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유령전첩비 © 뉴스1
해유령 전투 기념일을 맞아 지난 26일 찾아간 양주시 백석읍 '해유령 전첩비'는 하염없이 쓸쓸했다.
선조는 김명원을 도원수로, 신각을 부원수로 삼아 한강 방어선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도성 방위사령관이었던 김명원의 이탈로 조선군은 왜군이 한강에 당도하기도 전에 와해됐고, 부원수 신각은 한강을 포기하고 유도대장 이양원과 함께 도성 북쪽 양주에 머물며 병사들을 수습했다.
때마침 함경병사 '이혼'이 군사를 이끌고 내려와 합류했고, 양주 장수원(현 의정부) 등에서 왜군과 전투를 치렀던 인천부사 '이시언'도 가세, 비로소 전투 가능한 대오를 편성하고 양주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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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각은 양주에서 파주를 지나 개성과 함흥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해유령에 병력을 매복시켰다.
한양을 점령한 왜군은 정예 선발대를 편성해 양주로 보냈다. 왜군 선발대는 양주 일대를 약탈한 뒤 6월25일(음력 5월16일) 해유령을 지나려 했다.
왜군은 이미 조선 최강 부대로 알려진 신립의 부대를 쉽게 전멸시켰기 때문에 무장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고 술까지 마신 상태였다.
해유령에서 신각은 왜군을 70여명을 몰살했다.
왜란 발생 이후 육지에서 패전을 거듭한 뒤 최초로 이뤄낸 값진 승리였다. 왜군이 올라온다는 소문만으로도 두려움에 떨며 무너지던 조선군이었으나,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 의미 있는 전투였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신각 장군은 비운을 면치 못했다. 어떻게 된 사연일까?
북으로 달아난 뒤 '한강 방어선과 도성이 한꺼번에 무너졌다'는 보고를 들은 선조는 측근 '한응인'을 보내 김명원에게 패전을 질책했다.
김명원은 책임을 신각에게 전가했다. 신각이 자신의 지시를 어기고 무단이탈해 한강 방어선이 무너졌다고 속인 것이다.
이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우의정 유흥의 주도로 신각을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그때 신각은 해유령 전투에서 승리한 뒤 함경도로 진군하는 왜군을 막으려고 방어진을 구축하고 있었다.
'신각을 처형하라'는 어명을 받든 선전관이 출발한 그날 선조에게 신각이 올린 '전승보고서'가 도착했다. 또한 왜군의 수급 70여개도 함께 당도했다.
비로소 사태의 진상을 파악한 선조는 급히 '처형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후발 선전관을 양주로 보냈으나 때는 늦었다.
먼저 보냈던 선전관이 '비겁한 장수 신각의 목을 쳐라'는 어명을 실행했고, 신각은 영문도 모른 채 처형당했다. 1592년 6월28일(음력 5월19일), 해유령 전투에서 승리한 지 3일 뒤의 일이다.
신각 장군의 부인은 남편의 시신을 수습한 뒤 자결했고, 집안에는 신각의 아흔 노모만이 세상에 홀로 남았다고 한다.
신각은 강화와 경상도의 수사를 역임했고 황해도 연안 고을에서 근무할 적에는 성내에 우물을 깊이 파고 각종 무기를 많이 비축해뒀다. 이는 뒷날 이정암이 왜군 3000명을 물리치는 토대가 됐다.
신각과 함께 싸운 함경병사 '이혼'은 신각의 억울한 죽음에 실망해 군사를 물려 함경도로 돌아갔다. 이후 반역자들에 의해 함경도가 왜군의 손에 떨어질 때 이혼은 역도들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
유도대장 이양원은 의주로 피신했던 선조가 다시 요동으로 건너간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탄식하며 8일간 단식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후 조선 육군은 맥을 못 췄고 국토는 왜군들에게 수년간 유린됐다.
1977년 김주현 선생과 양주지역의 뜻 있는 이들이 이 곳에 '해유령 전투'와 신각 장군의 넋을 기려 탑과 비를 세우고 충현사를 지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39호로 지정했다.
게넘이고개로 불리는 해유령(?踰嶺)은 양주시 백석에서 파주시 광탄면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했으며, 먼 옛날 게들이 줄지어 이곳에서 파주로 넘어갔다는 전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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