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스를 만나 뮤지컬을 만든 잔나비

머니투데이 김성대(대중음악 평론가) ize 기자 2021.08.05 09:54
글자크기
사진제공=페포니뮤직 사진제공=페포니뮤직


잔나비의 새 앨범이다. 2집 '전설'에서 보면 2년 여만, '잔나비 소곡집 I'에서 따지면 8개월 여만이다. 첫 곡 '환상의 나라'부터 6년 전 써둔 '컴백홈'까지 총 13곡이 담겼고, 지난해 결혼 후 입대한 베이시스트 장경준과 지난 7월 전역한 윤결은 참여하지 않았다. 기타리스트 김도형 역시 군 복무 중이지만 그는 작곡, 기타, 베이스 등으로 신작 여기저기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앞선 두 사람의 공백은 양반들(The Yangbans) 출신 베이시스트 박천욱과 2016년 '신드럼과 김기타'라는 팀으로 존재를 알린 세션 드러머 신이삭이 메웠다. 본작에는 기타리스트도 한 명 가세했으니 3인조 밴드 블락스(The Blocs)의 멤버이면서 솔로 프로젝트 슬로우민스테디(Slowminsteady) 활동도 병행 중인 문석민이다. 문석민은 과거 스텔라장과 정승환의 음악에도 등장한 바 있다.

실력과 인지도 모든 면에서 바닥부터 착실하게 밟아온 잔나비는 한국에서 비교적 마니아 장르로 치부되는 헤비메탈(구체적으론 오지 오스본과 메탈리카 등)에서 음악 세례를 받았으면서도 단독 공연 관중 6000여 명(이틀 기준) 이상을 동원하는 인디 밴드로 거듭났다. 이는 돈 안 된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웬만하면 말린다는 '밴드 음악'을 되려 팀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인 덕이고, 그 뿌리 깊은 편견에도 아랑곳 않고 스스로 좋아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온 결과다. 아마도 혁오나 9와 숫자들 정도가 아니면 이들에 필적할 국내 인디 밴드는 없으리라. 잔나비는 어느새 거물 밴드가 됐다.



델리 스파이스와 뜨거운 감자, 크라잉 넛 등을 커버한 버스킹 밴드로 잔뼈가 굵은 잔나비의 그러한 음악 좌표는 기본적으로 과거를 향해 있다. 그러니까 이들의 영웅은 3호선 버터플라이나 콜드플레이가 아닌 산울림('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과 비틀스('웃어도 될까요')였던 것이다. 세간에서 통용되는 '밴드'라는 수식어도 이들은 굳이 옛 정겨운 '그룹사운드'로 대체해 멀고 먼 60~70년대 시절에 자신들을 위치 짓는다.(비교적 세대 차이가 덜한 포 논 블론즈나 블러, 마룬파이브는 예외로 잔나비의 음악 DNA에 알게 모르게 스며 있다.) 힙하고 쿨한 트렌드를 멀리 하고 차라리 자신들이 그 트렌드가 되어버리는 잔나비는 헤비 펑키 트랙 'Jungle'에서 퀸의 'Death On Two Legs (Dedicated To...)'의 코러스를 짧게 인용하거나 'Good Boy Twist'에 낵(The Knack)의 'My Sharona' 코러스를 양념처럼 곁들이며 레트로를 향한 애정, 집념을 이어왔다. 심지어 최정훈은 'Goodnight (intro)'에서 시도했던 테이프 녹음을 다음 네 번째 앨범 전체에 적용해보자고까지 했다니. 이 정도면 복고 지향을 넘어 복고 중독에 가깝다.

작곡, 프로듀싱을 겸하는 보컬리스트 최정훈의 가사와 음색은 반론의 여지없는 잔나비 음악의 심장이다. 최정훈은 긍정과 화합을 바탕으로 환상과 상상, 삶의 순간, 사람과 사랑, 사회와 시대 군상을 문어체/구어체, 하오체/해요체 구분 않고 노랫말에 실어낸다. "읽기 쉬운 마음"이나 "미소 위로 닻을 내리고", "촌스러운 은유를 벗겨내는 고통" 같은 문학적 수사는 그런 작사가로서 최정훈의 장기 중 일부일 뿐이다. 그는 가사를 쓸 때 확신하거나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멜로디와 편곡에 따라 작사한다는 그는 그저 자기와의 대화를 통해 걸러진 언어를 글로 옮길 뿐이다. 혼자만이 아는 그 내면의 독백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것이고, 그들의 정서적 지지가 결국 지금의 잔나비를 있게 했다. 엘튼 존의 'Can You Feel The Love Tonight'를 듣고 싱어송라이터 꿈을 키운 최정훈. 어떻게든 듣는 이들에게 가식 없이 다가가려 한다는 그는 "어떤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부서지고 변화할 수 있다"라고 한 철학자 니체의 말처럼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자아를 부수어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왔다.



사진제공=페포니뮤직 사진제공=페포니뮤직
잔나비의 세 번째 작품 제목은 '환상의 나라'다. 최정훈에 따르면 이 음반은 "한 숨에 이어가는" 앨범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열매마냥 똑 떼어낼 수 있는 곡 단위보단 따로 베어낼 수 없는 물의 흐름에 기댄, 즉 덩이진 곡들의 마감이 곧 작품의 마감이 되는 이른바 '콘셉트 앨범'이라는 얘기다.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스트링과 브라스, 성가대를 앞세운 이 웅장한 도발은 결국 잔나비 아니, 최정훈이 싱글 히트보단 명반을 남기려는 음악가로서 의지를 노골적으로 표출한 것에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그는 지금으로부터 반 세기 이상도 전인 1967년도로 우리를 데려간다.

1967년. 이 해는 지미 헨드릭스와 도어스(The Doors), 핑크 플로이드가 데뷔한 해로, 사이키델릭 록이라는 운무가 영미권 대중음악이라는 산을 휘감던 때였다. 무엇보다 1967년은 비틀스의 고전 '페퍼상사(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가 세상을 만난 해이기도 했다. 앞서 말했듯 비틀스는 산울림과 더불어 잔나비의 음악적 교과서이자 최정훈이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대중음악 아이콘. 실제 '비틀 파워!'라는 곡에서 최정훈은 폴, 존, 조지, 링고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나 그대 뜻에 다다랐어요 (...) 그래서 내 식대로 해냈어요."

그렇게 최정훈은 27년 전 비틀스를 동경한 또 하나 록 밴드(오아시스)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롤모델이 남긴 희대의 명반을 향해 3집의 닻을 올렸다. 마치 유영석의 'W.H.I.T.E.' 확장판 또는 업그레이드 버전 같은 '환상의 나라'는 그래서 동시에 잔나비식 '페퍼상사'인 셈이다. 꿈과 희망, 사랑과 우정, 성실과 현실, 작업실 앞 공원을 노래한 그것은 '페퍼상사' 리뷰를 쓴 평론가 브루노 맥도널드의 말마따나 "야심 찬 시도와 멜로디가 영원히 서로를 휘감으며 돌고 있는 완벽한 팝"이다.

물론 처음엔 낯설지 모른다. 일단 이 앨범에는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같은 킬링 트랙이 따로 없다. '봉춤을 추네'에서 같은 쫄깃한 라임도, 'See Your Eyes'의 상큼한 그루브도, '달'에서 들려준 블루지 기타 솔로도, 'Cuckoo'의 컨트리 스타일도 없다. 대신 그 자리엔 'Surprise!'나 '신나는 잠', '작전명 청-춘!', 그리고 '투게더!'의 스트링이 예고한 뮤지컬 음악이 들어섰다. 비틀즈를 만나 뮤지컬을 만든 최정훈은 작사가로서 전에 없던 감성과 상상력으로 무장해 마치 '펫 사운즈(Pet Sounds)'를 조각하던 브라이언 윌슨처럼 녹음 현장을 지휘하면서 오랜 시간 꿈꿨을 자신만의 음악 왕국을 세웠다.

사진제공=페포니뮤직 사진제공=페포니뮤직
따라서 이 음반에선 '누구를 위한 노래였던가'와 '밤의 왕국', '외딴섬 로맨틱'으로 이어지는 3연타 트랙에서 굳이 대표 싱글을 꼽으려 해선 안 된다. 차라리 '환상의 나라'에서 '용맹한 발걸음이여'로 넘어갈 때 두 곡을 잇는 새소리와 어쿠스틱 기타 연주, '페어웰 투 암스! + 요람 송가'의 도도하고 장엄한 구성, 아니면 '소년 클레이 피전'이 그려낸 우울한 1인극에 우린 더 주목해야 한다. 어쨌거나 이 작품은 부분보다 전체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선 다시 한번 "내가 하고 싶었던 음악은 이런 거였어. 그리고 난 해냈어!"라는 잔나비 리더의 뜨거운 환희, 팬들의 눈물겨운 환호가 함께 들린다. 이 구체적인 열정과 체념의 부조리. 또 그에 따른 깨달음이라는 에너지. 어쩌면 최정훈은 이번 작품으로 "모든 것을 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철학의 영역을 음악으로 들려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창작자의 만족이 반드시 대중의 만족으로 이어지리란 법은 없다. 호와 불호는 이 실험적인 앨범이 감내해야 할 운명으로 당분간 이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비틀스를 뜨겁게 공부한 뒤 만들었다는 데뷔작 'Monkey Hotel'보다 몇 배는 더 진지한 학구열을 쏟아냈을 3집이야말로 잔나비가 쓴 '비틀즈 논문'의 완성이리란 것은 누구나 쉬 짐작할 수 있다. 밴드는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우리 방식으로 밀어붙여 쟁취한 결과물이 더 멋질 것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환상의 나라'로 최정훈과 동료들은 그 말을 에누리 없이 지켰다. 지금 당신이 듣고 있는 이 시대착오적인 사이키델릭 챔버 팝은 그래서 더 "멋질" 수 있었다. 글쎄, 어쩌면 이런 말도 가능하리라. 글로벌 인기라는 비틀스의 하드웨어를 재현한 슈퍼스타가 BTS라면 그 비틀즈의 소프트웨어를 구현한 '그룹사운드'는 잔나비라고.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