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구조와 훼방꾼들[우보세]

머니투데이 김지산 기자 2021.03.0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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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는 세상]

편집자주 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2009년 10월 미국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서 8년간 최고경영자(CEO)로 자리를 지켰던 케네스 루이스가 갑작스레 사퇴했다. BoA는 그 뒤로 3개월간 CEO가 없이 지냈다. 차기 CEO 선임이 2개월 이상 이뤄지지 않으면 ‘사고’로 여기던 풍토에서 BoA의 행보는 위험천만 했다.



징후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그 해 4월 BoA 연례 주주총회에 주주들은 메릴린치 인수 과정에서 불투명한 의사결정과 정보 공개 책임을 물었다. 표결을 거쳐 CEO와 회장직을 분리, 루이스를 회장 자리에서 내쫓았다. 그러나 루이스 측근들이 장악한 이사회는 루이스에게 CEO 자리를 맡겨 주주들의 반발을 샀다.

루이스 사퇴 후 4개월 뒤인 2010년 2월, 뉴욕 검찰은 메릴린치 부실을 제대로 공개하지 않은 채 인수를 감행했다며 증권사기 혐의로 그를 기소했다. 종합해보면 BoA는 지배구조로 인한 문제가 이미 예고된 상황에서 리스크 해소를 위해 별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BoA는 뒤늦게 JP모간 이사회가 연 1회 승계계획을 검토하거나 AIG가 매년 승계계획을 수립하도록 의무화한 것을 참조해 매년 CEO가 이사회에 승계 계획을 제출하도록 강제했다.



10여 년 전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요즘 돌아가는 것을 보면 남의 얘기가 아니다. 지배구조 리스크에서 국내 금융사들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승계의 핵심은 ‘예측 가능성’인데 한국은 난데 없는 돌출 인사가 많았다.

상당수는 외부 변수와 관계가 있다. 외국인이 주요주주일 뿐 지배적 주주가 없는 상황에서 금융그룹 회장, 은행장 자리는 정권과 기존의 내부 경영진 사이의 ‘쟁탈’ 대상이 되기 일쑤였다.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이런 일이 생겼다. 참여정부는 2004년 윤병철 우리금융지주 초대 회장과 이덕훈 우리은행장 갈등을 빌미로 2004년 황영기 전 삼성증권 사장을 지주 회장 겸 행장으로 앉혔다. 황 회장 임기가 끝나자 공직자 출신 박병원씨가 다음 회장으로 뽑혔다. 이명박 정부 시절엔 이 전 대통령 측근으로 분류되던 어윤대 고려대 총장이 2010년 KB금융 회장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윤석헌 원장이 이끄는 금감원은 의도한 것인지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으나 사모펀드의 부실 책임을 물어 금융그룹 지배구조를 예측불가능한 수준으로 뒤흔들었다. 후계자군을 모조리 법률 리스크에 노출시켰다. 김정태 하나금융 회장은 1년 임기의 4연임에 나섰다. 진옥동 신한은행장이 중징계가 예고되면서 신한금융의 후계구도도 불투명해졌다. 손태승 우리금융 회장은 초유의 연속 중징계를 눈앞에 뒀다. 금감원발 금융지주회사 개편론이 공공연히 거론될 정도다.


금융회사 입장에서 정권과 금융당국의 자발적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요행수를 노리는 것이다. 외부에서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운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계승하려는 노력을 하는 게 더 현실적이다. 차기 회장 최종 후보군을 반기 단위로 관리하는 내/외부 후보들로 제한하거나 회장 임기 만료 최소 2개월 전 경영승계를 개시하는 KB금융, 2년간 CEO 육성 프로그램을 운영한 끝에 임성훈 대구은행장을 선임한 DGB금융이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물론 ‘외부인 접근 금지’ 관행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누가 봐도 될만한 사람이라면 모셔와야 한다. 그래야 그들만의 잔치 소리를 듣지 않고 외부에서 시비를 걸 여지가 생기지 않는다. 출신이 어디든 수긍할만한 후보군과 수정하기 어려운 일정 내에서 인선이 이뤄져야 한다. 그러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시로 경영권 승계에 끼어들려고 시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정립한 시스템을 무너뜨리려는 무리수가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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