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귄트는 망나니다. 바람둥이, 허풍쟁이, 사기꾼 등 온갖 수식어를 붙여도 이상할 게 없는 친구다. 사랑하는 솔베이지를 기약도 없이 기다리게 해놓고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제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간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노르웨이판 ‘그리스인 조르바’다. 한편으로는 틀에 박힌 생활을 벗어나 거리낌 없이 사는 것이 부럽기는 하다.
노년의 페르귄트는 남은 재산을 챙겨 배를 타고 귀향길에 오른다. 근신해야 함에도 선원들에게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다. 바다는 반성할 줄 모르는 그를 응징하기로 한다. 요나가 신의 명령을 듣지 않자 바다가 대신 벌했으며 오디세우스는 포세이돈의 분노로 바다에서 온갖 고생을 겪은 후에야 고향에 갈 수 있었지 않았는가.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영화 벤허(1959)의 주인공 찰턴 헤스턴(Charlton Heston)이 초창기에 무성영화 페르귄트(1941)의 주연을 했다는 점이다. 갤리선에서 노를 젓는 노예 벤허와 만찬을 즐기는 사업가 페르귄트의 장면이 오버랩 된다. 둘 다 마지막에 자아를 찾고 마음의 평화를 얻지만 이에 이르는 과정은 극과 극이다.
요즘 페르귄트보다 더 못된 이들을 자주 접할 수 있다. 그야말로 무기탄(無忌憚)한 인간들이 도처에서 날뛴다. 자기 허물은 감추고 남의 것만 들춰내는 파렴치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개인의 이익을 민족이나 국가에 앞세우는 뻔뻔함에 할 말을 잃는다. ‘내로남불’이 사자성어로 오인될 만큼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다. 내 탓[mea culpa]이 정말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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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모두 배에 태워 바다의 준엄한 심판을 받도록 하고 싶다. 바다가 합당한 벌을 내려 부당 이익을 환수하도록 해야 한다. 진정한 자아를 찾을 때까지 그들을 혹독하게 다뤄야 한다. 페르귄트의 바다는 이를 똑똑히 보여주었다. 혹시 바다에서 날씨가 거칠어 괴로운 상황에 처하거든 내 잘못 때문이라고 반성하자. 바다가 곧 잠잠해질 것이다. 세상이란 바다도 마찬가지이다. 죄짓고 바다에 나가지 말며, 세상에 나서지도 말자.
Edvard_Grieg_(1888)_by_Elliot_and_Fry & Henrik Ibsen, 1898, by Gustav Borgen/ image by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