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이라는 신비한 마술 '여신강림'

이현주(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1.01.20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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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화장과 첫사랑의 설렘 가득!

사진제공=tvN사진제공=tvN


유튜브는커녕 인터넷도 없던 시절, 나는 화장을 잡지로 배웠다. 대학 입학을 앞둔 고3 겨울방학 중 어느 날, 친구들과 약속이 있던 나는 처음으로 화장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그나마 요즘 말로 '풀메'(풀메이크업)는 엄두도 못 냈고 눈썹을 그리는 정도였지만. 미술 대회에서 상을 더러 받아 나름 그림에 자신이 있던 당시의 나는 그간 잡지에서 봤던 최신 유행 눈썹을 고스란히 내 눈썹에 옮겨 그리고 한껏 들떠 친구들을 만나러 나갔다.



그 다음 얘기는 대충 누구나 짐작하는 바와 같다. 모양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명도에 심각한 결함이 있던 내 눈썹은 친구들을 경악시켰고, 훗날까지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tVN의 수목드라마 ‘여신강림’(극본 이시은, 연출 김상협) 첫 회에서 주인공 주경(문가영)이 서툰 화장으로 친구들에게 놀림당하는 장면은 그렇게 잊고 지냈던 나의 스무 살 무렵 첫 화장을 떠올리게 했다.

‘처음’이라는 수식이 붙는 일들은 대개 어설프고 서투름을 동반한다. 그래서 지우고 싶은 기억이지만 문득 추억이란 이름으로 아련함을 선사하기도 한다. 첫 화장도 사람들에겐 그런 기억이 아닐까. ‘여신강림’은 첫 화장을 앞둔 소녀들과 첫사랑을 꿈꾸거나 하고 있는 소년소녀, 그리고 그 시절을 기억하는 어른들을 화면 앞으로 불러 모으는 드라마다. 자주 손발이 오글거리는 장면이 등장해 당황스럽지만 일상의 팍팍함을 잊고 삶의 화양연화 같은 장면을 구경하는 재미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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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은 참으로 신비한 마술이다. 주경이의 화장 전과 후의 얼굴이 확실한 예다(물론 주경이 같은 금손이 아닌 나는 예외지만). 어설픈 첫 화장의 시기를 벗어나 숙련의 경지에 오르고 나면 화장만큼 재미난 일도 없다. 도화지 같은 맨 얼굴에서 시작해 입과 눈, 눈썹과 속눈썹까지를 다채롭게 물들일 무수한 화장품과 도구들은 또 얼마나 사랑스럽고 다양한지. 게다가 요즘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배울 수 있는 친절한 콘텐츠는 인터넷이며 유튜브에 얼마나 많은가.

대학 입학을 앞두고 화장을 시작한 나와 달리 요즘은 화장의 시기가 빨라졌다. 맨 얼굴이 충분히 예쁜데 왜 굳이 일찍부터 화장을 하냐는 말은 내 안에서 화석이 된 지 오래다. 어른들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고, 본인은 화장을 하는 것이 훨씬 예쁘다며 또박또박 주장을 펼치던 나의 큰딸에게 이미 한참 전에 설득됐기 때문이다. 어느새 대학생이 된 큰딸은 이제 자기만의 화장대를 갖게 되었다. 그 화장대 앞에서 주경이처럼 비포와 애프터를 넘나들며 본인만 모르는 눈부신 청춘의 나날을 촘촘히 채워갈 것이다.


반면 충격적인 첫 눈썹 그리기에 실패한 뒤로, 눈썹 그리는 일은 똥손인 내게 좀처럼 풀기 힘든 숙제로 남아 있었다. 다행히 첨단 미용 기술(?)의 힘으로 눈썹은 해결했지만 주경이처럼 화장을 통한 여신 같은 변신은 오래전인 결혼식 이후 결코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외출할 때 옷을 갖춰 입는 것처럼 습관적으로 화장을 하고 있다. 이 나이에 화장은 치장이 아닌 예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사진제공=tvN사진제공=tvN
사실 나는 '여신강림'이 드라마로 방영되기 전부터 원작 웹툰을 몰래 즐겨 봐왔다. 대학생 딸을 둔 이 나이에, 대놓고 팬이라 하기 부끄러워 소심하게 보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인기가 어마어마하다고 해 깜짝 놀랐다. 어쨌거나 수호파와 서준파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던 나는 드라마를 보며 비로소 마음을 정했다. 웹툰을 보며 소녀 시절로 돌아갔다가 엄마 마음이 되었다 하며 널을 뛰듯 서준과 수호 사이에서 방황하던 나는 결국 드라마를 보고 수호가 아닌 ‘차은우’에게 매료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여신강림’에서 내가 가장 보고싶은 것은 주인공 주경의 성장이다. 착하기만 한 주경이 당차게 사랑과 꿈 모두 이뤄내는 것.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화장에 의존했던 주경이 스스로의 모습 그대로를 아끼고 사랑하게 되는 것 말이다. ‘여자=화장’이 아닌 시대, 화장은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빛나기 위한 선택이란 것도.

그렇다면…나도 예의 따위, 남의 시선을 고려해 화장하는 것을 그만둘까? 아, 그러나 아무래도…그건 아닌 것 같다.

이현주(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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