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정창현 머니투데이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장 = 고려 수도였던 개경(개성)은 '불교도시'였다. 문헌에 이름이 전하는 사찰만 300개가량 된다. 이 사찰들은 개경 중심부를 시작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형태로 창건됐다. 특히 개경 중심부에 세워진 봉은사, 흥국사 등은 주요 국가차원의 불교행사를 주관했을 뿐만 아니라 궁궐과 관청 기능을 대행하기도 했다.
또한 일제강점기 이후 진행된 도시개발과 6·25전쟁 등으로 여러 사찰이 사라지고, 현재 그나마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사찰은 대흥산성 안의 관음사(觀音寺)와 대흥사(大興寺), 송악산 남쪽 기슭의 안화사(安和寺) 정도다. 이외에 오관산에는 남북 공동으로 복원한 영통사(靈通寺)가 있다.
개성 대흥산성의 북쪽 성곽 모습.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박연폭포와 관음사·대흥사를 품고 있는 대흥산성(大興山城, 국보유적 제126호)은 개성시내에서 북쪽으로 16㎞정도 떨어져 있다. 천마산성이라고도 불리는 이 산성은 개성 북쪽 대흥산의 산성골을 감싸며 서쪽의 천마산, 동쪽의 성거산 등의 험준한 산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은 석성이다. 천마산을 연결한 서쪽 구간은 험한 절벽을 성벽으로 그대로 이용했고 능선과 평평한 구간에는 돌로 성벽을 쌓았다.
개성 대흥산성의 북문, 남문, 동문, 서소문의 모습. 남문은 보수되기 전의 모습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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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대흥산성의 북문과 바깥쪽 계단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개성 대흥산성 북문과 문루 측면 모습.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18세기 사대부 화가였던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이 그린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속의 박연폭포 그림. 오른쪽 아래에 범사정, 위쪽에 북문의 문루가 묘사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1.02.20.© 뉴스1
박연(朴淵)에서 내려다본 박연폭포. 박연폭포는 우리나라 3대 폭포의 하나로 꼽힌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고모담 동쪽 언덕에는 폭포의 절경을 감상하기 좋은 범사정(泛斯亭, 보존유적 제524호)이 세워져 있다. 이 정자에 올라 폭포를 바라보면 폭포가 쏟아지는 것이 마치 뗏목이 급류를 타고 흘러내려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개성 박연폭포와 범사정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개성 박연폭포와 관음사·대흥사 안내도.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대흥산성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개성 관음사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개성 관음사 입구 바위 위에 세워져 있는 관음사사적비.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경내에는 현재 대웅전, 승방, 칠층석탑, 관음굴 등이 남아 있다. 승방 중앙에 난 문으로 들어가면, 마당 안쪽에 대웅전(국보유적 제125호)이 있고, 서쪽에 7층석탑, 북서쪽에 관음굴이 있다. 대웅전은 장대석을 쌓아올린 높은 기단 위에 있으며, 정면 3칸(8.4m), 측면 3칸(6.61m)의 겹처마를 댄 우진각지붕집이다. 대웅전 안에는 아미타불 좌상,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입상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7층석탑은 높이가 약 4.5m로, 고려 때 조성됐다.
개성 관음사 대웅전과 7층석탑.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개성 관음사 대웅전 안 불상과 천장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하얀 대리석으로 조성된 관음보살상은 원래 한 쌍인데, 하나는 왼손 팔꿈치를 무릎 위에 세우고 오른손을 무릎 위에 드리우고 있고, 다른 하나는 두 손을 다 무릎 위에 드리우고 있다. 현재 전자는 관음굴에 그대로 있는 보존돼 있고, 후자는 1992년 개성 고려박물관으로 옮겼다가 1995년 다시 평양 조선중앙역사박물관으로 이관했다.
개성 관음사의 관음굴과 굴 안에 보존돼 있는 관음보살상.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개성 대흥사 전경. 지난해 대웅전 등의 전각을 복원하기 전의 모습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18세기 사대부 화가였던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이 그린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속의 대흥사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1.02.20.© 뉴스1
영통사(국보유적 192호)는 1027년(고려 현종 18) 창건된 사찰로, 16세기 무렵 화재로 소실된 것을 2005년 북의 조선민족경제협력위원회와 대한불교천태종이 함께 복원했다.
개성 대흥산성 남문. 2018년 북한은 남문과 주변 성곽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남문에서 북문 사이 약 3km 관광길을 확장, 포장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개성 오관산 기슭에 있는 영통사 전경. 2005년에 남북 공동불사로 복원됐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개성 영통사 입구에 서 있는 대국국사비. 천태종을 개창하기까지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행적이 기록돼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이외에도 영통사에는 국보유적 제133호로 지정딘 오층석탑(국보유적 133호), 보존유적 제541호와 제542호로 지정된 동·서 삼층석탑, 당간지주 등이 남아 있다.
개성 영통사 오층석탑과 3층석탑 전경. 위는 영통사터에 세워져 있을 때의 모습이고, 아래는 영통사 복원 후 경내로 옮겨진 후의 모습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안화사에는 무량수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양화각, 숭화각이 있었고, 능인전, 승법당, 미타전, 왕이 머물던 제궁(齊宮) 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고려의 유학자 이인로(李仁老)는 안화사의 화려함에 대해 "단청과 건축적 기교가 우리나라에서 제일"이라고 평했지만, 안화사는 고려 멸망 후 폐사됐다. 1931년에 중창했으나, 북한은 1987년 원형이 훼손됐다며 안화사를 대대적으로 개건했다. 개건된 안화사는 대웅전, 오백전(나한전), 승당으로 이뤄졌다.
1987년에 개건된 개성 안화사 전경. 중앙에 7층탑에 있고, 대웅전, 나한전(왼쪽), 승당(오른쪽)이 들어서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몸돌 앞면에 '지공정혜령조지탑(指空定慧靈照之塔)'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고려 말기에 활약한 중국 원나라의 선승인 지공선사(指空禪師)의 묘탑임을 알 수 있다. 1370년(공민왕 19)경에 조성된 부도로 추정되며, 우리나라 전통의 부도와 전혀 다른 양식을 보여주고, 외국 선승의 묘탑이라는 점에서 주목받는 유적이다.
개성 보봉산 기슭에 있는 화장사터에 남아 있는 나한전과 '화장사부도'. 화장사부도는 고려 공민왕 때 조성된 외국 선승의 묘탑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그러나 고려 말 조선 초에 국청사는 폐사되어 조선시대 문헌에서 기록에서 사라졌고,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됐다. 북한학계는 2019년 두 차례에 걸친 문헌조사와 현지조사를 통해 조선시대 때 "개성부 서쪽 13리"에 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는 국청현(國淸峴) 지역에서 많은 주춧돌과 기와, 기단 등을 발굴하고, 이곳을 국청사터로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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