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의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수출규제 2년을 앞둔 28일 국내 중소 반도체업체 한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2년 동안 이 분야에서 거둔 적잖은 성과에 대한 뿌듯함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말이다.
2019년 7월 일본이 수출규제 방침을 발표하기 전까지 국내 업체들은 해당 소재를 개발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일본 모리타화학공업, 스텔라케미파 등 업력이 100년에 달하는 불화수소 전문기업들의 노하우를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자기불신이 팽배했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은 "돌아보면 일본의 수출규제가 약이 된 셈"이라며 "좀 더 일찍 국산화와 공급 다변화에 나서지 못한 게 안타까울 정도"라고 말했다.
삼성전자도 이달 초 기체 불화수소와 함께 식각 공정에 쓰이는 고순도 염화수소를 백광산업과 손잡고 개발, 반도체 설비에 적용하는 품질 테스트를 완료했다. 반도체 기판의 불순물을 씻어내는 데 쓰이는 액체 불화수소는 솔브레인과 램테크놀로리지가 대량 생산에 성공,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 (9,930원 ▼120 -1.19%)가 일본산 대신 100% 대체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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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규제품목으로 지정한 품목 중 폴더블 스마트폰 등에 쓰이는 불화 폴리이미드에서도 국산화 성과가 나왔다. 일본의 수출규제 발표 직후 코오롱인더 (34,750원 ▼350 -1.00%)스트리가 경북 구미에 생산 설비를 갖추고 양산에 들어갔다. 코오롱인더스트리는 지난달 불화 폴리이미드 필름을 샤오미 폴더블폰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동진쎄미켐은 올 3월 불화아르곤 포토레지스트 국산화 개발 기록을 남겼다. 최근에는 삼성SDI (401,000원 ▼4,500 -1.11%)가 포토레지스트 개발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업계의 기대가 모였다.
줄줄이 한국행…제꾀에 넘어간 일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해 6월30일 삼성전자의 반도체부문 자회사인 세메스 천안사업장을 방문,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제조장비 생산 공장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제공=삼성전자
세계 최대 포토레지스트 생산업체인 도쿄오카공업(전세계 시장점유율 25%)은 수출규제 조치 이후 인천 송도의 기존 공장에 수십억엔을 추가 투자해 생산능력을 2018년의 2배로 늘렸다. 증설한 설비는 최첨단 반도체 기술인 극자외선(EUV)용 포토레지스트도 생산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내 반도체 제조용 가스 시장의 28%를 점유한 다이킨공업은 충남 당진에 3만4000㎡ 규모의 반도체 제조용 가스 공장을 신설할 계획이다. 공장 건설에는 앞으로 5년간 40억엔이 투입된다. 쇼와덴코머티리얼즈(옛 히타치카세이)도 2023년까지 200억엔을 들여 한국과 대만에서 실리콘웨이퍼 연마제와 배선기판 재료 생산설비를 증설하기로 했다.
일본에서 생산한 제품을 한국에 수출하는 기존 방식을 고수해서는 사업을 원활하게 유지하기 어려워진 일본 업체들이 현지 생산으로 전략을 바꿔 한국기업 붙잡기에 나선 것이다.
대만·일본 밀착 은밀한 견제도 여전…"경계 늦출 때 아냐"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최대 경쟁자인 대만 TSMC가 올 들어 일본 내 연구개발 거점 신설에 나서는 등 일본 반도체 협력사나 소재·장비업체와 밀착하는 것을 두고 경계의 목소리도 나온다.
반도체업계 한 인사는 "일본의 견제가 2년 전처럼 노골적으로 나타나기보다는 우리와 경쟁관계에 있는 기업들과 손을 잡는 방식으로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도 짚어봐야 할 지점"이라며 "소재 부문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뒀지만 장비 부문에서는 여전히 일본의 장악력이 크기 때문에 장기 투자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