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연광의 디지털프리즘]팬데믹 시대의 낭만부자들

머니투데이 성연광 에디터 2021.02.1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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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관주의와 공감 정신을 함께 가져달라. 그래야 세상을 바꾼다.” 2014년 6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가 미국 스탠퍼드대학 졸업 연설에서 사회 초년생들에게 당부한 말이다. 그가 말한 낙관주의란 “혁신이 지금의 세상을 보다 나아지게 할 것”이란 확신이다. 여기에 빈곤, 질병, 차별 등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공감한다면, 우리의 미래가 긍정적으로 바뀔 것이라는 게 그의 연설 요지다. 실리콘밸리 창업자에서 세계적인 거부로, 지금은 자선사업가로 살아온 빌 게이츠가 제시한 새로운 혁신가 상(像)이다.

 개인용 PC OS(운영체제) ‘MS-DOS’와 ‘윈도’를 세상에 내놨을 때만 해도 그는 순수 낙관주의자였다. 극소수 대기업만 보유할 수 있었던 컴퓨터를 일반 대중들에게 쓸 수 있도록 함으로써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 거라 믿었다. 그의 생각이 달라진 건 1997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방문한 후다. 마실 물조차 부족해 아이들이 고통받고, 기초적인 의료혜택도 받지 못해 많은 사람이 질병으로 죽어가는 현실을 지켜봤다. 그 자리에서 “기술 혁신이 세상 난제들을 과연 해결할 수 있을까” 절망했다. MS의 컴퓨터 무료 보급 사업도 배고픔과 질병 앞에선 사치에 불과했다. 2000년 그의 아내 멜린다 게이츠와 함께 재단을 만들어 자선사업에 뛰어든 동기다. 그리고 지난 20년간 그가 내놓은 기부액만 40조원이다. 그의 기부금으로 목숨을 살린 5세 이하 어린이 수만 약 1000만명에 이른다.



# 빌 게이츠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으로 존경받는 이유는 단지 천문학적 기부금 때문만은 아니다. 게이츠 부부는 재산을 내놓는 데 그치지 않고 개도국 빈곤·질병 퇴치, 교육, 기후변화 등 지구촌 당면 문제들의 해결방안을 찾는 데 직접 팔을 걷어붙였다. 진정으로 개도국 난민들의 아픔에 공감했다. 공개방송이나 콘퍼런스, 유튜브나 팟캐스트도 마다하지 않고 출연해 글로벌 불평등이나 질병 문제에 대한 관심과 협력을 호소한다. 코로나19(COVID-19) 팬데믹(대유행) 이후 그의 존재감은 더욱 두드러졌다. 백신·치료제 개발에 재단 지원금 1억달러를 쾌척했고 세계 지도자들에게 수시로 국제공조를 요청했다.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두 차례나 전화했다. ‘기부왕’ ‘자선사업가’를 넘어 인류공존을 위한 민간 메신저가 됐다.

슈퍼리치들의 기부문화에 새 지평을 연 인물도 빌 게이츠다. 2010년 그의 절친이자 재단 공동 출자자인 워런 버핏과 의기투합해 억만장자들이 재산의 절반 이상을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서약하는 ‘더 기빙플레지’(The Giving Pledge) 캠페인을 제창했다. 게이츠 부부 먼저 재산의 90%를 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일론 머스크 테슬라 회장,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최고경영자) 등 24개국 218명이 캠페인에 동참했다. 팀 쿡 애플 CEO도 전재산을 환원하겠다고 발표했다. 디지털 신흥 부자들의 새로운 가치투자 실험이 한창이다.
라이언과 브라이언(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 /사진제공=카카오브런치라이언과 브라이언(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 /사진제공=카카오브런치


# “재산의 절반을 사회문제 해결에 기부하겠다”는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의 결단은 ‘한국판 더 기빙플레지’의 시작이다. 우리 사회가 ‘부의 대물림’에 너무 익숙해서일까. 가난과 역경을 딛고 성공한 흑수저형 사업가여서 그럴까. 5조원 규모에 달하는 그의 재산 환원 소식은 우리 사회에 묵직한 울림을 줬다. “내가 태어나기 전보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라고 적힌 김 의장의 카카오톡 상태 메시지나 “격동의 시기 사회문제가 다방면에서 심화되는 것을 목도하면서 더이상 결심을 늦추면 안되겠다”는 그의 변(辯)에서 7년 전 스탠퍼드대학 졸업식에서 빌 게이츠가 강조한 이 시대 낭만 혁신가의 전형이 읽힌다.



빌 게이츠는 “성공은 얼마나 많이 돈을 벌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냐로 측정한다”고 했다. 한국 사회에서 김 의장의 결단은 이제껏 맹목적으로 ‘벼락부자’만 좇던 젊은 창업가들에게 성공에 대한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임이 틀림없다. 찾아보면 기부 규모의 많고 적음을 떠나 공감을 실천하는 사업가들이 늘고 있다. 넥슨을 창업한 김정주 NXC 대표도 얼마 전 어린이재활병원 사업에 사재를 출연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화제다. 이들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우리 다음 세대의 미래를 바꾸는 큰 파동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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