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은 차량용 반도체 공급부족 사태를 눈덩이로 키운 '3재(災)'로 크게 수요예측 실패, G2(미국·중국) 갈등, 이상기후를 '꼽는다. 특히 코로나19 사태와 맞물린 수요예측 실패는 최근 사태를 낳은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된다.
안기현 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부품업체의 주문이 줄자 반도체 제조업체도 차량용 생산량을 축소했는데 백신 개발과 초저금리 정책을 발판으로 차량 수요가 늘면서 반도체 부족 사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고 말했다.
반도체 제조업계가 줄어든 차량용 반도체 수요 대신 노트북, 스마트폰 등 코로나19 사태로 늘어난 비대면 수요에 맞춰 생산품목을 조정했는데 자동차 수요가 예상보다 빠르게 회복되면서 수급 불균형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지난해 자동차 시장 수요는 당초 20%가량 줄어들 것으로 전망됐지만 실제로는 13% 감소한 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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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설 나서도 생산까지 최소 수개월
생산품목을 조정한 뒤 수율을 끌어올리는데도 적잖은 시간이 걸린다. 반도체 제조사에서는 이 기간만큼 매출 손실 등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수시로 생산품목을 조정하기가 어렵다.
업계 관계자는 "공급부족 사태로 차량용 제품 가격이 10~20% 오른다고 해서 다시 차량용 라인을 확대 가동했다가 수요가 줄어 가격이 떨어지면 낭패를 볼 수 있다"며 "수익성 측면에서도 이미 수요가 충분한 스마트폰용 반도체가 더 나은 상황에서 생산품목을 바꾸는 것은 모험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공급부족 사태가 올 하반기까지 지속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트럼프 나비효과…"반도체 없이 車 못 만들어"
임종철 디자이너 / 사진=임종철 디자이너
또다른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SMIC의 수요를 가장 많이 떠안은 세계 최대 파운드리업체 대만 TSMC가 모바일·서버용 반도체에 생산여력을 집중하면서 완성차업체들이 각국 정부까지 동원해 차량용 반도체 생산을 요청해도 촘촘히 짜인 연간 생산계획을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전했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과 교수는 "요즘 차량 1대에 평균 200~300개의 반도체가 들어간다"며 "자동차 생산원가에서 반도체 원가 비중은 2% 정도에 그치지만 엔진 컨트롤이나 디스플레이의 정보 표시처럼 차량 내 전자시스템의 역할이 핵심 기능으로 자리잡은 상황에서 반도체가 없으면 차를 만들 수 없다"고 말했다.
◇美폭설·日지진 여파…재가동까지 3개월 걸릴 수도
지난 13일에는 일본 후쿠시마현에서 규모 7.3의 지진이 발생해 차량용 반도체 시장 3위 업체인 일본 르네사스일렉트로닉스의 주력 생산기지 이바라키공장이 가동 중단됐다. 전문가들은 르네사스 공장 재가동까지 적어도 한두달이 걸릴 것으로 본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가동을 멈춘 르네사스 나카공장은 재가동까지 3개월이 걸렸다.
시장조사업체 옴니아는 최근 차량용 반도체 부족으로 올 1분기에만 전세계 자동차 생산량이 당초 예상보다 100만대가량 줄어들 것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심재현 기자
철강·타이어도 '車 반도체 공급쇼크'…도미노 셧다운 재현되나
21일 자동차업계에 따르면 국내 완성차업체 중에선 미국 GM 본사와 글로벌 부품 공급망을 공유하고 있는 한국GM이 반도체 쇼크의 첫 희생양이 됐다. 지난 8일부터 인천 부평2공장의 가동률을 50% 수준으로 낮춰 운영 중이다.
앞서 GM도 미국 캔자스주 페어팩스와 캐나다 온타리오주 잉거솔, 멕시코 산루이스 포토시 등에서 셧다운(가동중지)에 들어갔다. 감산 규모는 1만대 수준이다.
한국GM 부평2공장의 경우 소형 SUV(다목적스포츠차량) 트랙스와 중형 세단 말리부를 생산하고 있어 관련 부품사들의 어려움도 가중되고 있다.
한국GM 관계자는 "장기화될수록 협력사들이 버티기 어렵기 때문에 반도체 수급 상황을 면밀히 살피면서 부품사들과 소통을 강화하고 있다"며 "한국자동차산업협회(KAMA) 등을 통해 정부에 현 상황을 전달하고 대응책 마련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행정부가 반도체 부품대란을 겪고 있는 GM 등 자국 완성차업계를 지원하기 위해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해외 주재 미국 대사관들이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업체) TSMC 본사가 있는 대만 등 반도체를 생산하는 주요 해외 국가와 기업들이 공급 부족 문제를 해결토록 주문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GM 인천 부평공장/사진=(인천=뉴스1) 정진욱 기자
실제로 2~3개월 정도의 재고 확보로 당장은 문제가 없는 현대차 (252,500원 ▲3,000 +1.20%)·기아도 차량용 반도체 공급난이 장기화되면 버티기가 쉽지 않을 것을 보고 있다. 특히 유동성 위기와 경영난으로 생존경영에 돌입한 쌍용차 (6,020원 ▼70 -1.15%)나 르노삼성차 입장에선 치명타가 될 수 있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판매 부진으로 생산량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반도체 공급 부족이 현실화할 경우 부품사들의 도미노 셧다운은 예정된 수순인 셈이다. 부품업계에선 지난해 중국산 '와이어링 하니스(배선뭉치)' 공급 부족 사태로 줄줄이 공장 문을 닫았던 악몽이 되살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전후방 산업인 철강·타이어업계도 마찬가지다.
한 타이어업체 관계자는 "아직 큰 영향이 없는 상황"이라면서도 "수급 상황이 호전되길 바라면서 혹시 닥칠 위기에 대비해 철저히 국내외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전했다.
철강업계 관계자도 "자동차 생산이 지연되면 강판을 납품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면서 "사태 장기화로 전체 누적 생산량이 감소하면 전후방 산업도 타격이 커지고 자동차 가격도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석환 기자
車반도체 대란에도 삼성 구원등판 거리두기, 왜
삼성전자는 세계 각 국과 기업에서 쏟아지는 러브콜에도 아직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다. 업계에서는 수익성과 기회비용을 감안했을 때 삼성이 단독으로 투자를 진행하기보다는 인수합병(M&A)이나 협력체계 구축을 통해 기회를 만들 것이라 본다.
21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차랑용 반도체는 AI(인공지능)나 스마트폰용 반도체에 비해 제조·품질관리가 훨씬 까다로운 반면 수익률은 적어 사업성이 떨어진다. 전체 반도체 시장의 10% 정도로 그 규모도 작다. 운영 중인 생산라인의 품목을 바꾸기도 어렵다. 제품 양산까지 걸리는 기간을 포함한 비용 손실이 적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최근 품귀 현상이 빚어진 차량용 반도체를 자율주행차 같은 미래차에 대한 투자와 연결짓기도 어렵다. AI와 5G를 바탕으로 운행되는 자율주행차에는 일반 자동차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정보 처리 능력이 요구된다. 요즘 차량에 탑재되는 반도체와는 성능에서 차이가 크다.
시장에서 삼성전자가 단독으로 차량용 반도체 시장에 뛰어들기보다는 M&A나 협력체계를 구축할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도 이 대목에서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실적 콘퍼런스콜(전화회의)에서 "2023년까지 전략적 M&A를 진행하겠다"고 선언했다. 삼성전자의 현금 보유액은 지난해 말 기준 104조원으로 국내외 시설 투자금을 제외해도 M&A에 투입할 여력이 충분하다.
후보로 언급되는 업체는 글로벌 자동차 반도체 시장의 주요 플레이어인 네덜란드 NXP, 독일 인피니언,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 스위스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등이다. NXP는 그동안 M&A 대상으로 여러차례 언급됐다. 2018년 퀄컴이 440억달러(49조9000억원 상당)에 인수하려다 무산됐을 당시 NXP가 삼성전자에도 협상 의사를 타진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NXP는 BMW·포드·도요타 등 주요 완성차 제조사들을 고객사로 보유하고 있다.
다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부재로 당장 빅딜 결단이 나오기는 쉽지 않다는 관측도 나온다. M&A에 '2023년'이라는 데드라인을 제시한 것도 이 부회장의 수감 기간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다.
오문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