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정신은 '자유'다...실패를 딛고 일어선 거목

머니투데이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2021.03.18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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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정주영 박물관 초기화면/사진제공=아산정주영닷컴아산 정주영 박물관 초기화면/사진제공=아산정주영닷컴


오는 21일 타계 20주기를 맞는 아산 정주영의 '기업가 정신'을 묻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봐 해봤어?"라는 도전정신을 말한다.

해보지도 않고 실패를 두려워 하는 이들에 경각심을 주는 그의 이런 발언은 그의 인생 전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또 요즘 세대들은 그의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그 때와 시대가 다를 뿐더러 우리도 해볼 건 다 해봤는데, 안된다"는 하소연을 쏟아낸다.

오랫 동안 아산을 연구해온 '정주영 전문가'들은 그의 정신을 "이봐! 해봤어?"라는 공격적 질문에 담기보다는 "그래 안되면 또 하면 되지 뭐!"라는 긍정적 사고에 뒀다. 아산은 먹을 것이 없어 배를 골을 때도 한번도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낙천적 인물이다.



신용을 지키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
1915년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산골 빈농인 정봉식-한성실의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가진 것 없는 인생에서 잃을 것 또한 없다는 여유로운 생각의 소유자였다.

이런 성격을 기반으로 무엇인가 해보고 실패하면 다시 도전해 성공을 맛보는 경험을 많이 했다. 실패 후에도 일어설 수 있는 밑바탕에는 낙천적인 그의 성격과 더불어 그의 손자인 정의선 현대자동차 회장이 말한 것처럼 '신용'이 자리잡고 있었다.

실패에서 배웠고 자유로운 사고로 뚜벅뚜벅 자신의 길을 성실히 걸어가면서 실패가 그를 무릎 꿇린 게 아니라, 실패는 그를 성공으로 이끄는 길잡이이자, 자양분이 됐다.


정주영학을 가르친 김해룡 울산대 경영학부 교수는 "정주영의 정신은 자신을 둘러싼 여러 어려운 환경을 '제약'이 아닌 '기회'로 받아들이는 '자유정신'이다"고 정의했다.

김 교수는 "현대건설이 중동에 진출할 때나, 아무 것도 없는 현대가 울산에 조선소를 지을 때나 모두가 자신이 가진 고정관념과 습성이라는 제약에 갇혀 안된다고 할 때 아산은 이를 기회로 받아들이는 자유로운 사고를 한 인물이다"고 평가했다. 가능성이나 용기라고도 표현되는 그의 자유의지가 오늘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년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라는 것.

"중동에서는 낮에 더워 일을 못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낮에 더우면 밤에 일하면 되고, 조선소를 지을 기술과 돈이 없으면 빌려오면 되고"라는 식이 정주영식 자유사고다. 새로운 것을 보면 제약이 무엇인지를 고민하지 말고, 자유롭게 해석하는 것이 정주영의 기업가 정신이라는 것.

김 교수는 "나를 얽매는 것들이 왜 얽매는지를 보고, 복잡한 계산이 없는 실행하는 것이 곧 자유이고 정주영의 사고다"고 말했다.

제약에 갇히지 말고 자유를 확대해서 보면 가능성이 보이고, 그 가능성이 보이면 용기를 내서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정주영의 가르침이라는 것.

복흥상회 주인 아주머니와 함께(1934년). 아산은 19세에 쌀소매상인 복흥상회에 취업해 장사하는 방법을 배우며 사업가의 꿈을 키웠다. /사진제공=아산정주영닷컴복흥상회 주인 아주머니와 함께(1934년). 아산은 19세에 쌀소매상인 복흥상회에 취업해 장사하는 방법을 배우며 사업가의 꿈을 키웠다. /사진제공=아산정주영닷컴
실패는 정주영을 키운 자양분
아산은 자신의 성공은 실패에서 왔다고 단언한다. 그의 실패는 가출에서 시작됐다.

그는 1930년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농삿일을 하라는 소작농인 부친의 뜻을 거스르고 신문 소설 '이광수의 흙'에서 본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가출했다가 인천부둣가에서 한번, 소 판 돈으로 서울의 부기학원에서 한번 아버지에 덜미를 잡히는 실패를 경험한다.

이에 굴하지 않고 세번째 가출 후 1934년 취직한 쌀가게 복흥상회에서의 신용과 성실함으로 부친이 10마지기 논에서 1년 소작해 얻는 쌀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가출과 검거(?)의 쳇바퀴는 끝이 났다.

그는 복흥상회 주인으로부터 가계를 인수해 1938년 경일상회를 개업해 서울상업학교(당시 경성여자 상업학교), 배재여학교 기숙사에 쌀을 대며 첫 사업의 승승가도를 달리는 듯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2차 대전이 발발하고, 쌀의 유통이 통제돼 개인이 사업을 할 수 없게 되면서 첫 사업실패의 쓴 맛을 본다.

잠시 고향 강원도로 내려가 부인 변중석 여사와 결혼한 이듬해인 1940년 현대그룹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자동차 정비업체 아도서비스를 설립하지만 이도 오래 가진 못했다.

쌀집을 하면서 인연을 맺은 삼창정미소 오윤근씨로부터 3000원을 빌려 북아현동 고개에 있던 업체를 인수해 시작한 아도서비스는 한달여만에 화재가 발생해 수리 중이던 자동차 4대를 포함해 공장이 전소되면서 그의 사업 두번째 위기를 맞았다.

이 때도 그를 일으킨 것은 '신용'이었다. 다시 오윤근씨로부터 3500원을 더 빌려 신설동 공터에 아도서비스를 다시 시작해 과거 부채까지 모두 갚고 성공하는 듯했으나, 2차 대전이 격화되면서 전쟁물자 총동원령이 내려져 쇠붙이하는 공장은 모두 문을 강제로 닫도록 해 세번째 실패를 경험한다.

자동차 수리 인연으로 만난 일본인이 운영하는 황해도 홀동광산에서 자동차로 광석을 나르던 일을 하다가 광산소장과의 갈등으로 사업을 접은 것이 1945년 8월 해방되기 3개월 전이었다. 그는 훗날 더 사업을 했더라면 동생들과 시베리아로 끌려갔을 것이라고 소회하기도 했다.

당시 광산소장에게 물류사업을 넘기는 대가로 받은 하청계약 보증금 3만원과 하청계약금 2만원 등 총 5만원이 그가 1946년 중구 초동 106번지에 미 군정 적산 200평을 불하받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는 기반이 됐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시절 미군 사령부와의 건설계약 장면/사진제공=아산정주영닷컴한국전쟁 당시 피난시절 미군 사령부와의 건설계약 장면/사진제공=아산정주영닷컴
+건설업의 투신...현대 그룹 태동
자동차 수리업을 하던 그가 변신을 시도한 것은 관청을 드나들면서 느낀 자동차 수리업자와 건설업자들의 수주 규모의 격차 때문이었다.

정 회장은 방송강연 등에서 "관공서에 수금을 들어가면 우리에게는 30~40만원을 주는데, 건설업자는 몇천만원씩 받아가는 것을 보고 더 큰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해 1947년 현대토건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못하고 6.25 한국전쟁이 벌어지면서 시련을 겪었다.

시련을 기회로 바꾼 것은 부산 피난 시절 정 회장의 동생인 정인영 동아일보 기자가 미군 사령부 통역관으로 들어가면서다. 그 인연으로 미군 10만명 숙소공사와 유엔군 묘지 단장 사업, 아이젠하워 대통령 숙소 건설 등으로 이름을 알리게 됐다. 당시 한겨울 잔디가 모두 말라 없어진 유엔 묘지에 보리를 심어 푸른 묘지의 풍경을 연출한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하지만 전쟁 중 벌었던 돈은 전후 복구사업 중 하나였던 고령교 복구사업의 실패로 한순간에 날아갔다. 1953년 4월 대구와 거창을 잇는 고령교 공사 과정에서 1년새 100배나 뛰어오른 초고 인플레이션과 부족한 장비로 지연된 건설 공기로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었다.

이 공사의 계약금액이 5478만환이었는데, 적자는 6500만환으로 살고 있던 집까지 팔아 9970만환을 막아 겨우 부도를 넘겼다. 이 빚으로 오랫동안 고생했던 아산은 건설업에서의 우수장비의 필요성과 정부 수주에 의존하는 국내 건설산업의 한계를 실감하게 된다.

4.19 후에 모든 건설업자들이 부정축재자로 몰리면서 아산은 정경유착의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해외로 나갔고, 이는 현대건설의 전환점이 됐다. 1966년 태국의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도로공사, 알레스카 산속의 교량과 주택, 파푸아뉴기니아 지하수력발전소, 베트남 매콩강 준설과 군사기지, 호주의 항만 준설공사 등은 그 시절 주요 사업들이다

호주에선 현지인과의 갈등으로 준설선 노동자들이 모두 호주에서 쫓겨나고 많은 손해를 보고 철수하는 실패를 경험했으나, 곧바로 중동 건설이 터지면서 크게 성장했다. 국내에선 1968년 건설에 들어간 경부고속도로는 1966년 태국 고속도로를 건설해본 해외경험을 가진 현대건설에 맡겨졌고, 2년 6개월이라는 사상 최단 기간의 완공 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정주영공법의 물막이 공사/사진제공=아산정주영닷컴정주영공법의 물막이 공사/사진제공=아산정주영닷컴
배도 '건설'이라는 생각...첫 포기경험을 안긴 조선소
아산은 건설업의 경험으로 '배를 만드는 것도 집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정 회장은 "배 만드는 것은 설계대로 철판을 용접하면 되고, 큰 30만톤 배는 엔진에 4만~5만 마력 발전소를 넣어서 움직이는 거다. 종합건설회사가 그 분야에 조금만 교육을 시키면 만들기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자서전에 썼다.

특히 풍속이나 습관도 다른 곳에 나가 건설하느라 고생하는 것보다 국내에 조선소를 지어서 해외서 배를 주문받아서 내보내는 게 더 편할 것이라는 생각도 한 몫했다.

하지만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아산의 첫 포기도 이 때였다.

"해봤어?"라고 말하는 그도 당시 조선소 건설을 권유했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해보니 안되더라"며 포기선언을 한 적이 있다. 박 대통령이 조선소를 현대가 지으라며 맡겼을 때다.

대통령의 요구에 미국과 일본의 관련기업과 정부를 찾아가 기술이전과 차관을 요청했지만, 모두 퇴짜를 맞았다. 다시 박 대통령을 찾아가서 "조선소는 못하겠다"라고 했더니 박 대통령이 더 강력하게 밀어붙여 다시 시도해 영국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 이후 이야기는 우리들이 아는 내용이다.

조선소 건립을 위한 차관 도입 당시, 상환 능력과 잠재력에 의문을 표하던 영국 애플도어사의 롱바톰 회장 앞에 아산이 꺼내 놓은 500원짜리 지폐. 아산은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가리키며 “한국은 이미 16세기에 철갑선을 만들었다. 19세기에 들어와서야 철선을 만들기 시작한 영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사진제공=아산정주영닷컴조선소 건립을 위한 차관 도입 당시, 상환 능력과 잠재력에 의문을 표하던 영국 애플도어사의 롱바톰 회장 앞에 아산이 꺼내 놓은 500원짜리 지폐. 아산은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가리키며 “한국은 이미 16세기에 철갑선을 만들었다. 19세기에 들어와서야 철선을 만들기 시작한 영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사진제공=아산정주영닷컴
울산 앞바다를 보여주는 5만분의 1 축척의 백사장 지도 한장과 거북선이 그려져 있는 500원짜리 지폐, 그리고 조선소도 없는 기업이 배를 만들어주겠다며 수주한 26만톤짜리 두척(수주금액 14억원)으로 한국의 조선산업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만들어낸 결과다.

전세계 건설 역사에 남을 30만톤급 유조선 4척이 동시에 바다 한 가운데 접안할 수 있는 9억 3000만달러 규모의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공사도 아산의 창의력이 돋보이는 공사다.

10층 빌딩 크기와 맞먹는 자켓을 포함한 모든 기자재를 울산에서 만들어 바다를 통해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운송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무려 1만 2000km의 거리를 19번에 걸쳐 안전하게 기자재를 운송해내 ‘무모한 도전’이라 비웃었던 세계인들을 놀라게 했다.

서산간척 사업 과정에서 마지막 물막이 공사에서 폐유조선을 가라앉혀 유속이 가장 빠른 곳을 막는 '정주영 공법'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 낸 것도 '자유'로운 사고의 결과다.

정 회장은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긍정적인 생각이다. 모든 것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가로서의 활동 외에 대한체육회 회장으로서 88서울올림픽을 유치하고, 그 이후 기업가로서 세상을 제대로 변화시키고자 국민당을 설립해 대통령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 어릴 때 소판 돈으로 서울에 상경했던 빚을 갚기 위해 소 1000마리를 끌고 남북경협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한강 기적 속에 기적은 없다

1982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을 당시 아산 정주영 회장. 뒷모습의 이병철 삼성 창업주도 보인다./사진제공=아산정주영닷컴1982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을 당시 아산 정주영 회장. 뒷모습의 이병철 삼성 창업주도 보인다./사진제공=아산정주영닷컴
그는 기적은 없다고 말한다.

"한강의 기적 속에 기적은 없다. 다만 성실하고 지혜로운 노동이 있을 뿐이다. 나는 이 땅에 태어나서 한 사람의 기업인이자 성실한 노동자로서 이 나라의 비약적 발전에 한몫을 다한 것에 대해 무한한 긍지를 가지고 있다."'(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나의 살아온 이야기 정주영 중에서)

그는 1990년 11월 '한강의 기적'을 지켜세우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인 고르바초프와의 만남에서도 "기적은 종교에나 있는 것이지, 경제에 기적은 없다. 오직 피와 땀이 있을 뿐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 회장은 "나 자신을 그저 꽤 부유한 노동자로 생각한다. 나 자신이 노동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나의 일생은 이들과 함께 한 세월이다"고 자부하기도 했다.

그런 그는 "(매일매일) 소학교 소풍가듯 기쁨에 흥분하듯이 그렇게 살아 내가 불행하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 본적이 없다. 미래를 향한 희망에 차 있었기 때문"이라고 얘기하곤 했다. 인생의 고달픔에 고민하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청년 정주영이 던지는 메시지다.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공사 현장/사진제공=아산정주영닷컴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공사 현장/사진제공=아산정주영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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