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에서 만난 정의선[광화문]

머니투데이 진상현 산업1부장 2021.04.02 0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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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특파원 시절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을 세 차례 취재할 기회가 있었다. 정 회장을 처음 만난 건 2017년 11월 '현대 모터스튜디오 베이징' 개관식 때다. 이어 이듬해 4월 베이징 모터쇼, 같은 해 6월 '제1회 한중 기업인 및 전직 정부고위인사 대화'에서도 정 회장을 볼 수 있었다. 부회장 신분이었지만 정 회장이 이미 그룹 경영 전반을 챙기고 있을 때였다.



재계 총수가 짧은 기간 같은 국가를 이렇게 자주 방문하는 것 자체가 흔치 않은 일이다. 중국 시장에 대한 정 회장의 관심이 어느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현대차는 위기 상황이었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이슈가 불거진 이후 현대차의 중국내 판매가 급전직하했다. 중국은 현대차 전체 매출의 5분의 1 가량을 차지하는 주력 시장 중 하나다.

위기 상황과 별개로 현장에서 본 정 회장의 인상은 차분하고 학구적이었다. 베이징 모터쇼에선 현대차와 기아차 전시장 외에도 곳곳을 돌며 다양한 자동차들을 살폈다. 중국 토종 브랜드 자동차들과 BMW, 폭스바겐, 스코다 등 글로벌 브랜드 부스들을 빼놓치 않고 들렀다. 특히 BMW의 'BMW i 비전 다이내믹스', 하발의 '웨이 X' 등 미래 기술들을 담은 콘셉트카에 관심을 보였다. 정 회장은 부스를 돌다가 큰누나인 정성이 이노션 고문을 만나기도 했다. 환하게 웃으며 밝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영락없는 '현실 남매'였다. 한 눈에 봐도 '사이 좋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새삼 베이징 때 일을 떠올린 건 항공 모빌리티, 수소 경제, 전기차 등 현대차의 혁신을 주도하는 정 회장의 최근 리더십을 보면서다. 당시의 탐구하고 화합하던 정 회장의 모습이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2018년 9월 수석부회장에 오르며 현대차의 변화를 끌어내기 시작한 정 회장은 지난해 1월 세계 최대 가전·IT 전시회 CES 2020에서 직접 기조 연설자로 나섰다. 정 회장은 연설에서 도심항공모빌리티(UAM)을 중심으로 한 미래 모빌리티 비전을 제시했다. 이 연설은 미래 혁신기업으로서의 현대차의 이미지를 단번에 각인시켰다. 모빌리티 산업에 대한 오랜 탐구와 통찰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현대차가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던 수소차 분야도 결실을 맺고 있다. 포스코, SK 등 다른 그룹과의 '수소 동맹'을 끌어내면서 친환경 에너지인 수소의 생산, 유통, 활용으로 이어지는 '수소 생태계'가 먼 미래가 아님을 입증해 보이고 있다. 내연기관의 시대가 가고, 전기차와 수소전지차 등 미래차와 UAM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모빌리티 시대의 주역으로 현대차를 끌어올린 것이다. '흉기차'라는 오명 속에 생존을 걱정하던 현대차는 사라졌다.


주가도 수직 상승했다. 코로나19 영향으로 지난해 3월 초 6만5000원까지 떨어졌던 주가는 약 1년 만인 지난 31일 현재 235% 오른 21만8000원을 기록했다. 실적도 올해 본격 회복기에 들어설 것이라는 전망이다. 격전지가 된 전기차 시장에서도 현대차의 '아이오닉5', 기아의 'EV6' 등 전용플랫폼을 통해 생산된 전기차들이 호평을 받고 있다.

재계가 더 주목하는 것은 정 회장의 화합적 리더십이다. 한국 기업간의 '수소 동맹'을 주도하고 있고, 전기차 코나EV 자발적 리콜 비용에 대한 합의도 조기에 이뤄냈다. 국토교통부가 LG에너지솔루션이 제작한 배터리를 코나EV 화재의 원인이라고 사실상 인정하는 상황에서도 현대차가 30%의 비용 분담에 동의한데는 정 회장의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 회장은 협상 과정에서 절대로 두 그룹이 다투는 모양새가 돼선 안된다고 강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룹 경영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3명의 누나들과도 별다른 잡음이 없는 정 회장 특유의 화합적 리더십이 빛을 발한 사례다.

혁신기업들으로서 현대차의 부상이 우리 경제에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전후방 기업들에 자동차 만큼 큰 영향을 미치는 산업은 없다. 각종 첨단기술과 콘텐츠,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집결지가 될 자율주행자동차와 항공 모빌리티 등 미래자동차 산업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또한가지는 정주영, 이건희 등 창업 1,2세대들을 잇는 영향력 있는 기업인의 등장이다. "새 천년에도 나와 같은 기업인이 또 나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야 한국경제가 우뚝 선다" 얼마전 타계 20주년이었던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2000년1월1일 머니투데이에 기고한 칼럼에 쓴 내용이다. '할아버지' 정주영의 호언장담을 손자 '정의선'이 못해내란 법도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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