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전 '흑역사' 안은 공정위, 대한항공-아시아나 조건부 승인?

머니투데이 세종=유선일 기자 2021.03.26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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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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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공항=뉴시스]이영환 기자 = 인천국제공항 전망대에서 바라본 계류장에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여객기가 보이고 있다. 2021.01.05. 20hwan@newsis.com [인천공항=뉴시스]이영환 기자 = 인천국제공항 전망대에서 바라본 계류장에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여객기가 보이고 있다. 2021.01.05. [email protected]


“현대자동차의 기아자동차(현재의 기아) 인수를 사실상 별다른 조건 없이 승인한 것은 정말 잘못된 결정이었다.” (공정거래위원회 퇴직자)

1999년 3월 공정위는 현대차의 기아 인수를 승인했다. 조건으론 ‘3년간 트럭 가격 인상률 제한’만 내걸었다. 자동차 시장의 독과점을 심화시킬 우려가 있지만 ‘산업합리화’와 ‘국제경쟁력 강화’의 효과가 더 크다는 명분이었다.



부실화된 기아를 인수하면서 현대차는 당시 국내 승용차 시장의 55.6%를 거머쥐었다. 버스시장 점유율은 74.2%, 트럭은 무려 94.6%에 달했다.

이때 만들어진 현대차그룹의 독점적 지위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당시 결정을 공정위 전현직 간부들이 ‘공정위 40년 역사의 오점(汚點)’ 또는 ‘돌이킬 수 없는 원죄(原罪)’라고 부르는 이유다.



22년 전 일을 거론하는 건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때문이다. 과거 현대차와 기아의 사례와 많이 닮았다. △기간사업 분야에서 △1위 기업이 경영난을 겪는 2위 기업을 인수하려 하는데 △인수 작업을 정부가 사실상 주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기업 간 M&A(인수·합병)는 공정위가 기업결합심사를 거쳐 승인을 내릴 때만 가능하다. 공정위가 칼자루를 쥐었다는 뜻이다. 권한에는 책임이 따른다. 부담감이 클 수 밖에 없다. 22년 전 현대차의 기아 인수를 승인할 걸 두고 지금까지 후회하고 입장에선 더욱 그렇다.

공정위가 최근 홈페이지에 게재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보고서 번역·요약본은 공정위의 이런 고민을 방증한다. OECD가 지난해 발간한 ‘코로나19 관련 경쟁정책 대응방향 권고’ 보고서는 ‘구제합병’을 깐깐하게 살펴고 신중하게 승인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구제합병은 기업결합으로 독과점이 형성되더라도, 피인수 기업이 ‘회생불가’ 상태라면 경쟁당국이 예외적으로 승인하는 것을 말한다. 현대차-기아 사례가 대표적인 구제합병이다. OECD는 구제합병에 대해 “철저한 증거조사를 통과한 경우에만 수용해 장기적으로 높은 비용을 지불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했다.

공정위가 지난해 나온 국제기구의 보고서를 굳이 번역해 소개한 건 어떤 의미일까.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불허하거나 승인하더라도 강력한 조건을 내걸 경우 '명분'으로 활용하기 위함이 아닐까.

시장은 공정위가 결국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통합을 승인할 공산이 크다고 본다. 거부할 경우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터다. 다만 승인과 함께 조건을 걸 가능성이 높다. ‘독과점이 생기는 여객·화물 노선의 매각' 또는 ‘일정 기간 요금 인상 제한' 등이 선택지가 될 수 있다.

공정위는 "신속하고 면밀하게 심사하겠다"는 것 외엔 어떤 방향도, 계획도 밝히지 않은 상태다. 아시아나항공이 공정위에게 제2의 원죄, 또 다른 오점으로 남지 않길 누구도 원치 않는다. 그렇다고 인수를 무산시키는 것도 국가경제에 부담이 크다. 22년 전 현대차-기아의 '흑역사'를 털어낼 대한민국 경쟁당국의 현명한 결정을 기대한다.

22년전 '흑역사' 안은 공정위, 대한항공-아시아나 조건부 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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