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버 홈페이지 캡쳐/사진=바버 홈페이지
그동안 국내 시장을 개척하고 브랜드 인지도를 끌어올리느라 자금을 쏟아부은 중소기업 입장에선 한순간에 사업을 접어야 할 위기에 처했지만, 현행 법상으론 구제받기 어렵다. '상가 권리금'처럼 '브랜드 권리금'도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도록 정부와 국회가 법·제도 개선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LF의 CI/사진=LF 홈페이지
지난 10년 동안 엔에이치의 꾸준한 마케팅·유통망 투자, 브랜드 관리에 힘입어 바버는 국내 20대 남성 사이에서 인기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2012년 개봉한 영화 '007 스카이폴'에서 배우 다니엘 크레이그가 입고 나온 '왁스재킷'이 대표적 상품이다. 지난 4월 기준 국내 바버 매장은 전국 27개(백화점 25개, 아울렛 2개)에 달한다. 바버로선 한국이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큰 시장이 됐다.
바버와 엔에이치는 보통 3년 단위로 수입·판매 계약을 맺어왔는데, 2018년 5월 맺은 계약이 만료되는 올해 4월을 앞두고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엔에이치에 따르면 바버는 지난해 합작투자회사 설립을 제안하고, 올해 가을·겨울 상품 주문을 제안하는 등 재계약을 전제로 엔에이치와 연락을 지속했다. 엔에이치는 재계약을 기대하며 인테리어 디자인, 제품 인수, 인력 양성 등에 자금을 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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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버는 엔에이치와의 계약 만료가 불과 이틀 남은 지난 4월28일 재계약 의사가 없음을 통보했다. 바버는 엔에이치 대신 대기업인 LF를 한국 파트너로 정하고 지난달 5일 계약까지 마무리했다. 바버 제품 판매에 매출의 99%를 의존했던 엔에이치로선 한 순간에 사업 기반이 완전히 무너진 셈이다.
엔에이치 관계자는 "중소기업이 모든 것을 바쳐서 하나의 브랜드를 국내에서 키우고 운영했는데 대기업이 거대한 자본력을 기반으로 결실을 가져간 것"이라고 토로했다.
한편 LF 관계자는 "지난해 초부터 국내 이커머스 시장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원하는 바버로부터 국내 브랜드 전개에 대한 요청을 받아왔고, 엔에이치와 국내 판권 계약이 종료될 예정이라는 사실을 확인·통보받아 상호 협의를 거쳐 지난달 국내 판매 계약을 했다"고 밝혔다.
이어 "제3자인 당사로선 엔에이치와 영국 바버 본사 간 갈등이 국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갈등으로 비춰지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한다"고 말했다.
비일비재한 문제...규제할 법이 없다
공정거래위원회/사진=유선일 기자
넥솔브는 공정거래위원회에 핏플랍 영국 본사와 LF를 신고하고, 법원에 독점판매권 등 침해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이후 핏플랍 본사와 LF가 넥솔브의 영업권을 2016년 말까지 연장해주기로 하면서 갈등이 봉합됐다.
패션·뷰티 분야 등에선 이 같은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대기업이 피해자가 되는 사례도 있다. 지미추 등 해외 브랜드 본사가 국내 대기업과의 판권 계약 종료와 함께 국내에 직진출한 경우다. 국내 대기업도 해외 유명 브랜드를 상대론 '을'의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게 패션 업계의 설명이다.
문제는 이를 규제할 법·제도 자체가 없다는 점이다. 누구와 판권 계약을 맺을지, 한국에 직접 진출할 지 등을 결정하는 건 해외 브랜드 본사의 고유 권한이란 점에서다. 다만 이 과정에서 브랜드 가치를 키운 국내 판매업체의 기여분이 전혀 인정받고 보호받지 못한다는 점이 제도상 허점으로 지적된다.
엔에이치 측을 대리하는 신민영 변호사(법무법인 예현)는 "상가 임차인이 가게 영업을 잘해 겨우 돈을 벌 상황이 되니 임대인이 '계약기간이 만료됐다'며 권리금 없이 임차인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똑같은 가게를 열어도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게 불과 몇 년 전"이라며 "여기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법을 고쳐 권리금을 인정받기 시작했듯 해외 브랜드 수입 중소기업과 관련한 문제도 입법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나지원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해외 브랜드를 수입·판매하는 중소기업은 해당 사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계약이 끊길 경우 사업 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며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선 입법적 조치와 함께 행정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