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과 밀착 알제리, 삼성물산 찾아 "88올림픽 참가를"?

머니투데이 김지훈 기자 2021.03.29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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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잠금해제] 외무부는 "선경(SK 전신) 요청사항 알제리 정부와 협의해라" 지시도

외교부의 기밀 해제 문건. 외교부의 기밀 해제 문건.


"삼성파리지사장은 1986년 1월4일 동사(삼성물산 파리지사) 알제리 관계 중개인(마르크 갈레)을 대동하고 당관(주 프랑스 대사관)을 방문하였는 바, …알제리는 88 서울 올림픽 참가를 검토하고 있는 바…"

1986년 1월 미수교국(1990년 수교)이었던 알제리가 돌연 삼성물산 파리지사를 통해 88 서울 올림픽 참여를 타진했던 정황이 드러나 눈길을 끈다. 외교부가 외교문건 심의를 거쳐 기밀 기간(30년)을 해제·공개한 보고서(국교수립-알제리, 1990.1.15. 전 11권)에 포함된 내용이다. 이를 비롯해 냉전 체제의 붕괴가 임박했던 무렵 오늘날도 굴지의 대기업으로 명맥을 잇고 있는 기업들의 이름이 비밀 외교문서들에 등장했다.



알제리 대통령 비서실장의 서한, 프랑스인 중개인 통해 알려져
우선 '기밀의', '비공식적', '정식 확인이 곤란' 등 신중한 표현이 잇따라 실린 '대 알제리 경제진출' 문건을 보면 삼성물산은 알제리 정부의 의중을 우리 정부에 전달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주프랑스대사가 작성해 외무부(현 외교부)와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에 발신한 문건에 따르면 삼성물산 파리지사는 대(對) 알제리 접촉과 관련한 관계를 맺어왔던 프랑스인 마르크 갈레로부터 "알제리 대통령 비서실장의 서한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달 받았다.

이 알제리 관계 중개인은 알제리측이 88 서울 올림픽 참가를 검토하고 있는 것과 함께 △알제리 실업단의 방한 및 주요 한국기업인 현대 대우 삼성 등과 상담 △현대 포니 자동차의 알제리 수입 등에 대한 추진을 원한다고 밝혔다. 삼성물산 파리지사장은 알제리측 의중을 알리고자 마르크 갈레와 대동해 주프랑스대사관을 방문했다.



외교부의 기밀 해제 문건. 외교부의 기밀 해제 문건.
우리 정부는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우선 주프랑스대사는 중개인 발언의 진위를 두고 정식 확인이 곤란한 상황이라는 점 등을 거론하며 신중한 태도를 보인 보고서를 작성해 본국에 보냈다.

1986년 2월 외무부 중동국이 '대 알제리 관계 개선 방안' 검토서라는 제목으로 비밀 문건을 작성했던 것을 감안하면 '알제리 대통령 비서실장 서한'은 우리 정부의 관심을 끈 것 만은 분명하다. 중동국은 당시 "알제리 정책의 중대한 대아국(우리나라에 대한) 정책 변화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그 추이가 주목된다"는 평가와 함께 "(마르크 갈레 또는 제 3의 알제리 고위 인사가) 알제리 대통령 비서실장의 명의를 도용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고 적었다. 알제리 정부의 외교 노선 변화 가능성을 미리 감지한 인사들이 권력 최상층과 연이 있는 것처럼 가장했을 수도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알제리는 서울 올림픽 참가국에 전격적으로 이름을 올렸다. 중개인이 진짜 알제리 대통령 비서실장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는진 알 수 없지만 알제리가 한국과 관계 개선에 관심이 있었던 것 만큼은 진짜였던 것이다. 더욱이 그 뒤인 1990년이 되면 한국 정부와 알제리는 상대국에 각각 대사관을 설치하며 정식 수교까지 맺었다. 그 전엔 국내 기업들이 알음알음 현지에 진출했지만 정식 수교는 맺어지지 않던 상태였다. 남북 가운데 북한과 먼저 수교(1963년)를 시작한 국가로 북한과 긴밀한 협력 관계였다.


국무총리 출신 삼성물산 회장, 헝가리 대통령과 비공식 만찬
기밀 해제된 문건에는 고 아르파드 괸츠 당시 헝가리 대통령이 1990년 11월 방한했을 때는 국무총리 출신인 고 신현확 당시 삼성물산 회장이 비공식 만찬 일정을 잡았다는 내용도 실려있다.

노태우 정부가 1989년 동유럽 국가 중 첫번째로 헝가리와 수교를 맺기 위해 1억2500만달러의 은행차관을 제공키로 한 뒤 민간 기업도 헝가리와 관계 맺기에 나섰던 것이다.

미국과 함께 냉전 구도의 양대축이었던 소련(현 러시아) 측에서 우리 기업과 협력에 관심을 보였던 정황도 존재한다. 1988년 소련 상공회의소와 레닌그라드 상공회의소측이 한국과 상호 무역대표부 또는 사무소 설치를 위해 럭키금성(LG의 전신)에 중간자 입장에서 영향력을 발휘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는 기록도 기밀에서 해제됐다. 한국이 소련과 정식으로 수교하기 2년 전 있었던 일이다.

외교부는 기업들의 해외 진출 시 민원 창구 역할도 했다. 선경(SK의 전신)은 1984년 11월 22일 알제리 해운공사에서 발주한 곡물 운반선 6척의 수출추진을 지원해 줄 것을 외무부에 요청했다. 외무부는 선경 측의 요청사항을 알제리 정부와 협의할 것을 주프랑스대사관에 지시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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