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세 소년이 말했다, "첫사랑 그 애는…"[남기자의 체헐리즘]

머니투데이 남형도 기자 2021.05.2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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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사는 어르신과 함께한 하루…"아프니 많이 외로워, 친구는 TV 밖에 없어요"

편집자주 수습기자 때 휠체어를 타고 서울시내를 다녀 봤습니다. 장애인들 심정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생전 안 보였던, 불편한 세상이 처음 펼쳐졌습니다. 뭐든 직접 해보니 다르더군요. 그래서 체험해 깨닫고 알리는 기획 기사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체헐리즘' 입니다. 제가 만든 말입니다. 체험과 저널리즘(journalism)을 하나로 합쳐 봤습니다. 사서 고생한단 마음으로 현장 곳곳을 몸소 누비겠습니다. 깊숙한 이면의 진실을 알리겠습니다. 소외된 곳에 따뜻한 관심을 불어넣겠습니다.

점심 식사를 준비하는 박인원 할아버지의 뒷모습. 홀로 사는 어르신의 하루를 함께하고 있었다./사진=남형도 기자점심 식사를 준비하는 박인원 할아버지의 뒷모습. 홀로 사는 어르신의 하루를 함께하고 있었다./사진=남형도 기자


80세 소년이 말했다, "첫사랑 그 애는…"[남기자의 체헐리즘]
"마음에 드는 애가 있었어, 중학교 다니는 후배였는데."

박인원 할아버지가 수줍게 말을 꺼냈다. 올해 80세인 그가 들려주는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 얘기라. 귀가 쫑긋, 토끼가 된 마냥 힘이 들어갔다. 입안에 후루룩- 넘어가는 믹스커피가 달짝지근했다.



"걔(후배)도 나 좋아했었는데, 다른 놈(친구)이 방해했어. 그놈은 나만 보면 시기했었거든. 걔하고 잘 지내려고 했더니, 아 글쎄 친구가 다른 남자애를 소개해 준거여. 얼굴도 예쁘고 키도 커서 좋았는데."

아니 그런 나쁜 X이요, 하고 추임새를 넣었다. 연료를 넣으니 할아버지 얘긴 더 불이 붙었다. 너무 속이 상했으나 그걸 또 표현하진 못했다고, 첫사랑과 그 남자애는 사귀다 결국 헤어졌다고. 그리고 첫사랑 소녀는 아버지가 일이 잘 안 돼 동네를 떴고 여태껏 소식도 모른다고. 이젠 궁금하지 않다며 궁금해하는 그는, 머리는 희끗해도 마음만은 영락 없는 소년 같았다.



할아버지와 보내는 하루는 그리 설레었다가, 쓰렸다가, 웃겼다가, 또 애잔했다. 홀로 산 지 벌써 15년이 됐다는 박 할아버지의 삶. 그의 시간이 어떻게 흐르고 있을지 궁금했다.

노년이란 단어가 붙은 통계는 울적한 게 많아서, 걱정됐다. 노인 빈곤율은 45.7%(OECD 평균은 12.6%), 10만 명 중 58.6명은 스스로 생을 저버린다(OECD 3배 이상). 특히 남성 노인은 여성 노인보다 3~4배는 더 많이, 극단적 선택으로 숨진다고 했다(보건복지부 통계).

그래서 홀로 사는 어르신들 하루를 좀 더 깊이 들여다봤으면 했다. 문 바깥에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르니까. 박 할아버지의 집 대문을 열고, 아침부터 찾아와 함께하고 있었다. 어르신 섭외는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 도움을 받았다(감사합니다).


비행기가 자주 뜨고, 냉장고가 가끔 열리는 집
깔끔하게 정돈된 박 할아버지의 방. 그러나 홀로 사는 남성 어르신들의 집이 보통 잘 정돈돼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아, 정리 방법도 알려준다고 했다./사진=남형도 기자깔끔하게 정돈된 박 할아버지의 방. 그러나 홀로 사는 남성 어르신들의 집이 보통 잘 정돈돼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아, 정리 방법도 알려준다고 했다./사진=남형도 기자
'이 분 멋쟁이다.' 20일 오전 수원 서호노인복지관서 만난 박 할아버지의 첫인상이 그랬다.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깔끔한 흰 머리엔 8대 2 가르마를 정확하고 곱게 내었다. 집에 간다 했더니 "누추하다"며 낮추면서도, "멋쟁이세요"란 말엔 "다들 내가 80이라면 깜짝 놀라"라며 으쓱하는 분. "지름길이 있지만, 귀한 분이 왔으니 좋은 길로 가자"는 다정함은 덤이었다.

이사한 지 한 달 됐단 집은 깔끔했다. 전에 살던 집이 비가 줄줄 새서 옮겼단다. 근처가 비행장이라 전투기 소음이 자주 들렸다. 살림도 단출했다. 냉장고가 고장 나 문이 가끔 열린다며 전기세를 걱정했다. 기초생활수급자에 월 50만원으로 살아야 하니 그럴 만도 했다.

방에는 한때는 매일 입었을, 잘 다려진 정장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35년 동안 전선회사에 다녔고, 공장도 운영해봤다. 12시간씩 일하는 게 아무렇지 않았던 때였다고. 그리고 66세에 일을 마쳤다. "그렇게 해서 자식들 다 먹여 살리고 했더니 속썩이고……." '자식 1인'으로서 괜스레 뜨끔해 뒤통수를 매만졌다.

티비 없으면 큰일 나
TV만이 적적한 하루의 유일한 친구다./사진=남형도 기자TV만이 적적한 하루의 유일한 친구다./사진=남형도 기자
일상을 보여달라 했더니 별 것 없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낮은 매트 하나와 이불이 깔려있고, 그 앞에 의자 하나가 있었다. 거기가 그의 고정석이다. 겉옷을 벗고 흰색 반소매 셔츠만 입었다. 왼쪽 가슴팍엔 '미시간 런던(Michigan London)', 그 아래엔 코리아(Korea)라 쓰여 있었다. 세 나라가 티셔츠 하나에 다 있다. 편안한 정겨움이다.

할아버지는 의자에 앉았다. 2년 전, 전립선암 수술을 한 뒤론 앉아 있는 게 편하단다. 이어 리모컨을 들고 TV를 켰다. 익숙한 듯 채널을 돌렸다. 뉴스를 봤다가, 탈북자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틀었다. 그러더니 아직 나오지도 않은 장면을 줄줄 왼다. "다섯 살 때 자기 엄마랑 떨어졌대. 엄마는 남쪽으로 왔다가, 둘이 작년에 만났대."

잠시 뒤 그의 말과 똑같은 내용이 귀신같이 이어졌다. 그 방송은 끝나자마자 똑같은 게 다시 이어졌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맨날 티비하고 살아. 볼 것도 없어. 그런데 티비 없으면 어떻게 살런지도 모르겠어." 그나마 가끔씩 만나던 친구들 마저, 코로나19로 보기 어려워져 더 힘들다고. 그러니 친구는, 감염되지 않고 늘 그 자리에 있는 TV 뿐이었다.

젊었을 땐 재밌었어
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하루 만큼은, TV를 보지 않을 수 있었다고./사진=남형도 기자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하루 만큼은, TV를 보지 않을 수 있었다고./사진=남형도 기자
오늘만큼은, TV 소리는 배경음으로 삼기로. "젊었을 때 인기 많으셨을 것 같아요. 잘생기셔서." 나의 그 말 한마디에, 그의 젊은 시절이 봇물 터지듯 시작됐다.

"총각 땐 맨날 까불고 돌아댕겼어. 밤에 내 방에 가면 동네 여자애들이 있는 거야. 다른 동네 형들이 동네 여자애들 집적거리면 내가 쫓아내고 그랬지. 그럼 나한테 편지가 와. 누가 좋은데, 소개해 달라고. 그럼 어디서 만나라고 시켜. 옛날엔 밀밭 이런 데가 안 보이니까, 거기서 만났어."

짐작도 안 되지만 아스라이 떠오르는 장면들. 쉴 새 없이 쏟아내는 그의 표정만큼은 어쩐지 청춘(靑春)으로 되돌아간 듯 싱그러웠다. 귀엽게 생겨서 누나들이 예뻐했다는 스무 살 박인원. 눈 오는 날 친구 다섯과 닭을 훔쳤다가, 발자국을 따라오는 바람에 딱 걸려서 혼났다는 철부지 어린 시절. 세월이 흘렀다고 그때 마음마저 잊은 게 아녔다.

젊었을 땐 재밌게 잘 살았는데, 나이 먹으니 재미가 없다고. 홀로 우두커니 앉아 '내가 왜 이리 사나' 생각할 때도 있다고. 이야기의 끝은 현재였고 어쩐지 쓸쓸해서, 점심을 먹으며 허기를 달래기로 했다.

일주일 치 냉동 밥과 전자레인지
식사 시간에도 계속 들은 그의 삶 이야기. 덕분에 모처럼 그의 점심 시간이 길어졌으리라./사진=남형도 기자식사 시간에도 계속 들은 그의 삶 이야기. 덕분에 모처럼 그의 점심 시간이 길어졌으리라./사진=남형도 기자
방에서의 가장 좋은 친구가 TV였다면, 부엌에선 전자레인지였다. '두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띠띠띠띠'. 그렇게 전자레인지 소리가 네 번 울려 냉동 밥을 데우고 차가운 밑반찬을 달궜다. 할아버지는 "일주일 치 냉동 밥을 해두고 먹어"라고 했다.

아침은 푸드마켓에서 준다는 빵, 점심은 동사무소에서 한 달에 두 번 전해준다는 밑반찬과 냉동 밥, 저녁은 귀찮으면 또 빵이란다. 홀로 사는 이의 가장 큰 적이 '귀찮음'이라는 걸 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걸 해결하는 건 누군가와 함께 먹는 밥이란 것도.

그런 생각을 하며, 모처럼 분주히 무언가를 더 꺼내려는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봤다. 냉동 밥과 햇반을 반반 섞어 한 그릇이 나왔다. 반찬은 고등어조림, 김, 김치, 메추리알, 호박 동치미, 그리고 미역국과 순두부찌개.

밥은 좀 퍽퍽했어도 우리의 점심시간은 아주 길었다. 그동안 그는 직원들 떼인 월급 받아주려 사장 멱살까지 잡는 용감한 직원이었다가, 위암으로 일찍 떠나보낸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철부지 아들이 되기도 했다. 두 시간이 훌쩍 흘렀다.

파란만장 황금기와 그날의 황금색 방
복지관에서 나눠준 카네이션이, 그의 집 벽에 곱게  걸려 있었다. 누군가의 귀한 아버지, 우리가 그렇듯이./사진=남형도 기자복지관에서 나눠준 카네이션이, 그의 집 벽에 곱게 걸려 있었다. 누군가의 귀한 아버지, 우리가 그렇듯이./사진=남형도 기자
점심을 다 먹은 뒤 다시 TV 앞으로 왔으나, 물에 목을 축여가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는 어느새 알게 됐다. 더는 지겨운 TV를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황금빛으로 빛나던 그의 청춘은, 노년에 같은 빛깔로 좁다란 방에 물들었다.

전화며 인터폰에 들어가는, 가느다란 전선을, 그의 손으로 다 뽑았다. 아무도 못 돌리던 기계를 돌려 질 좋은 전선으로 회사에 돈을 벌게 해줬다. 그 실력 덕에 어디서든 부름을 받았고, 나중엔 공장을 차려 TV 안테나 선도 만들었단다.

그랬던 청년도 나이가 들었다. 나이 듦과 아픔은 친구다. 새벽에 화장실로 향하다 쓰러지고, 아침에 깨고, 기어 나와 마주한 방에는 대변이 엄청나게 많이 있었단다. 119를 불러 병원에 가니 신경과 의사가 그랬다. 대변을 안 봤으면 죽었을 거라고.

골똘히 듣는데, 할아버지가 앉은 그 자리에, 나이든 내가 앉아 있는 듯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남기자의 체헐리즘이란 기획을 했었어. 첫 책이 나왔을 땐 맨날 서점에서 두리번거렸어. 그땐 진짜 힘들었는데, 참 좋기도 했어. 그땐 그랬었어."

스마트폰 알려드리는, 연결의 기쁨
스마트폰 사용법을 알려드리니, 친구 분들과 더 가까이 연결될 수 있었다./사진=남형도 기자스마트폰 사용법을 알려드리니, 친구 분들과 더 가까이 연결될 수 있었다./사진=남형도 기자
대화가 잠시 멎었을 때, 제법 친해진 그가 내게 질문을 했다. 요점은 이랬다. 친구가 동영상이며 좋은 글을 보내주는데, 그걸 다른 이에게도 전달하고 싶단다. 그런데 방법을 모르겠다고 했다.

"영상을 살짝 길게 눌러보세요."

"이렇게?"

"아, 잘하셨는데, '꾸욱' 하는 느낌으로, 조금만 더 길게요."

"이렇게?"

"네, 잘하셨어요!"

"그럼 간 거여?"하는 말과 함께, 그의 친구에게 영상이 전달됐다. 한번 해보시라고 했더니, 알려드린 대로 정말 잘했다. 좋은 걸, 재밌는 걸, 신기한 걸 보면 알려주고 싶은 마음. 그걸로 대화하고 싶은 마음. 그건 나이와 상관없이 다 같은 거였다.

외로움을 잇는 복지로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서 리모델링해서 만든 복지관 내 요리실. 홀로 사는 남성 어르신들은 우울증 등의 유병률이 더 높아 그들만을 위한 공간을 만들었다. 한 학기에 40명씩 듣는데, 다 끝나도 더 듣고 싶다고 할만큼 반응이 좋다./사진=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서 리모델링해서 만든 복지관 내 요리실. 홀로 사는 남성 어르신들은 우울증 등의 유병률이 더 높아 그들만을 위한 공간을 만들었다. 한 학기에 40명씩 듣는데, 다 끝나도 더 듣고 싶다고 할만큼 반응이 좋다./사진=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
제주도도 못 가볼 만큼 평생을 바쁘게 살았던 사람. 다음 팔순 생일에 오랜만에 딸이 손주들 데리고 온다며 툴툴거리는 와중에 설레하는 사람. 그런 할아버지가, 헤어질 무렵 감정에 솔직해져 털어놓은 이야기는 이랬다.

"외로워, 수술한 이후부터 더 그렇네. 몸이 아플 때 특히 그래요."

그러니 서로를 잘 이어 '외로움'을 더는 복지가 필요할 거라고. 좋은 사례는 나오고 있다.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에서 3년 전부터 남성 홀몸노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전국 16곳 복지관 시행). 예컨대, 반찬을 그냥 주기보단 복지관서 요리 교실을 연다. 닭볶음탕, 카레 같은 요리를 배우고, 거기서 친구도 사귀고, 가져가서 먹을 수 있다.

처음엔 쉽지 않았다. 김지양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 책임은 "할아버지들이 신청을 안 해서, 찾아가 끌어내다시피 했다"고 했다. 한 번 해보니 웬걸, 지금은 반응이 너무 좋아 정원을 늘려달라고 성화란다. 계기가 없었던 거다.

어르신들도 다르지 않다고
다음에 소주 한 잔 하러 올게요, 할아버지. 그렇게 약속했다./사진=남형도 기자다음에 소주 한 잔 하러 올게요, 할아버지. 그렇게 약속했다./사진=남형도 기자
나이가 많다고, 홀로 산다고 다르지 않다. 그들도 관계가 필요하고, 그들도 사랑한다.

'삼각관계'도 있다. 박 할아버지가 복지관 헬스장서 뛸 때였다. 갑자기 A 할머니가 다가와 그의 손을 딱 잡았다. 할아버지가 왜 그러냐고 하니 할머니는 "손잡고 하면 안 돼요?"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뿌리쳤다. 그때, 뒤에서 자전거를 타던 B 할머니(박 할아버지가 관심 있는)가 그걸 봤다. B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그 여자 손 잡으니 좋아요?"라고 질투했단다.

그러나 시간은 많지 않다. 박 할아버지가 말했다. "고향 선배한테 연락이 왔는데, 아는 동생이 죽었대. 멀쩡했는데, 치료한다고 검사한다더니 얼마 안 있다 죽었어. 중환자실에서, 말도 못 하고."

그렇게 말하던 그는, 그런 일이 이제는 꽤 익숙한 듯, 참으로 덤덤했다.
80세 소년이 말했다, "첫사랑 그 애는…"[남기자의 체헐리즘]
에필로그(epilogue).

할아버지를 방문한 사회복지사와 할아버지의 대화 한 장면.

할아버지 : "아니 C 복지사가 노인을 40명씩 담당한대잖어. 그래서 내가, 바쁘면 우리 집 오지 말어, 그랬어. 바쁜데 왜 와? 그냥 딴 집이나 다니라고 했어."

복지사 : "오, 그래요? (장난기 발동) 그럼 그 친구한테 여긴 오지 말라고 해야겠다!"

할아버지 : "뭐? 아, 아, 내비둬. 온다는데."

그 순간 여럿의 웃음소리가, 홀로 있기엔 꽤 커 보였던 할아버지 집을 가득 채웠다. 이어 할아버지가 말했다.

"오늘은 이렇게 사람이 많으니까, 살맛 나네."

그게, 그날 들은 얘기 중 가장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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