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 말하지만 여성 임원은 0명…증권가 성평등 "아직 멀었다"

머니투데이 강민수 기자, 정인지 기자 2021.04.12 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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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투업계 유리천장, 이대로 괜찮나①]

편집자주 온 국민이 주식을 하는 시대다. 유례없는 '동학개미운동'으로 금융투자업계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됐다. 그러나 유독 개선이 느린 분야가 있다. 바로 유리천장이다. 여성 주식 투자자들은 대폭 늘었지만, 이들을 위한 여성 롤모델은 부족하다. 금융투자업계의 여성 직원 비율 증가에도 투자전문가로 불릴만한 증권업계 고위 임원은 대부분 남성이다. 금융권의 보수적인 분위기가 주 원인으로 꼽히지만, 국내 금융권은 해외와 비교해도 유독 여성 리더가 부족하다. 머니투데이는 금융투자업계 유리천장의 현주소와 최근 일고 있는 변화의 물결에 대해 조명해본다.

/그래픽=임종철 디자인기자/그래픽=임종철 디자인기자


2015년 11월 캐나다 정부는 역사상 첫 남녀 동수 내각을 구성했다. 내각 구성의 배경을 묻자 "지금은 2015년이니까요"라고 답했던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의 일화는 유명하다.

성평등 정책에 힘입어 트뤼도 총리는 연임에 성공했고 정치권의 변화는 기업문화로까지 영향을 미쳤다. 캐나다 TSX(토론토증권거래소) 상장 기업중 여성 임원이 없는 기업 비율은 2015년 47.09%에서 2020년 18.5%로 대폭 감소했다.



하지만 '2021년의 한국'은 '2015년의 캐나다'에 한참 못 미친다. 이중에서도 유독 더 먼 곳이 있다. 바로 서울 여의도의 금융투자업계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투자를 외치고 금융상품을 내놓지만 업계내 유리천장은 여전하다.



ESG 열풍과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여성 임원'이 화두인 요즘, 증권업계 유리천장의 현주소를 돌아봤다. 특히 많은 기대와 우려가 이는 상장사 여성 이사 의무화 법안이 금투업계의 유리천장을 녹이는 단초를 제공할지 주목된다.

국내 10대 증권사 여성 임원 5%…여성 '직원'은 많은데, '임원'은 없다
'ESG' 말하지만 여성 임원은 0명…증권가 성평등 "아직 멀었다"
11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등록된 각 사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자기자본 상위 10개 증권사의 여성 임원(등기·미등기 포함) 비율은 5.14%다.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삼성증권(10%)으로 전체임원 (30명) 가운데 여성이 3명이다. 신한금융투자(7.69%), 미래에셋증권(6.31%), KB증권(5.56%), 대신증권(5.56%) 등이 뒤를 이었다.


한국투자증권은 임원 48명 가운데 여성이 단 한 명도 없다. 하나금융투자도 여성 임원이 1명에 불과했다. 한국투자증권과 하나금융투자는 비상장사라 내년부터 시행되는 자본시장법 개정안(2조원 이상 상장사 여성 이사 의무화)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 가운데 일부는 사외이사라 내부 승진을 거친 여성 임원 수는 더 적었다.

사외이사를 제외하면 하나금투의 여성 임원은 0명, NH투자증권과 키움증권은 각각 2명, 1명에 그쳤다. 대신증권은 오너인 이어룡 대신금융그룹 회장을 제외하면 여성 임원이 1명이었다.

하나금융투자 관계자는 "사업보고서상 내부 임원은 없지만 현재 부서장급 여성 직원은 14명"이라며 "시대 흐름에 맞춰 앞으로 여성 인재를 더욱 늘려갈 것"이라고 밝혔다.

금융투자업계의 여성 임원 비율은 국내 전체 상장사와 엇비슷한 수준이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지난해 1분기 기준 상장사 2148곳의 여성 임원 수는 196명 늘어 전년 대비 0.5%포인트 늘어난 4.5%(1395명)를 기록했다.

'ESG' 말하지만 여성 임원은 0명…증권가 성평등 "아직 멀었다"
증권업계의 문제는 여성 직원 수는 많은 데 비해 유독 '고위직' 여성이 적다는 점이다. 타 업종과 비교해보면 유리천장의 체감도가 더욱 크다.

국내 상장사 가운데 여성 임원이 적은 기업은 자동차·철강 등 제조업 등이 꼽힌다. 이들 기업은 애초에 여성 직원 수가 적기 때문에 여성 임원도 많지 않다.

대표적으로 POSCO (394,500원 ▲2,000 +0.51%)는 지난해 말 기준 임원 81명(등기·미등기 합산) 가운데 3명만이 여성으로 3.7%에 불과하다. 포스코의 전체 직원(1만7932명) 가운데 여성 직원 수는 926명(5.2%)다.

남초 기업으로 알려진 현대차 (249,500원 ▼500 -0.20%) 역시 임원 478명 가운데 14명(2.9%)이 여성이다. 현대차 직원(7만1504명)의 여성 비율도 5.9%(3999명) 수준이다.

증권업은 여성 직원 수가 상대적으로 많은데도 여성 임원이 적다. 10대 증권사의 여성 직원 비율은 메리츠증권(28.78%)을 제외하고 30~40% 이상이다. 관리·지원 부문에서는 여성 비율이 더 높은 경우도 있다. 여성 직원 비율은 거의 절반에 가깝지만 임원 수는 남초 기업 수준에 불과한 셈이다.

증권업계 첫 여성 CEO(최고경영자)인 박정림 KB증권 사장은 "은행에도 있어 봤지만 은행보다 증권업계의 문화가 더욱 남성적인 것 같다"며 "증권사에서도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유리천장이 더 얇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직무별 여성 임원 편중 현상도…IB는 8%, WM은 40%
'ESG' 말하지만 여성 임원은 0명…증권가 성평등 "아직 멀었다"
직무별 여성 편중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IB(투자은행) 부문에서 특히 여성 비율이 낮다. 여성 임원들은 WM(자산관리) 등 리테일이나 자산운용, 백오피스(경영지원) 등에 주로 배치돼 있다.

10대 증권사 여성 임원을 직무별로 분류해본 결과 IB 부문 임원은 2명으로, 전체(25명)의 8%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 WM 부문 임원은 10명으로 40%에 달했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IB의 업무 상대편인 기업 CEO가 주로 남성이다 보니 남성 직원이 인맥을 만들기 쉽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IB는 크게 IPO(기업공개)를 포함한 주식자본시장(ECM)과 메자닌채권 등을 발행하는 채권자본시장(DCM)으로 나뉜다. 모두 기업과 접촉 활동이 주다. 반면 WM은 고객의 특성과 이에 맞는 상품을 발굴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주식 매니저 역시 IR(기업설명회)나 컨퍼런스콜과 같은 공개된 정보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한 IB 업계 관계자는 "지방에 있는 기업이 IPO를 준비하면 증권사 직원 3~4명이 인근에서 3개월을 상주하기도 한다"며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다 보니 임신, 출산을 병행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그는 "IB는 남녀를 불문하고 경쟁이 치열한 곳"이라며 "기업 임원들에게 '믿을 만한 사람'으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모임 등을 통해 친분을 쌓아야 하는데 성(性)이 다를 경우 시간이 좀더 오래 걸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출산·육아를 병행하는 여성을 차별하는 분위기가 적잖았다. 한 증권업계 여성 임원은 "여성 동료들로부터 경력 면접 때 '자녀가 몇 명인지, 자녀를 봐주는 사람은 누구인지, 둘째 계획이 있는지' 등 질문을 받았다는 경험을 종종 전해 들었다"며 "그런 질문을 듣는 것 자체가 부담으로 다가오고 위축될 수밖에 없지 않나"고 전했다.

변화하는 금투업계…자본시장법·워라밸 트렌드에 여성 임원 는다
여의도 증권가 /사진=머니위크여의도 증권가 /사진=머니위크
이러한 금융투자업계에도 최근 들어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ESG 열풍과 내년부터 적용되는 자본시장법 등에 따라 여성 이사 선임이 늘어나면서다.

자본시장법 개정안에 따르면 내년 8월부터 자산 2조원 이상의 상장 법인 이사회는 특정 성(性)으로만 구성하는 것이 금지된다. 개정안이 불러올 변화를 두고 기대와 우려가 공존한다.

이미현 한국거래소 코스닥시장본부 상장부장은 "강제적으로 시행한다는 점이 거부감을 줄 수는 있지만 방향은 맞다고 생각한다"며 "여성들의 경영 참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져야 하는데 아직도 특이한 일인 것처럼 얘기되는 것이 보편화가 안 됐다는 의미"라고 밝혔다.

다만 기계적인 숫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임원의 역량과 전문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원선 트러스톤자산운용 전무는 "오랜 경험을 통한 경험적 사고를 갖고 있지 못한 사람이 (단순히 제도 때문에) 자리에 간다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며 "결국 이로 인해 그 조직의 사기가 떨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또 MZ세대(밀레니얼 세대+Z세대, 15~39세)의 등장으로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중시되면서 업계 분위기도 바뀌고 있다. 코로나19(COVID-19)로 인한 재택 활성화도 업무 부담을 줄이는 데 한몫했다.

이 전무는 "회사가 주 52시간제를 채택하다 보니 확실히 야근에 대한 압박이 줄어든 것 같다"며 "코로나로 인해 대면 미팅을 컨퍼런스 콜로 대체했는데,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점에서 훨씬 효율적이라는 평이 많아 코로나 이후에도 유지할 듯싶다"고 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육아와 업무를 병행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형성되는 추세다. 통상 보수적으로 여겨지는 금융위원회도 지난해 육아휴직자 23명 가운데 10명이 남성으로 나타났다.

이상은 유안타증권 경영전략본부장은 "회사 차원에서 난임 유급 휴가 3일 지급 등 제도적으로 출산 여성을 배려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고,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남성 직원도 생기고 있다"며 "사회적으로 뒷받침하는 여건이 개선되는 만큼 적어도 10년 이내에 여성 임원은 많이 늘어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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