체별로 단절된 현재 정부 R&D 시스템을 '적시의, 중단없는, 중장기 후속연구 지원체계'로 개선하고 있다. '연구성과 최적전개 지원사업'(A-Step)은 대학이나 연구소가 보유한 원천연구 연구성과를 연구단계, 투자위험성 등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지원해 실용화를 돕는 사업이다. 이화학연구소(RIKEN)가 주도하는 '배턴존사업'(Baton Zone Program)은 연구소와 기업이 실용화를 위해 이어달리기를 하자는 개념이다.

소부장으로 촉발된 무역전쟁, 기술패권의 시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원천연구에 다시 한 번 주목할 때다. 소부장 핵심 원천기술을 확보하고 자립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는 전략적이고 창의적인 원천연구를 활성화하고 그 성과를 사업화로 연계해야 한다. 신진연구자 육성, 학제간 연구, 산학연 협력은 이를 위한 필수 선결조건이다. 기업이 쉬이 나서기 어려운 만큼 정부가 앞장서서 투자해야 한다. 투자확대와 더불어 기존 틀에 얽매이지 않은 새로운 형태의 연구지원 프로그램과 지원시스템도 필요하다. 창의성 중심의 평가제도, 개인 중심의 펀딩, 젊은 연구자에 대한 폭넓은 지원, 연구 속성에 맞는 연구관리제도, 다양한 형태의 사업화 지원 프로그램 등이다.

위기(危機)는 늘 위험(危)과 기회(機)를 동시에 품고 있다. 일본의 수출규제로 촉발된 위기를 R&D, 특히 원천연구 진흥의 적기(適期)로 삼아야 마땅하다. 제4차 산업혁명으로 지식기반 경제가 급속히 진전되는 가운데 원천기술에 대한 집요한 투자야말로 혁신을 통한 미래 성장동력 확보의 근본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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