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이순신과의 이별[광화문]

머니투데이 배성민 기자 2021.04.21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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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표준영정/사진=문화재청충무공 이순신 표준영정/사진=문화재청


어쩌면 마지막이 될수도 있다. 50년 가까이 충무공의 익숙한 영정을 보면서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4월28일)을 맞는 것이 말이다. 표준영정 1호 충무공 영정은 최근 몇 년 사이 논란이 뜨겁다.

충남 아산시 현충사에 봉안된 이순신 장군 영정은 1953년 장우성 화백이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서술했던 이순신 용모 묘사에 기반해 그렸고 1973년 정부표준영정이 됐다. 문제는 장우성 화백의 친일행각으로 영정 지정해제가 논의되고 있는 것. 영정 지정이 해제되면 공식적인 사용이 어려워지고 100원 주화의 등장 인물 도안도 바뀔 수 있다. 해제가 어려웠던 만큼 새로운 영정 제작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한마디로 익숙했던 이순신 장군의 얼굴과는 이별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해 가을 국정감사에서는 의원들이 '담당 관청(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이 표준영정 지정해제를 요청했는데 왜 교체되지 않고 있냐'고 질의했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문화재청장이 관련 위원회(영정동상심의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지정해제를 검토할 수 있다고 답변했다.

일본의 반도체 등 부품소재 수출제한과 일제 강점기의 위안부. 징용피해자 관련 갈등과 소송이 이어지면서 반일 분위기가 고조된 것에서 영향을 알게 모르게 받은 것도 사실일 터. 올해도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배출 문제 등이 분출하며 한일 갈등은 해결될 조짐이 전혀 없다. 위원회 개최 예산도 편성돼 있다니 관련 결정(지정 해제 여부)이 급작스레 이뤄질 가능성도 있다. 정부로서는 반일은 인기를 회복할 수 있는 손쉬운 소재다. 선거에서 패배하고 정권의 인기가 떨어져가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지금은 구국의 영웅으로 누구나 추앙하지만 이순신 장군을 둘러싼 평가는 정권의 입맛에 따라 조금씩 출렁였다. 이순신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아산 현충사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퇴락해있다가 성역화된 것은 1967년(5월3일 '제6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그해다)이다. 한일 수교 반대 시위(1964년 6.3사태)와 실제 한일국교 정상화가 이뤄진 시기(1965년 6월)와 무관치 않다.

일본의 간담을 서늘케 한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산다)의 충무공 정신을 강조한 결과지만 1970년대가 되면 조금씩 사정이 달라진다. 3선개헌과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서는 박정희 대통령은 '화랑과 신라 임금의 자랑스러운 후손'이라고 치켜세워지고 다시 모셔야 할 대구경북 출신의 천년 만의 임금으로 추앙(이효상 당시 국회의장의 발언)받는다.

공교롭지만 축구 국가대표팀 명칭에서 화랑(1진)이 충무(2진)보다 앞서게 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1950년 이래 훈장의 훈격에서조차 앞서던 충무가 화랑에 뒤진 것이다. 대표적인 화랑 지도자인 원술과 아버지 김유신, 삼국간의 전쟁을 다룬 희곡 '원술랑'이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렸던 시기도 1980년대 전후다.


군부독재는 민주화 시기로 넘어갔고 역사교육에서도 삼국시대를 외세(나당 연합군)를 끌어들여 합쳐낸 통일신라보다 남북국 시대(신라와 발해)가 익숙해졌다. 투박한 충무공은 다시 미소년 화랑보다 전면에 나서게 됐다. 그뒤 이순신은 소설(김훈의 '칼의 노래' 등)로, 드라마(불멸의 이순신)로, 영화(명량) 등으로 끊임없이 컨텐츠의 창조 기반이 됐다. 역사서 뿐 아니라 다양한 책도 쏟아졌음은 물론이다.

다시 이순신 영정 얘기다. 난중일기와 징비록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기사체('종군기자의 시각으로 쓴')로 풀어쓴 책을 낸 조진태 작가는 "표준영정이 바뀐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이순신 장군의 실제 모습을 알 수 없을 것"이라며 "영정이 후세인들과 역사적 공감을 통해 이순신의 삶의 가치에 대한 소통의 창구 역할을 해왔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말했다.

이순신의 시조 한 구절 '달밝은 밤에 혼자 앉은' 수루에 관한 대목이 난중일기에 나온다. 이순신은 수루가 불타자 왜군 포로를 동원해 다시 짓도록 했고 이는 왜선을 수장시킨 승전의 또다른 징표이자 신화로 자리매김했다. 자신의 초상을 둘러싼 논쟁이 사후 420여년 뒤 벌어지고 있다는걸 안다면 '생즉사'의 무게에 짓눌려 큰칼 옆에 찬 그의 깊은 시름에 한 겁의 무게를 더하는 것은 아닐까.

배성민 경제에디터 /사진=임성균 기자 tjdrbs23@배성민 경제에디터 /사진=임성균 기자 tjdrbs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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