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에 반기 들면 공격좌표 찍혔다…변질된 '문자폭탄'의 역사

머니투데이 최경민 기자 2021.04.30 06:30
글자크기

[정치 읽어주는 기자]

= 강효상 자유한국당 의원이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한네티즌이 자유한국당 의원들을 초대해 만든 그룹채팅창을 보고 있다. 2017.5.24/뉴스1  = 강효상 자유한국당 의원이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한네티즌이 자유한국당 의원들을 초대해 만든 그룹채팅창을 보고 있다. 2017.5.24/뉴스1


"치열하게 경쟁하다 보면 있을 수 있는 일들이다. 우리 경쟁을 더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2017년 4월 문재인 당시 대선후보는 '문자폭탄'에 대해 이같은 평가를 내렸다. 강성 친문 지지자들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문자폭탄이 일종의 '공인'을 얻은 사건으로 아직도 회자된다.



'문재인 수호'로 시작된 문자폭탄
친문 지지자들의 문자폭탄이 본격적으로 화제가 된 것은 2016년 4월 총선을 앞둔 시점이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의당과 분당으로 위기를 맞았었다. 총선에서 패배할 경우 문 대통령의 정치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분석까지 나오던 시절이다.

문 대통령의 입지가 흔들리자 친문 지지자들은 '문재인 수호'를 내걸고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탈당설이 돌던 국회의원들, 민주당 내 '문재인 리더십'에 반기를 들던 비주류 인사들에게 주로 문자폭탄이 향하기 시작했다.



문자폭탄이 본격적으로 '폭발'한 것은 '김종인 비대위'에 의해 정청래 의원 등 친문 성향 인사들이 줄줄이 컷오프됐을 때다. 박영선 의원과 이철희 현 청와대 정무수석이 정청래 의원 등의 컷오프에 개입했다는 설이 퍼진 후 박 의원과 이 수석은 수백여통의 문자폭탄을 받았던 바 있다.

'문재인 수호'에서 '오직 친문'으로
이후 문자폭탄은 친문 지지자들의 트레이드 마크 격이 됐다. 문자폭탄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힘을 또 발휘했다. 탄핵에 반대하는 국회의원의 번호를 공유하고, 수백·수천 건의 문자폭탄을 보내는 식이었다.

2017년 대선 국면에서 문자폭탄은 보다 극성스러워졌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이재명 현 경기도지사를 지지하는 인사들은 무차별적인 문자폭탄을 받았다. '문재인 수호'에서 '오직 친문'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문자폭탄의 개념이 변한 셈이다.


대선 경선 당시 안 전 지사 측에 있었던 박영선 의원은 '문재인 지킴이 십만대군 모여라'는 이름의 채팅방에서 조직적으로 문자폭탄을 독려하는 사진을 공개하며 "적폐청산 2호는 조직적 악성댓글과 문자폭탄이다. 사회의 영혼을 혼탁하게 하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었다.

文에 반기 들면 공격좌표 찍혔다…변질된 '문자폭탄'의 역사
'오직 친문 수호'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에는 '문재인 수호'와 '오직 친문'의 개념이 섞였다. 문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야당에 대한 공격 수단으로 쓰면서, 동시에 여당 내 친문 위주의 단일대오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문자폭탄이 활용됐다.

정권 출범 후 문재인 정부의 정책이나 인사에 반대하는 야권 인사들은 이 문자폭탄의 희생양이 됐다. 2017년 이낙연 전 국무총리 인사청문회 등의 과정에서 반대 의사를 피력했던 국민의당의 주승용·이언주 전 의원은 1만건이 넘는 문자폭탄을 받기도 했다. 이들은 수년간 유지해온 전화번호까지 바꾸며 문자폭탄을 피하려했다.

여당 내에서는 '조국·추미애 사태'를 거치며 문자폭탄이 그 위력을 발휘했다. 이른바 '조금박해(조응천·금태섭·박용진·김해영)' 등 '조국 수호' 기조에 부정적인 의사를 피력한 여권 인사들은 문자폭탄의 공략 대상이 됐다. 여당 내 친문 단일대오에서 이탈했다는 게 문자폭탄의 이유였다.

재보궐 참패에도 여전한 '양념'
지난 4.7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하자 '오직 친문 수호'와 같은 강경론으로는 내년 대선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시각이 고개를 들었다. 이른바 초선 5인방(오영환·이소영·전용기·장경태·장철민)은 선거의 패배 이유로 '조국 사태'를 꼽는 등의 메시지를 냈다.

'초선의 난'은 친문 지지자들의 집중적인 문자폭탄에 사실상 제압당했다. 일부 강성 친문 지지자들은 '초선 5인방'의 번호를 페이스북에 올리며 문자폭탄을 독려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같은 상황에 직면하자 조응천 의원은 문자폭탄을 보내는 친문 지지층을 향해 "육두문자나 욕설 등의 험한 말로 점철된 문자폭탄을 의원들에게 수시로 보내는 행동에 대해 여론은 별로 호의적이지 않다"며 "문파(문재인 지지자)가 아닌 국민들께도 다가가서 마음을 얻을 수 있도록 좀 놓아달라"고 호소했다.

오영환 의원을 비롯한 더불어민주당 2030 의원들이 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더불어민주당 2030의원 입장문' 발표를 하고 있다./뉴스1 (C) News1 박세연 기자오영환 의원을 비롯한 더불어민주당 2030 의원들이 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더불어민주당 2030의원 입장문' 발표를 하고 있다./뉴스1 (C) News1 박세연 기자
하지만 친문 그룹은 아직도 문자폭탄을 '양념'으로 간주하고 있는 듯 하다.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인 윤건영 의원은 29일 "선출직이라면 그 정도는 감당하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조국 수호'를 외쳤던 김용민 의원은 "적극 권장하고 그 의견들을 충분히 들어야 한다"고 평가했다.

욕설과 과격한 메시지에 위축되는 與
문자폭탄은 결국 문 대통령이 정치적 위기를 맞았을 때 '문재인 수호'를 위해 시작됐다가, 이후 현 야당을 겨냥한 공격도구로 활용됐고, 최근에는 민주당 내 친문 단일대오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정착했다.

조응천 의원이 29일 CBS라디오를 통해 공개한 내용을 보면 △검은 머리 짐승 거두는 게 아니다 △당신이 쓰레기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면 성공 △그쪽 일당들하고 다 같이 탈당하라는 내용의 문자들이 수백·수천통 전달되고 있다. 과거 사례를 보면 온갖 욕설에 성적인 비하까지 담긴 문자들도 폭탄처럼 쏟아진다.

지나치게 과격한 강경 일변도의 메시지는 그 자체로 위협이고, 문제다. 민주당 인사들도 '공천'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의 강경 메시지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는 구조적 문제가 존재한다. 특히 소수 강경 지지층의 목소리에 당 전체가 휘둘린다는 대표성의 문제 역시 발생하는 중이다.

내부 위기감있지만..극복할 수 있을까?
조응천 의원은 "떠나라"는 문자폭탄에 대해 "그러면 편하지만 그게 책임 있는 행동이냐"고 응수하며 "소위 말하는 비주류 혹은 쇄신파, 그게 생겨야지 내년도 대선에 우리가 희망이 생긴다"고 밝혔다. 또 "끙끙 앓으면서 얘기를 나누는 분들, 의원들이 많다"며 "적어도 10명에서 20명 이상은 자기 이름 걸고 할 사람들을 모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뉴스1) 김명섭 기자 =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 도서관에서 열린 '수술실 CCTV 국회는 응답하라!' 토론회에서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대화를 하고 있다. 2019.5.30/뉴스1  (서울=뉴스1) 김명섭 기자 =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 도서관에서 열린 '수술실 CCTV 국회는 응답하라!' 토론회에서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대화를 하고 있다. 2019.5.30/뉴스1
유력 대선 주자인 이재명 경기지사도 문자폭탄에 대해 "과잉 대표되는 측면이 있고 과잉 반응하는 측면이 있다. 눈 감으면 아무것도 없다. (휴대전화 번호를) 1000개쯤 차단하면 (문자가) 안 들어온다고 한다"며 비판적 시각을 보였다.

회의적 목소리도 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28일 유튜브 채널 '시사저널TV'에서 '초선 5인방'이 문자폭탄에 사실상 진압됐던 점을 거론하며 "이견을 가진 사람을 때린다. 그럼 점점 강한 의견만 남아 전체를 대표한다. 당이 완전히 맛이 갔다"며 "여당의 쇄신은 불가능하다. 바뀔 수가 없다"고 밝혔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