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세계로 넘어가는 현실세계의 비싼 것들

머니투데이 김동하 한성대학교 자율교양학부 교수 2021.04.06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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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하의 컬처 리포트]선거, 명품, 공연, 작품 등… 열거주의 한계 우려도

▲김동하한성대학교 자율교양학부 교수▲김동하한성대학교 자율교양학부 교수


새 학기가 시작된 봄. 선거 레이스가 한창이다. 대학생과 청년들을 향한 여야 후보의 선거운동을 보면서 문득 지난 미국 대선 캠프의 한 선거운동 모습이 떠올랐다. 닌텐도의 가상공간 게임 ‘모여봐요 동물의 숲’에 조 바이든과 카멜라 해리스의 아바타가 등장했던 장면. 미국 민주당은 동물의 숲을 위해 마이디자인 4종을 제공했는데, 게이머들은 QR코드를 스캔하면 집 앞에 민주당 선거 팻말을 세울 수도 있었고, 선거 복장도 다운받아 아바타에 입힐 수 있었다.

민주주의가 주류인 세상 속 인류가 벌이는 가장 현실적이고 강력한 행위 중 하나인 선거. 그것도 가장 큰 권력으로 꼽히는 미국 대통령 선거운동이 가상현실에서 펼쳐지는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현실 인물이 현실 선거를 위해 가상세계에 아바타를 직접 만들고, 가상세계에서 선거운동을 하는 현실을 말이다.



미국식 ‘네거티브’(금지행위가 아니면 모두 허용하는 것) 규제가 아니라 ‘포지티브’(허용되는 것을 나열하고 그 외 금지하는 것), 즉 열거주의 규제를 하는 한국에서 이런 선거운동이 공식적으로 일어났다면, 선거관리위원회는 어떤 해석을 내릴까. 비단 게임이나 인터넷 속 이야기가 아니다. 선거, 명품, 공연, 작품 등 현실세계의 비싸고 귀한 일들이 가상세계 속에서 새로운 생태계로 확장되고 있다. 현실세계의 귀한 돈, 현금(現金)을 포함해서 말이다.

가상세계로 넘어가는 현실세계의 이벤트들
LG전자는 최근 자사의 OLED TV 마케팅 수단으로 ‘동물의 숲’을 선택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2020년 최고의 발명품’으로 나란히 꼽은 이 두 발명품이 결합한 건 이른바 MZ(1980년대 이후 출생한 밀레니얼세대와 1990년대 중반부터 출생한 Z세대) 세대 고객을 잡기 위해서다. 마침 군 복부 중 휴가를 나온 조카(2000년생 MZ세대)에게 물었더니, 친구들 대부분이 동물의 숲 게임을 알고 직접 하는 사람도 많다고 했다. 미국 대선 캠프에서 동물의 숲 세상으로 뛰어든 건 단기뿐 아니라 중장기적으로도 전략적인 셈이다.



▲1 닌텐도 게임 동물의 숲 속 조 바이든의 선거캠프 2 LG전자 OLED TV+동물의 숲 이벤트▲1 닌텐도 게임 동물의 숲 속 조 바이든의 선거캠프 2 LG전자 OLED TV+동물의 숲 이벤트
메타버스(초월+세계)로도 불리는 요즘의 가상세계와 기존 게임, 인터넷 세상의 가장 큰 차이점은 현실세계와의 연결고리다. 현실세계에서 가상세계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세계 속에서 새롭고 완전한 생태계를 만드는 것. 마치 2009년 영화 <아바타>의 주인공처럼, 아바타가 되어 현실세계에서 사람들과 만나는 증강된 현실(AR)이 아니라, 아바타들이 사는 완전한 가상현실(VR)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가상세계 속 사업으로 뛰어드는 기업들 역시 현실세계의 가장 ‘비싼’ 기업들이다. 게임은 물론이고, 명품, 의류, 공연, IT 등 거대 기업들이 대표적. 미국의 구글, MS, 페이스북 등 빅테크 기업과 일본 닌텐도, 한국의 네이버, 엔씨소프트 등은 가상세계 플랫폼을, 구찌와 루이비통, 나이키, MLB 등 거대 소비재 기업들은 가상세계 속 판매와 마케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넷플릭스 창업자 리드 헤이스팅스는 2019년 “최대 경쟁자는 디즈니가 아니라 포트나이트”라고 언급해 화제가 된 바 있다. 포트나이트는 사명이 아니라 에픽게임즈가 만든 유명 전투게임의 이름이며, 싸우지 않고 모여서 노는 또 다른 가상세계 ‘파티로얄’을 게임 속에서 운영하고 있다. BTS가 한국 최초 빌보드 차트 1위곡 ‘다이너마이트’의 뮤직비디오 안무를 최초로 선보인 곳도 바로 이 ‘파티로얄’이었다.


지난해 말 네이버 손자회사가 운영하는 가상세계 ‘제페토’에서 걸그룹 블랙핑크의 팬사인회를 열었는데, 전 세계에서 무려 5000만에 가까운 아바타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한국의 오프라인 공간에서 모여 팬사인회를 열었다면, 최대 3만 명 정도 모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가상세계로 넘어가는 현실세계의 소비
코로나19 위기가 기회로 작용한 걸까. 가상세계 속 공연이 마케팅을 위한 ‘쇼케이스’를 넘어, 실제 돈을 버는 공연으로 확장되고 있는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미국의 유명 래퍼 트래비스 스캇이 지난해 포트나이트 속에서 아바타로 펼친 유료 공연에는 전세계 1230명이 동시접속해 20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고 한다.

빅히트, YG, JYP 등 K팝 메이저 기업들이 제페토 운영사 네이버 제트에 170억원을 투자한 건 가상세계 공연으로 이어지는 포석이다. 제페토의 이용자는 전 세계 2억 명(2월 기준)으로 ‘한국 어른들만 모르는 주류’라 비유될 정도로 젊고 글로벌한 가상세계를 운영하고 있다. 해외 이용자가 90%, 80%는 10대 이용자라고 하는데, 구찌와 나이키, MLB 등 글로벌 기업들이 가상공간에서만 쓸 수 있는 컬렉션을 전시 및 판매까지 하고 있다. 빅히트엔터테인먼트가 우리(we)의 유니버스인 ‘위버스’(weverse)라는 플랫폼을 연 데 이어, 엔씨소프트는 ‘유니버스’라는 이름의 K팝 전용 가상세계 플랫폼을 열어 여러 아티스트를 끌어들이고 있다.

현실세계의 비싸고 귀한 작품들도 ‘가상’의 기술을 통해 거래되며 현실의 소비를 끌어들이고 있다. 미국 NBA는 하이라이트 영상들을 ‘NFT(Non Fungible Token: 대체불가능 토큰)’라는 가상자산 기술을 통해 판매하고 있는데, 르브론 제임스의 덩크 슛 영상은 가장 비싼 2억3500만원에 팔렸다고 한다. 최근에는 미국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 부인의 디지털 그림이 NFT 기술을 통해 65억원에 거래됐다고 한다. 안방 금고나 PC 한구석에 담아뒀던 ‘하나밖에 없는 비싸고 귀한 것’들이 가상의 세계 속에서 보관되고 거래되는 건, 기술이 만들어낸 새로운 현상인 건 분명하다.

가상세계로 넘어가는 현실세계의 돈
현금(現金)은 말 그대로 현실세계의 돈이다. 금은 현실세계의 자산이자 가장 귀한 금속이다. ‘디지털 골드’라 불리는 비트코인이, ‘가상자산’(virtual asset)이라는 글로벌 공식명칭으로 쓰이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디지털 세계, 가상의 세계에서만 쓰이는 돈 또는 자산이라면 그러려니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이 시세가 현실세계에서 넘어가는 현금을 통해서 이뤄진다는 데 있다. 비트코인의 상승세는, 현금을 찍어내는 과정에서 현금에 의해 이뤄진 자산 인플레이션인일 수도 있고, 현금을 찍어내는 과정에 저항하는 현금 자체의 반작용일 수도 있다.
▲1 포트나이트 속에서 공개된 BTS 뮤직비디오 캡처 2 가상세계 지구 플랫폼 Earth2▲1 포트나이트 속에서 공개된 BTS 뮤직비디오 캡처 2 가상세계 지구 플랫폼 Earth2
real estate로 불리는 부동산은 언제까지 현실(real)에 머물러 있을 수 있을까. 이미 지구를 가상세계에 복제한 플랫폼 Earth2.io에서는 가상 부동산(virtual estate) 투자 또는 투기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부동산 투기 하면 세계 일류인 한국의 가상 땅에서도 물론 투기는 시작됐다고 한다.

현실세계의 비싸고 귀한 이벤트, 작품, 밈(meme)이라 불리는 콘텐츠들은 물론이고 현금과 부동산까지 가상세계로 확장되고 있다. 그 중심에는 현실세계의 가장 비싼 기업들이 앞장서고 있다. 해묵은 얘기지만 한국의 현실 법제와 규제는 언제까지 포지티브식 ‘열거주의’로 이런 현상들을 어르고 달래며 발맞춰갈 수 있을까. 판타지의 자유, 가상세계에서 표현의 자유 등을 현실세계의 공공이 다스릴 입장은 되는 걸까. 적어도 현실에서 확장된 가상현실 세계 속에서, 네거티브 규제 도입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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