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만 피해 보는 것 아니다" 바이든에 반기 든 '슈퍼을'

머니투데이 오문영 기자 2021.04.16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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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만 피해 보는 것 아니다" 바이든에 반기 든 '슈퍼을'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 ASML의 피터 베닝크 최고경영자(CEO)가 "중국에 대한 수출 규제 시도는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며 바이든 행정부의 행보를 비판했다. 미국 중심으로 반도체 생태계를 새로 구축하자는 바이든 정부의 압박을 거부한 첫 사례다. 반도체 업계에 적잖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된다.

16일 블룸버그통신 등에 따르면 베닝크 CEO는 최근 온라인으로 진행된 업계 행사에서 "수출 통제는 경제적 위험을 관리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미국의 수출 규제로 피해를 입는 것은 중국 뿐만이 아니라 강조했다.



베닝크 CEO는 "중국이 자체 반도체 장비와 기술을 구축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수출 규제로) 결국 해외 기업들은 가장 큰 반도체 시장 중 하나(중국)에서 쫓겨날 것"이라며 "많은 일자리와 수익이 사라질 것"이라 우려했다.

미국 사례를 예로 들었다. 베닝크 CEO는 미국 상무부의 추정치를 인용하면서 "미국과 중국 간에 이뤄지고 있는 반도체 산업이 모두 중단되면 미국은 12만5000개의 일자리와 800억~1000억달러 수준의 매출을 잃게될 것"이라 말했다.



반도체 업계의 '슈퍼을'…바이든 압박에도 할 말은 할 수 있는 이유
ASML은 반도체 업계에서 구도상으로는 을에 속하지만 막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이유로 '슈퍼을'로 불린다. 미세공정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독점 공급하고 있어서다.

이들 장비는 반도체 노광공정(반도체 원판인 웨이퍼에 회로를 새기는 작업)에 사용된다. 회로 선폭이 좁을수록 더 작고 효율성 있는 고성능 반도체를 만들수 있는데, ASML의 장비는 기존 장비 193㎚(나노미터)의 14분의 1 수준인 극자외선을 쓰기 때문에 정교한 작업을 가능케 한다.

ASML이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주된 이유는 한 해에 생산 가능한 장비가 30~40대에 그친다는 데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지난해 10월 유럽 출장 중 직접 본사를 방문해 베닝크 CEO를 만나는 등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공을 들인 바 있다.


ASML에게 중국은 대만과 한국에 이어 세번째로 큰 시장이다. 중국 경제매체 차이신에 따르면 ASML의 지난해 노광 장비 매출은 103억유로(약 13조8천억원)로 중국 업체에 대한 매출이 이중 18%를 차지했다. 이는 전년 대비 6%포인트 늘어난 것이다. 대만의 구매 비중은 36%, 한국의 비중은 31%였다.

이 업체는 트럼프 정부 때부터 중국 시장 확대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지난해 미국 정부의 제재 조치 시행으로 중국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업체인 SMIC 등에 대한 반도체 장비·부품 수출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네덜란드 정부는 ASML의 중국 수출 요청을 승인하지 않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12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에서 반도체 공급망 확충을 논의하는 화상회의에 참석해 발언을 하고 있다./사진=뉴스1 /사진=바이든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12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에서 반도체 공급망 확충을 논의하는 화상회의에 참석해 발언을 하고 있다./사진=뉴스1 /사진=바이든
갈수록 치열해지는 미중갈등…패권전쟁 속 '제3의 영역' 생기나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12일(현지시간) 삼성전자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참석한 백악관 반도체 공급망 화상회의에서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 대한 견제 의지를 피력했다. "우리의 경쟁력은 어디에 투자하고 어떻게 투자하느냐에 달려있다"며 참석 기업들에게 미국 내 투자를 직설적으로 강조했다.

화상회의에 참석한 기업들은 잇달아 화답 메세지를 내놓고 있는 상황이다. 팻 겔싱어 인텔 CEO(최고경영자)는 백악관 회의 이후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6~9개월 안에 생산한다는 목표로 차량용 반도체 설계업체와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간 서버용 반도체 등을 주로 제조했던 생산라인을 일부 전환해서라도 차량용 반도체 공급부족 타개를 추진하는 바이든 정부에 화답하겠다는 발표다.

마이크론은 공식 트위터를 통해 감사의 뜻을 표했다. 마이크론은 "백악관 반도체 회의에 참석할 기회를 받아 감사하다"면서 "미국 반도체 공급망의 안정성을 강화하고 마이크론의 인프라를 현대화하기 위해 미국 행정부와 의회, 고객들과 협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글로벌 파운드리도 트위터를 통해 "반도체 공급을 위한 백악관 회의에 참석하게 돼 영광이다"라 언급했다.

ASML의 선언은 업계에 묘한 메세지를 던지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전 세계를 시장으로 보고 영역을 넓혀왔던 기업들에게 미중 패권전쟁은 청전벽력 같은 소식일 수 있다. 시장이 두 축을 중심으로 나뉘는 것이기 때문"이라며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주요 플레이어 중 하나인 ASML을 중심으로 제3의 영역이 형성되는 등 양상이 보다 복잡하게 흘러갈 수 있다"고 예상했다.

삼성도 지난 14일 북미총괄 대외협력 트위터를 통해 바이든 행정부에 감사의 뜻을 일단 전했으나, 내부적으로는 고민이 깊은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전자는 현재 미국 텍사스 오스틴에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을 운영 중인 동시에 중국 산시성 시안의 공장에서도 낸드플래시를 양산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자국 중심의 기조를 강화해나간다면 당장 불똥이 튈 수 있는 구조다. 미국 정부는 현재 블랙리스트로 지정된 일부 중국 업체에 대해서만 장비 수출을 제한하고 있지만, 중국에 있는 업체 전체로 규제가 언제든 확산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SK하이닉스도 장쑤성 우시에 있는 공장에서 D램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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