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만나는 북한 문화유산] ? 천마산 대흥산성과 개성의 사찰유적

뉴스1 제공 2021.02.20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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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수백 개 사찰과 암자 거의 사라져
대성산성 안의 관음사와 대흥사가 명맥 유지

[편집자주]북한은 200개가 넘는 역사유적을 국보유적으로, 1700개 이상의 유적을 보존유적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지역적 특성상 북측에는 고조선과 고구려, 고려시기의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지난 75년간 분단이 계속되면서 북한 내 민족문화유산을 직접 접하기 어려웠다. 특히 10년 넘게 남북교류가 단절되면서 간헐적으로 이뤄졌던 남북 공동 발굴과 조사, 전시 등도 완전히 중단됐다. 남북의 공동자산인 북한 내 문화유산을 누구나 직접 가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하며 최근 사진을 중심으로 북한의 주요 문화유산을 소개한다.

(서울=뉴스1) 정창현 머니투데이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장 = 고려 수도였던 개경(개성)은 '불교도시'였다. 문헌에 이름이 전하는 사찰만 300개가량 된다. 이 사찰들은 개경 중심부를 시작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형태로 창건됐다. 특히 개경 중심부에 세워진 봉은사, 흥국사 등은 주요 국가차원의 불교행사를 주관했을 뿐만 아니라 궁궐과 관청 기능을 대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 멸망 후 개경의 쇠퇴한 함께 수많은 사찰도 쇠락의 길을 걸었고,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세월에 묻혔다. 문헌에 나오는 300여 개 사찰 가운데 위치가 파악된 것은 35개에 불과할 정도다. 조선시대에 작성된 지도나 회화첩을 통해 존재가 확인되는 사찰은 작은 암자를 제외하면 14개 정도다.

또한 일제강점기 이후 진행된 도시개발과 6·25전쟁 등으로 여러 사찰이 사라지고, 현재 그나마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사찰은 대흥산성 안의 관음사(觀音寺)와 대흥사(大興寺), 송악산 남쪽 기슭의 안화사(安和寺) 정도다. 이외에 오관산에는 남북 공동으로 복원한 영통사(靈通寺)가 있다.



개성 대흥산성의 북쪽 성곽 모습.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개성 대흥산성의 북쪽 성곽 모습.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특히 박연폭포와 인접해 있는 관음사는 예로부터 관광명소였다. 북한은 개성의 대표적 명승지인 박연폭포 관광을 활성화하기 위해 2014년 영통사와 박연폭포를 잇는 관광도로를 개설했고, 4년 뒤 이를 확장해 개통했다.

박연폭포와 관음사·대흥사를 품고 있는 대흥산성(大興山城, 국보유적 제126호)은 개성시내에서 북쪽으로 16㎞정도 떨어져 있다. 천마산성이라고도 불리는 이 산성은 개성 북쪽 대흥산의 산성골을 감싸며 서쪽의 천마산, 동쪽의 성거산 등의 험준한 산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은 석성이다. 천마산을 연결한 서쪽 구간은 험한 절벽을 성벽으로 그대로 이용했고 능선과 평평한 구간에는 돌로 성벽을 쌓았다.

개성 대흥산성의 북문, 남문, 동문, 서소문의 모습. 남문은 보수되기 전의 모습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개성 대흥산성의 북문, 남문, 동문, 서소문의 모습. 남문은 보수되기 전의 모습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축성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출토된 기와들로 보아 고려시대에 처음 쌓은 것으로 보이며, 1676년(숙종 2)에 대대적으로 보수했다. 성의 둘레는 10.1km, 높이는 4~8m 정도이다. 원래 동서남북 4개의 큰 성문과 동소문·서소문 등 6개의 사이문을 갖추었으나 현재 북문에만 문루(보존유적 제523호)가 그대로 남아 있고, 동문과 남문, 서소문은 홍예문만 남아있다. 몇 년 전 남문의 무너져 내린 주변 성곽을 보수하고, 앞 계단을 새로 만들었다.


개성 대흥산성의 북문과 바깥쪽 계단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개성 대흥산성의 북문과 바깥쪽 계단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개성 대흥산성 북문과 문루 측면 모습.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개성 대흥산성 북문과 문루 측면 모습.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북문의 문루는 박연폭포가 떨어지는 고모담 옆의 범사정과 함께 박연폭포의 경치를 한층 돋보이게 해준다. 18세기 사대부 화가였던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이 그린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에도 박연폭포와 북문이 실감나게 묘사돼 있다.

18세기 사대부 화가였던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이 그린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속의 박연폭포 그림. 오른쪽 아래에 범사정, 위쪽에 북문의 문루가 묘사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1.02.20.© 뉴스118세기 사대부 화가였던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이 그린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속의 박연폭포 그림. 오른쪽 아래에 범사정, 위쪽에 북문의 문루가 묘사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1.02.20.© 뉴스1
북문 동쪽 아래쪽에 있는 박연폭포는 예로부터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황진이(黃眞伊)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불렸다. 높이 37m의 박연폭포는 금강산의 구룡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로 일컬어진다. 박연(朴淵)은 폭포 위쪽에 있는 직경 8m 정도의 못이며, 이 박연에 담겼다가 떨어지는 것이 바로 박연폭포이다.

박연(朴淵)에서 내려다본 박연폭포. 박연폭포는 우리나라 3대 폭포의 하나로 꼽힌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박연(朴淵)에서 내려다본 박연폭포. 박연폭포는 우리나라 3대 폭포의 하나로 꼽힌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폭포수가 떨어지는 바로 밑에는 고모담(姑母潭)이라는 큰 못이 있고 서쪽에는 용바위라고 하는 둥근 바위가 못 속에서 윗부분만 드러내고 있다. 이 용바위에는 황진이가 폭포의 절경에 감탄해 머리를 붓삼아 썼다고 알려진 시가 새겨져 있다.

고모담 동쪽 언덕에는 폭포의 절경을 감상하기 좋은 범사정(泛斯亭, 보존유적 제524호)이 세워져 있다. 이 정자에 올라 폭포를 바라보면 폭포가 쏟아지는 것이 마치 뗏목이 급류를 타고 흘러내려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개성 박연폭포와 범사정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개성 박연폭포와 범사정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개성 박연폭포와 관음사·대흥사 안내도.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개성 박연폭포와 관음사·대흥사 안내도.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북문에서 능선을 타고 남쪽으로 약 1km 정도 골짜기를 따라 오르면 관음사 주차장이 나온다. 관광객을 반기듯 입구에 관음사의 내력을 기록한 관음사사적비가 바위 위에 서 있다. 1660년 (현종 1)에 세운 비석이다. 30m 정도 경사진 계단을 오르면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532호)가 인상적인 관음사 경내에 도착한다.

대흥산성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개성 관음사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대흥산성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개성 관음사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개성 관음사 입구 바위 위에 세워져 있는 관음사사적비.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개성 관음사 입구 바위 위에 세워져 있는 관음사사적비.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관음사는 970년(고려 광종 21)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이 처음 세우고, 1393년(조선 태조 1)에 크게 확장했다. 1477년(성종 8) 산사태로 무너진 것을 1646년(인조 24)에 다시 세웠고, 현재의 건물은 1797년(정조 21)에 중수한 것이다.

경내에는 현재 대웅전, 승방, 칠층석탑, 관음굴 등이 남아 있다. 승방 중앙에 난 문으로 들어가면, 마당 안쪽에 대웅전(국보유적 제125호)이 있고, 서쪽에 7층석탑, 북서쪽에 관음굴이 있다. 대웅전은 장대석을 쌓아올린 높은 기단 위에 있으며, 정면 3칸(8.4m), 측면 3칸(6.61m)의 겹처마를 댄 우진각지붕집이다. 대웅전 안에는 아미타불 좌상,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입상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7층석탑은 높이가 약 4.5m로, 고려 때 조성됐다.

개성 관음사 대웅전과 7층석탑.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개성 관음사 대웅전과 7층석탑.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개성 관음사 대웅전 안 불상과 천장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개성 관음사 대웅전 안 불상과 천장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대웅전 옆쪽에 있는 관음굴은 관음사가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1.2m 가량의 대리석관음보살상(국보유적 제154호) 2개가 있었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높이 120cm 크기로 화려한 보관과 가슴에 드리운 달개와 법의 등 옷 주름이 부드럽고 섬세하여 고려 석조불상의 걸작으로 꼽힌다.

하얀 대리석으로 조성된 관음보살상은 원래 한 쌍인데, 하나는 왼손 팔꿈치를 무릎 위에 세우고 오른손을 무릎 위에 드리우고 있고, 다른 하나는 두 손을 다 무릎 위에 드리우고 있다. 현재 전자는 관음굴에 그대로 있는 보존돼 있고, 후자는 1992년 개성 고려박물관으로 옮겼다가 1995년 다시 평양 조선중앙역사박물관으로 이관했다.

개성 관음사의 관음굴과 굴 안에 보존돼 있는 관음보살상.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개성 관음사의 관음굴과 굴 안에 보존돼 있는 관음보살상.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관음사에서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1km가량 내려오면 대흥사가 나온다. 대흥사는 1359년에 창건됐고, 1636년 병자호란 때 불타버린 것을 1690년에 중건했다. 대흥사는 대흥산성 안에 있는 수십 개의 암자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대흥사에는 1910년에 다시 지은 본전과 승당 등 4개의 건물이 남아 있었는데, 북한은 지난해 대웅전, 명의당, 승당, 완월루를 보수, 복원했다고 발표했다.

개성 대흥사 전경. 지난해 대웅전 등의 전각을 복원하기 전의 모습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개성 대흥사 전경. 지난해 대웅전 등의 전각을 복원하기 전의 모습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18세기 사대부 화가였던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이 그린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속의 대흥사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1.02.20.© 뉴스118세기 사대부 화가였던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이 그린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속의 대흥사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1.02.20.© 뉴스1
대흥사 주변에는 운흥사, 원통암 등 많은 암자 터들과 마애불들이 산재해 있다. 지난 2004년에는 대흥사 북쪽 절벽에서 고려시기에 조각된 것으로 보이는 높이 2.2m의 석불입상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곳에서 대흥산성 남문을 지나 동남쪽으로 내려가면 오관산 기슭에 자리한 영통사가 나온다.

영통사(국보유적 192호)는 1027년(고려 현종 18) 창건된 사찰로, 16세기 무렵 화재로 소실된 것을 2005년 북의 조선민족경제협력위원회와 대한불교천태종이 함께 복원했다.

개성 대흥산성 남문. 2018년 북한은 남문과 주변 성곽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남문에서 북문 사이 약 3km 관광길을 확장, 포장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개성 대흥산성 남문. 2018년 북한은 남문과 주변 성곽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남문에서 북문 사이 약 3km 관광길을 확장, 포장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개성 오관산 기슭에 있는 영통사 전경. 2005년에 남북 공동불사로 복원됐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개성 오관산 기슭에 있는 영통사 전경. 2005년에 남북 공동불사로 복원됐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영통사는 일찍이 고려 왕실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인종을 비롯한 여러 왕들이 자주 참배하고, 각종 왕실 법회가 열렸던 큰 사찰이었다. 당시에는 인연이 있는 왕들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진영각(眞影閣)도 있었다.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이곳에서 교관(敎觀)을 배우고 천태종을 열었으며, 입적한 후에는 그의 비가 이곳에 건립됐다.

개성 영통사 입구에 서 있는 대국국사비. 천태종을 개창하기까지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행적이 기록돼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개성 영통사 입구에 서 있는 대국국사비. 천태종을 개창하기까지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행적이 기록돼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대각국사비(국보유적 155호) 비문에는 어려서 불가에 들어간 대각국사 의천이 송나라에서 천태종과 화엄종을 배우고 돌아와 천태종을 개창하기까지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 서체와 서적간행 관계 등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한 지대석을 이루는 바닥돌은 고려시대의 석비들 중에서 가장 크며, 옥개석의 특이한 형식은 12세기경 고려의 조형미술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외에도 영통사에는 국보유적 제133호로 지정딘 오층석탑(국보유적 133호), 보존유적 제541호와 제542호로 지정된 동·서 삼층석탑, 당간지주 등이 남아 있다.

개성 영통사 오층석탑과 3층석탑 전경. 위는 영통사터에 세워져 있을 때의 모습이고, 아래는 영통사 복원 후 경내로 옮겨진 후의 모습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개성 영통사 오층석탑과 3층석탑 전경. 위는 영통사터에 세워져 있을 때의 모습이고, 아래는 영통사 복원 후 경내로 옮겨진 후의 모습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영통사에서 버스를 타고 송도저수지 옆길을 따라 개성시내로 돌아와 송악산 남쪽 기슭을 올라가면 안화사가 자리 잡고 있다. 안화사(보존유적 제1646호)는 930년에 처음 안화선원이라는 이름으로 창건됐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 삼한의 패권을 다툴 때 후백제에 볼모로 보냈던 4촌 동생 왕신(王信)이 죽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왕실의 원당으로 삼았던 절이다. 안화선원은 고려 예종 때 국가적인 대찰로 중창되었고, 이때 안화사로 개칭되었다.

안화사에는 무량수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양화각, 숭화각이 있었고, 능인전, 승법당, 미타전, 왕이 머물던 제궁(齊宮) 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고려의 유학자 이인로(李仁老)는 안화사의 화려함에 대해 "단청과 건축적 기교가 우리나라에서 제일"이라고 평했지만, 안화사는 고려 멸망 후 폐사됐다. 1931년에 중창했으나, 북한은 1987년 원형이 훼손됐다며 안화사를 대대적으로 개건했다. 개건된 안화사는 대웅전, 오백전(나한전), 승당으로 이뤄졌다.

1987년에 개건된 개성 안화사 전경. 중앙에 7층탑에 있고, 대웅전, 나한전(왼쪽), 승당(오른쪽)이 들어서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1987년에 개건된 개성 안화사 전경. 중앙에 7층탑에 있고, 대웅전, 나한전(왼쪽), 승당(오른쪽)이 들어서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송도저수지가 있는 개성시 용흥동의 동북쪽 보봉산 기슭에는 고려 때 창건된 화장사(華藏寺)가 있었지만 1727년 대웅전 등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고, 나한전 한 채만 남아 있다. 나한전 앞쪽에 있는 '화장사부도'가 국보유적 제134호로 지정돼 있다.

몸돌 앞면에 '지공정혜령조지탑(指空定慧靈照之塔)'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고려 말기에 활약한 중국 원나라의 선승인 지공선사(指空禪師)의 묘탑임을 알 수 있다. 1370년(공민왕 19)경에 조성된 부도로 추정되며, 우리나라 전통의 부도와 전혀 다른 양식을 보여주고, 외국 선승의 묘탑이라는 점에서 주목받는 유적이다.

개성 보봉산 기슭에 있는 화장사터에 남아 있는 나한전과 '화장사부도'. 화장사부도는 고려 공민왕 때 조성된 외국 선승의 묘탑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개성 보봉산 기슭에 있는 화장사터에 남아 있는 나한전과 '화장사부도'. 화장사부도는 고려 공민왕 때 조성된 외국 선승의 묘탑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2.20.© 뉴스1
북한학계는 최근 개성시 해선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국청사(國淸寺) 발굴을 추진하고 있다. 국청사는 1089년(선종 6년) 10월에 착공해 1097년(숙종 2년) 2월까지 8년간에 걸쳐 완공된 큰 사찰이었다. 국청사는 영통사와 함께 고려천태종의 총본산으로, 국가적인 귀빈들을 맞이하기 위한 환영의식 및 연회행사가 자주 열린 장소이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 말 조선 초에 국청사는 폐사되어 조선시대 문헌에서 기록에서 사라졌고,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됐다. 북한학계는 2019년 두 차례에 걸친 문헌조사와 현지조사를 통해 조선시대 때 "개성부 서쪽 13리"에 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는 국청현(國淸峴) 지역에서 많은 주춧돌과 기와, 기단 등을 발굴하고, 이곳을 국청사터로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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