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와 애플, 그리고 손정의

머니투데이 김동하 한성대학교 자율교양학부 교수 2021.08.09 15:47
글자크기

[김동하의 컬처 리포트] 재미교포가 쓴 재일교포의 파친코, 애플TV+ 메인 드라마로

▲김동하한성대학교 자율교양학부 교수▲김동하한성대학교 자율교양학부 교수


파친코와 애플, 그리고 손정의. 다소 억지스러운 조합이지만 스토리텔링의 소재로서는 무궁무진한 이름들이다. 이 조합의 의미를 짧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재일교포의 이야기를 다룬 이민진 작가의 소설 ‘파친코’의 드라마 제작이 한창이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미국 기업 애플이 자사 애플TV+에 활용하기 위해 천억원이 넘는 막대한 제작비를 쏟은 글로벌 프로젝트다. 애플의 아이폰을 일본에 들여오면서 소프트뱅크를 급성장시켰던 손정의는 재일교포 3세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에서 파친코 사업을 통해 돈을 벌었고, 그 덕에 손정의는 미국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



여전히 억지스러운 조합이지만, 이 순환에 의미를 부여하자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이야깃거리가 쏟아진다. 소설과 드라마, 기술과 자본, 혈통과 국적이 뒤섞인 복잡한 문화 현상일 뿐 아니라 거대한 자본이 흐르는 경제 현상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가장 비싼 회사 애플과 일본에서 가장 잘나가는 회사 소프트뱅크가 한국 중심의 콘텐츠와 기업에 투자하는 지금. 한국과 미국, 일본의 ‘융합’ 속에서 탄생한 이 조합의 현상들을 조금 길게 풀어보자.

소설 <파친코>와 이민진 작가
<파친코(Pachinko)>는 일본에서 살면서 차별과 갈등을 겪으며 파친코와 같은 위험한 사업으로 삶을 영위해야 했던 한국인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2017년 미국 메이저 엔터테인먼트 기업인 윌리엄모리스-인데버에서 출간했다. 한국에서는 2018년 문학사상에서 번역해 출간했으며 2021년 현재 전 세계 40개 언어로 출판됐다. 출간된 해인 2017년 뉴욕타임스 선정 10대 베스트 북과 USA투데이, 영국 BBC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바 있으며, 버락 오버마 전 대통령이 재직 당시 국민들과 함께하고 싶은 소설 3개 중 하나로 추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재일교포의 삶을 다룬 이 책의 작가 이민진은 재미교포 미국인이다. 68년생으로 7세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한 한국계 1.5세대다. 예일대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작가로 전향했으며, 이 책은 19세부터 준비했다고 한다. 그녀가 미국에서 '이민', '디아스포라'를 주제로 일본에 사는 한국인들의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건 일본계 미국인 남편의 영향도 컸다. 그가 도쿄 금융사에서 근무하면서 4년간 일본에 거주했고, 이 기간의 경험에 장기간의 취재, 고증, 연구를 더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작가는 인터뷰 중 ‘어차피 한국인은 아니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자, ‘Whatever’(그게 뭐 어째서)라고 답한 바 있다. 태어날 때 주어진 한국 이름을 고집하고 있는 그녀가 해외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한인들의 삶을 조명하는 데 국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파친코 소설 ▲파친코 소설
세계에서 가 비싼 기업 애플이 선택한 파친코
한국 GDP(20년 명목기준 1933조)보다 큰 세계에서 가장 비싼 기업(7월 23일 종가 기준 시가총액 2.5조 달러) 애플은 소설 <파친코>를 자사 애플TV+의 주력 콘텐츠로 삼고 드라마 제작을 위해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애플TV+의 외주 제작사인 Media Res가 제작하고 감독은 코고나다와 저스틴 전이 공동으로 맡았다. 코고나다(한국명 박중은)와 저스틴 전(한국명 전지태) 모두 한국계 미국인으로 각각 연출한 <애프터 양>과 <블루 바유>가 올해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나란히 초청됐다.

일본인 각본가의 이름을 변형한 예명의 코고나다 감독은 2017년 한국계 미국인 존 조 주연 영화 <콜롬버스>로 데뷔, 선댄스 영화제에서 주목을 끌었다. 저스틴 전 감독은 영화 <트와일라잇>에도 출연했던 배우 출신 감독이다. <블루 바유>에서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남자의 녹록지 않은 삶을 담으면서 감독과 주연 모두를 직접 맡았다.

드라마 <파친코>의 주연은 한류스타 이민호가 맡았고, 아카데미 영화제 조연상에 빛나는 배우 윤여정도 출연했다. 정웅인, 정은채, 김민하 등의 한국배우와 재미 일본인 배우 안나 사웨이, 소지 아라이, 가호 미나미 등이 참여했다. 언어도 한국어, 일본어, 영어 3개 국어로 제작되는 글로벌 프로젝트다. 미국 현지에서는 8부작 시리즈로 제작되는 이 드라마의 제작비가 1000억원을 훌쩍 넘어설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애플TV+의 한국진출은 드라마 <파친코>가 출시되는 시기에 맞물려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파친코와 애플, 그리고 손정의
33세 귀화한 日 손씨 ‘시조’ 손 마사요시
손정의(孫正義)는 재일교포 3세로 1957년 일본 사가현 토스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손삼헌은 대구 태생으로 본관은 경상북도 안동의 ‘일직’이다. 손정의는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한국인=김치 등의 이유로 따돌림과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고 한다. 야스모토 마사요시(安本正義)라는 일본 이름을 쓰며 괴롭힘을 피해서 살다가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미국으로 향했다.
손정의는 32세까지 재일 한국인 신분이었으며, 33세에 사업적 애로 탓에 일본인으로 귀화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성을 지켰을 뿐 아니라, 손씨를 일본에 최초로 뿌리내렸다. 일본정부는 당시 일본에 없던 ‘손’씨 성을 일본인으로 받아주지 않았고, 이 때문에 그는 부인 오노 마사미를 손씨로 바꿔 일본에 존재하는 성씨로 만든 뒤, 손 마사요시로 귀화했다.

손정의는 10대의 나이에 존경하는 인물 사카모토 료마(坂本 龍馬)의 <료마가 간다>는 책을 읽고 일본을 벗어나 미국에서 최고의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료마는 메이지 유신 시절 대표적인 개혁파로 육군 중심의 일본에서 해군 조직이자 무역회사인 해원대(海援隊)를 만들어 서양식 무기와 사고체계, 교육을 받아들이며 적극적인 교류를 펼쳤다.

소프트뱅크의 로고 역시 해원대의 로고(붉은색)와 색깔만 다를 뿐 동일한 형태. 다만 노란색으로 시작했던 소프트뱅크의 로고는 스티브 잡스와 애플을 만난 뒤에는 애플의 상징인 은색과 흰색으로 바뀌었다. 소프트뱅크가 미국 애플 총판권을 따내기 위해 영국계 통신사 보다폰재팬을 인수한 것도 잘 알려진 사례다. 그는 미국과 미국기업 애플의 교육과, 문물을 일찌감치 받아들이며 일본 최고의 부호로 성장할 수 있었다.

파친코와 소프트뱅크, 쿠팡과 야놀자
이민진 작가는 한국계 1.5세대 미국인이며, 손정의는 한국 성을 계승한 한국 혈통의 일본인이다. 이민진 작가는 공식 인터뷰에서 일본은 99.9% 변하지 않을 거라고 수차례 단언했다. 일본 정부나 기득권층의 태도는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지만, 손정의는 한국과 일본을 잇는 가교 역할만큼은 확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 같다.

손정의의 아버지와 삼촌들은 일본에서 소비자금융, 돼지사육뿐 아니라 파친코 사업을 통해 돈을 벌었다. 소설 <파친코>의 주인공처럼, 향후 애플 드라마에서 연기할 한류스타 이민호의 모습처럼 말이다.

그 덕분에 손정의는 1970년대 중반 이른 시기에 미국유학을 떠날 수 있었고, 일본에 처음으로 한국 일직의 ‘손’씨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손정의가 창업한 소프트뱅크는 비전펀드를 통해 한국에서 사업하는 쿠팡과 야놀자에 5조원이 넘는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어쨌거나 미국과 일본의 최정상 기업인 애플과 소프트뱅크가 한국사람들이 만드는 한국의 콘텐츠와 한국의 기업에 투자하는 문화경제적 현상은 분명 한국의 높아진 위상의 결과다.

‘역사가 우릴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이다.
과연 지금 우리는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다’는 진단에 집중해야 할까. 아니면 ‘그래도 상관없다’는 의지에 집중해야 할까. 광복 76주년 8.15이후의 한일 역사는 어떤 쪽에 무게 중심을 둔 채 씌어져 나갈지 무척 궁금하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8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