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신춘문예 대상]초파리들

머니투데이 김봉기 2021.01.01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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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머니투데이 경제신춘문예]김봉기/단편소설

[경제신춘문예 대상]초파리들


초파리들

이른 아침, 좁은 원룸 안에 비린내가 난다. 나는 식탁 쪽으로 다가가서 텐트 같은 투명 망사 밥상보를 들어 올린다. 국수에 깨알처럼 붙어 있던 초파리 너댓 마리가 화들짝 튀어 오른다. 여전히 식탁 위를 맴돈다. 어젯밤 골뱅이 소면 무침에 쓰고 남은 국수가 아직도 물기를 머금고 하얗게 말라가고 있다.

나는 문득 베란다의 음식물 쓰레기를 떠올린다. ‘까만 비닐에 담겼던 그 음식물 쓰레기의 부재가 그들의 본능적인 움직임을 이끌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옆에 놓인 골뱅이 캔 속을 들여다본다. 국물 한가운데 까만 점 하나가 둥둥 떠 있다. 초파리 한 마리가 고개를 처박고 있다. 좀 전에 도망간 놈들은 동료가 익사체로 잠겨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하얀 국수의 단물을 빨고 있었던 것 같다.



수저통에서 깨끗한 숟가락 하나를 꺼낸다. 골뱅이 캔 속의 사체를 국물과 함께 떠서 건져내어 싱크대에 휙 버리고 숟가락을 수돗물에 한번 헹군다. 골뱅이처럼 배배 꼬인 생 하나가 기나긴 아파트 하수도관 파이프를 타고 롤러코스터처럼 집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그려본다. ‘이것을 초파리의 수중 입관식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쓸데없는 생각에 웃음이 배실 배실 새어 나왔다. 그리고 ‘캔 속에 남은 골뱅이를 먹어야 하나?’, 라는 잠깐의 망설임 뒤에 골뱅이 캔을 적당한 커버로 덮어 냉장고 한쪽 구석에 밀어 넣는다.

아침 출근을 서둘렀다. 강남에 있는 회사로 향하는 지하철 9호선은 조금만 늦어도 일명 지옥철이 되어 버린다. 만원 지하철 안에서 숨쉬기조차 힘들게 전후좌우로 다닥다닥 붙어있어도 다들 용케 스마트폰을 볼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을 확보한다. 서 있거나 움직이는 동안에도 60도 내지 45도로 꺾인 기형적인 목으로 홀린 듯 뚫어지게 사각형의 액정을 보는 현생 인류. 인류의 조상인 ‘호모 에렉투스’의 어원이 똑바로 선 사람이라는데 우리가 목이 휘도록 신봉하는 이 ‘문명의 이기’ 때문에 인간은 100만 년 만에 시나브로 퇴화로의 길을 택한 것 같다. 사람들의 손에 쥐어진 이것의 내부에는 데이터를 저장하는 메모리 반도체가 있고, 나는 외국계 반도체 회사에서 그것의 판매를 위한 마케팅 일을 한다. 그들 모두가 내 고객이 될 수 있는 셈이다.



반도체는 전기를 통하는 도체와 통하지 않는 부도체의 어중간 상태에 있는 물질이다. 그중 메모리는 대한민국의 두 회사가 전 세계 1, 2위를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실리콘이나 게르마늄이라고 하는 안정된 공유 결합 구조의 진성 반도체에 남거나 모자라는 불안정한 구조의 불순물을 집어넣으면 신통하게 도체로 바뀔 수 있다. 마치 물고기에 미끼를 던지면 덥석 물어서 적당한 힘으로 끌어올릴 수 있듯이 닫힌 세계에서 열린 세계로 끌어오는 그런 역할을 한다.

이것은 고객이 배달앱을 통해 주문을 하는 것과 같다. 배달앱을 통해 주문받은 식당에서는 음전하 또는 양전하, 라는 음식을 만들어 놓고 기다린다. 이때 진성 반도체에 불순물을 투입하면 길이 생기고 오토바이와 자전거에 해당하는 전자와 정공으로 이루어진 전하 운반캐리어들이 음전하와 양전하를 포장해서 배달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마치 스위치가 번쩍 켜지듯 불통의 반도체가 도체가 되고 트랜지스터가 되어 각종 전자기기를 작동시킨다. 이 간단한 불순물의 투입으로 닫힌 세상은 수많은 디지털 정보로 가득하게 되고 인간의 소통과 문명의 이기를 가져왔다.

나는 어쩌면 그 불순물과 같다. 회사 전체 직원 75명. 이 중 I사 출신은 36명, T사는 36명으로 양사 출신이 전체의 96퍼센트로 팽팽한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국내 대리점 출신 세 명이 나머지 4퍼센트를 차지한다. 무슨 이유에선지 나를 포함한 세 명은 국내 영업대리점에서 굉장히 좋은 조건에 스카우트 되어서 왔다. 영세한 국내 대리점보다는 최고의 영업 및 생산 시스템을 갖춘 외국 기업의 한국 지사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고 선택을 했다. 하지만 인간사가 일만 잘 한다고 술술 잘 풀리는 건 아니지 않는가? 표면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힘과 알력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 지에 대한 생각들이 입사 후에 많아지기 시작했다. 두 회사가 합병되어 석 달이 채 안 된 상황에서 공공연한 세력 다툼의 기세가 느껴진다. 마치 동네 개들이 전봇대만 보면 한 쪽 다리를 들고 오줌을 갈기며 서로의 영역을 표시하듯이 두 회사 출신들이 노골적으로 나를 포함한 나머지 4퍼센트의 국내 영업 대리점 출신들에게 접근해 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서로 정통 반도체의 후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정통성을 유지한다는 자부심에다 외국계 회사 출신이라는 프리미엄으로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음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힘 있어 보이는 누구에게나 아킬레스건이 있듯, 그들은 우리 같은 4퍼센트 불순물이 다리를 놓아주지 않으면 서로 소통도 안 되고 전기를 통할 수 없는 부도체로 남게 되는, 아무 쓸데없는 한낱 반도체 돌덩어리에 불과하다. 칠십오 명 중 세 명. 4퍼센트의 불순물. 우리가 소통의 창구로 분위기 메이커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신논현역을 걸어 나왔다. 내가 근무하는 I&T Memorics(아이앤티 메모릭스) 한국 지사. 대한민국에서 유동 인구가 제일 많다는 강남에 위치한 빌딩의 고층에 위치한 외국계 반도체 회사로서 본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호세에 있고 대부분의 생산 시설은 이탈리아와 중국에 있다. 내가 속한 본사의 마케팅 사업본부는 미국에 있고 하위 조직인 아태 마케팅 본부는 중국에 있다. 나의 상사는 아태 마케팅 본부의 매니저로서 중국에서 근무하는 게 맞지만 글로벌한 회사답게 싱가포르 지사에서 한국, 인도, 태국, 베트남 등의 로컬 지역을 관장한다.

전체 직원이 대회의실에 모여 있다. 합작 회사명을 ‘I&T Memorics(아이앤티 메모릭스)’로 정한 후에 첫 분기별 영업·마케팅 회의인 QBR(Quarterly Business Review). 한국 지사의 첫 실적 발표 및 영업 계획 수립을 위한 회의라서 내부적으로도 다들 긴장한 분위기가 역력하다. 외부적으로는 미국과 유럽의 첫 메모리 반도체 합작 회사의 출범으로 세계 1, 2위 메모리 반도체 회사를 보유한 한국 반도체 업계도 긴장하면서 우리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황이다. 합작을 주도한 I사는 미국 산호세에 본사를 둔 메모리 반도체 매출 세계 4위이자 컴퓨터의 심장인 중앙처리장치와 같은 시스템 반도체 부문 세계 최고의 회사이다. T사는 유럽 이태리에 본사를 둔 메모리 반도체 매출 세계 3위의 자체 설계와 생산이 가능한 IDM 회사, 즉 종합 반도체 회사이다. 보통 중소 규모의 반도체 회사는 설계 기술만 연구하는 팹리스 회사와 전문화된 생산 설비와 기술력을 갖추고 설계된 기술의 생산을 주문 받아 위탁 생산만 담당하는 파운드리 회사가 있는데 비해, 두 회사는 메모리와 시스템 반도체의 자체 설계 및 생산 모두 가능한 꽤 규모가 있는 IDM(Integrated Device Manufacturer), 즉 종합 반도체 회사이다. 이런 큰 규모의 IT업계는 수년 전부터 군살 빼기에 한창이다. 급변하는 산업 생태계에서 생존에 필수적인 선택과 집중을 위해 돈이 될 만한 사업부문을 매각하거나 분사시키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다. I&T메모릭스도 새로운 가치와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도록 유사한 플래시 메모리 사업부문을 통합한 일종의 스몰딜을 통한 합작사이다.

먼저 임시 지사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김명수(마이클 김) 지사장이 간단하게 인사말을 하고 빠졌다. 그는 외국계 자동차 회사 V자동차의 한국 생산 공장에서 구매 담당 임원이었다. 그가 V자동차에 있을 때 T사와 I사, 양사의 자동차용 반도체를 구매했고, 양측에서 모두 좋은 파트너로 평가를 받고 있었다. 자동차가 핸드폰이나 TV 등 전자제품에 비해 생산 물량이 많지는 않지만 진입 시에 특별한 기술적인 이슈가 없으면 물량과 가격 변동 없이 꾸준히 사용하는 편이어서 자동차 회사는 아주 안정적인 고객이다. 깔끔한 인상에 예의도 바르고 영어가 유창한 그가 만약 반도체 및 전자 분야 쪽의 경력만 있었다면 정식 지사장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자동차용 메모리 시장의 규모가 작지만 향후 성장 잠재력을 보고 선점하기 위한 본사의 포석일 수도 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전기차, 수소차 등 친환경 자동차 시장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는 V자동차를 버리고 맛있는 냄새를 맡고 찾아온 초파리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처음 발표자는 OEM 영업팀에서 G전자 영업을 담당하는 T사 출신의 박태섭(티모시) 이사이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외국계 회사는 규모가 더 큰 A전자 영업 담당 매니저가 첫 발표를 하지만 A전자향 매출이 시원찮다. G전자는 가전에서 세계적인 회사이고 A전자는 가전보다는 스마트폰, 타블렛PC 등 무선 쪽 사업에서 세계 선두주자이다. A전자의 구매는 계열사인 A반도체에서 대부분의 메모리를 공급 받고 있어 아쉬운 게 없다. 하지만 갑자기 생산 물량이 폭주할 경우를 대비해 2차 공급자를 선정하고 일정 물량을 보장해주고 업체들끼리 경쟁을 시킨다. 그것도 경쟁이 치열해 가격이나 품질이 월등하지 않으면 기존 거래선을 뚫기가 수월치 않다. 지금은 우리 회사만 기형적으로 G전자향 영업 매출이 커서 박 이사가 첫 발표를 한다. 그는 밑에서 아무리 발버둥쳐 봐야 윗선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힘들다는 탑다운 논리를 펴면서 G전자와의 전략적인 관계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길이 아니다 싶으면 돌아가야 된다, 는 표현을 중간중간 사용하며 지금 고전하고 있는 A전자의 영업 상황을 은근히 비꼬는 투로 말했고, 가전에 들어가는 중·저용량 메모리에 치중하는 편이 낫다고 얘기하면서 마무리했다.

내부적으로 경쟁관계인 I사 출신 마케팅팀의 유화인(아이언) 이사가 앞으로 나왔다. 그는 A전자의 저조한 실적을 올리기 위해 특별 태스크 포스팀의 팀장 역할을 겸하고 있다. A전자향 영업과 마케팅 총 책임자이다. 마케팅팀은 영업팀에 진입 가능한 시장에 대한 조언, 기술 지원, 제품 로드맵 등을 제시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제품 가격에 대한 권한이다. 든든한 마케팅팀의 지원으로 영업이 쉬울 수 있지만 원가 이하로 판매할 수는 없으니 그의 어깨도 무겁다. 그는 A전자도 A반도체에만 의존할 수만은 없을 것이며,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상황에서 노트북PC, 스마트폰, 타블렛PC 등 모바일 기기에 들어가는 고용량의 eMMC, eUFS, LPDDR5 메모리에 분명 기회가 있다, 고 말했다. 그리고 I사의 뛰어난 기술력이 더해진 이번 합작사의 출범으로 조만간에 좋은 결과가 기대된다는 말로 장밋빛 희망을 주며 서둘러 발표를 마무리했다. 이런 회의에서는 실적이 없으면 목소리를 높일 수 없다. 그 외에 기술팀, 품질관리팀 그리고 주문 물량의 입력 및 선적 등 로지스틱 부분을 책임지는 고객 서비스팀 순으로 발표를 마치고 장장 8시간의 회의가 끝났다. 스위치가 켜지고 이제 다음 달에 달성해야 할 목표만 숫자로 의미 있게 남아있을 뿐이다. 이제 지사장이 주관하는 회식이 기다리고 있다. 회사 근처 호프집을 통째로 빌려서 하는 회식 자리이다.

맥줏집 입구에 들어서니, 요즘 코로나로 인해 유흥업소 매출이 반토막이 나는 상황이어서인지 가게 주인은 어서 오세요, 하며 우렁찬 소리로 반색을 하며 먼저 도착한 우리 일행을 맞았다.

“저기 안쪽 큰 테이블로 모시겠습니다.”
“손님이 많이 없네요.” 유 이사가 잽싸게 안쪽을 휙 둘러보며 말했다.
“코로나로 거의 문 닫을 지경이었는데 지난달부터 사람들이 정부 재난지원금을 쓰기 시작하면서 숨통이 좀 트이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우리, 기분도 꿀꿀한데 멕시코 브랜드 ‘코로나’ 맥주나 왕창 마셔버릴까? 어때요?”라며 유 이사가 나름 재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싱긋 웃으며 우리를 둘러봤다.

맥줏집 사장이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으로 유 이사와 우리를 향해 말했다.

“아, 뉴스 못 보셨구나! 그 맥주가 생산이 중단 됐습니다.”
“네, 뭐라고요? 맥주 이름이 찝찝하다고 누가 불매운동이라도 했나요?”
“아, 글쎄 맥주가 입고가 안 되길래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멕시코 정부에서 모든 비필수 업종 운영 중단 조치를 취해서 맥주가 싹 들어갔다고 하더군요.”
“아니, 맥주가 왜 비필수란 거야? 말이 안 되지. 제이슨 과장님(고정석 과장), 그렇지 않아요?” 유 이사는 세 명 중에 나를 보고 질문을 했다. 약간 고압적인 눈빛으로 내 얼굴을 살피면서 물었다. 나머지 두 명은 이미 자기 편이므로 물어볼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내가 얼른 대답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잠시 살피더니,
“하여튼 뭐, 다른 나라 일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자, 이제 자리로 갑시다.”
유 이사와 주인의 대화가 끝나자 우리는 자리로 향했다.

나는 이번에도 도체가 되지 못했다. 옆에 있는 완전히 포섭된 PS과장(김필선 과장) 같았으면, ‘그렇죠, 그게 왜 비필수인지 모르겠어요. 술 없이는 못 살아요.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말이죠.’, 라고 했을 것이다.

술을 좋아하는 유 이사는 밑 빠진 독처럼 술을 마시는 술고래다. 그가 I사에 있을 때도 그의 엄청난 주량에 대해서는 반도체 업계에 소문이 자자했다. 술이 세다는 것은 그것에 약한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기억한다는 점이다. 물론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그날의 술자리를 주도하지만 그 술자리의 제왕처럼 모든 상황을 꿰고 있으면서 그 자리에 동석한 사람들이 정신이 혼미한 사이에 뱉어내는 회사나 개인사 관련한 말들을 주워 담고 자기만의 정보로 데이터베이스화 할 수 있다는 점이 무섭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승리하는 것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고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 반도체 영업은 다른 완제품을 취급하는 영업과 달리 주로 TV, PC, 스마트폰 등 최첨단의 전자 제품에 들어가는 소형 부품을 파는 부품영업이다. 그래서 전문적인 공학지식으로 무장해서 고객에게 기술력, 가격, 물량에 대한 확신과 시장동향 정보 등을 업데이트 해주면서 얻은 신뢰를 바탕으로 비즈니스를 성사시키는 종합예술 같은 일이다. 하지만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라 고객과의 친화력이 중요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술이 최종 비즈니스 성사 여부를 결정하는 화룡점정이 될 수 있다.

맥줏집 사장이 안내한 자리는 홀에서 떨어져 조용하게 얘기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었다. 유 이사가 앉자마자 나를 향해 말했다.

“여기 PS와 ES(정은수) 두 과장도 회사 분위기 제대로 알아가면서 우리랑 잘 지내는데…. 나는 두 사람 같이 부를 때 피~스, 라고 불러요. 피에스와 이에스, 피~스. 하하, 나는 평화를 사랑하니까…. 제이슨 과장님은 어때요, 괜찮아요?”

사람이 무슨 햄버거 세트도 아니고 아무리 아래 위가 있는 조직이라지만 한 번에 두 사람을 물건 취급하듯이 불러댄다는 것은…. 속으로 심한 반발감이 일었다. 그리고 저렇게 깐죽거리는 걸 보니, ‘합병 후 석 달 사이에 거미 한마리가 열심히 촘촘한 거미줄을 쳤구나. 그래서 국내 대리점에 온 우리 세 사람 중 PS와 ES 두 사람은 확실하게 잡아놓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아직 제이슨 과장님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아직 대하기가 불편한 모양이다. 외국계 회사는 직위가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이 특별한 영어식 이름이 없다면 그 이름의 첫 글자 알파벳만 부른다. 내 이름이 ‘고 정석’이니 JS가 맞지만 내가 영어식으로 제이슨으로 이름을 정했기 때문에 제이슨으로 불린다. 말하는 사람의 직위에 따라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제이슨 과장 또는 제이슨 과장님으로 불린다.

“네, 괜찮습니다.”
“그냥 I’m just okay. 이 정도의 말인가요?”

괜찮냐, 라는 질문의 뉘앙스는 나를 시험대에 들게 하는 말인 것 같아 그대로 받아쳐서 ‘괜찮다’고 대답했다. 질문을 두루뭉술하고 넓게 한다는 것은 나의 감정 상태의 디테일을 얻어내려고 하는 뻔한 수작이다. 나는 휘말리지 않으려고 그대로 받아줬다. 만약 주절주절 말하기 시작하면 그의 데이터베이스에 나의 내면에 담긴 정보가 실시간 야금야금 저장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랑’의 우리가 누구인가? 냉정하기로 소문난 미국 I사가 아니던가? 지금 눈 앞 두 명의 대리점 출신들이 I사 라인에 합류했으니 I사와 T사의 힘의 균형이 38대 36으로 깨졌다. 이제 마지막 나까지 끌어들이면 39대 36가 되어 52퍼센트로 완벽한 자기들의 세계로 가져갈 수 있다는 계산인 것 같다. 지금 지사장은 과도기 회사의 대표와 같은 존재다. QBR에서 간단하게 인사말을 하고 빠진 이유도 본인이 계속해서 조직을 이끌 수 있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럼 조직을 이끌 지사장이 과연 누가 될 것인가? 돌아가는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본사에서는 외부 영입설 또는 내부에서의 자체 승진을 생각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 만약 후자 쪽이라면 이 아사리판의 승자가 누가 될지 뻔하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많이 없다. 하지만 나는 유럽계 회사인 T사에 좀 더 매력을 느낀다. 인간적이다. 조금은 다혈질적인 면도 있지만 한번 친해지면 친구처럼 대하고 아낌없이 정보를 공개하며 일하기가 편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적으로 뒤통수를 치지는 않는다. 싫은 건 싫은 거다.

“아니, 뭘 그렇게 오래 생각하세요? 그냥 국내 대리점에서 외국계 회사 적응하기가 어떤지 물어본 건데…”
“네, 많은 분들이 도와 주셔서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힘들면 언제든지 얘기해요.”

형식적으로 네, 라고 대답하려는데 지사장과 함께 도착한 나머지 직원들이 입구에서 우리 쪽을 보고 큰 소리로 불렀다. 회의 뒷정리를 하고 나머지 일행이 도착한 것이다. 모두 미어캣처럼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부담스런 대화는 다행스럽게 부도체처럼 끊어졌다.

장시간 회의에 지쳐서인지 1차 회식이 끝나고 다들 헤어졌다. 나는 PS와 ES를 몰래 불러 2차를 가자고 했다. 회사 근처 닭갈비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유 이사에게 굽신거리는 태도에 대해 한마디 했다.

“야, 너희는 배알도 없냐? 유 이사가 피~스, 라고 부르면 너희 둘이 총알 같이 튀어나가는 거야? 뭐, 쇤네 분부 받잡고 대령했습니다, 하는 거야? 무슨 사극 하니?”

우리 셋은 이 회사 오기 전부터 이미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업계도 좁은 데다, 반도체 기술 세미나, 외국계 대리점 체육대회 등 빈번한 교류를 통해 자연스레 알게 되었고, 나이도 비슷해서 말을 트고 친구처럼 지내고 있었는데 이 회사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야, 그래도 유 이사가 실세 아니냐? 나도 이왕 이쪽으로 방향을 틀었으니 빨리 적응해서 길을 찾아야지.” 라고 PS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하지 않냐? 찰떡같이 실세에 붙어야지! 우리가 뭐 가진 게 있냐? 앞으로 닥칠지 모르는 풍파를 막아 줄 바람막이는 필요하잖아.” 라고 ES가 맞장구를 쳤다. 나는 하얗게 말라가던 국수사리에 붙어 있던 초파리들을 떠올렸다. ‘눈에 보이는 것들만 믿는 하수들‘이란 생각을 하며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그놈의 실세 수발하느라 앞으로 쉴 새 없이 바쁘겠구만…. 각자의 삶이고 선택이니 나도 뭐라고 할 수 없지. 비굴이 밥 먹여 준다는데, 뭐…. 그래, 본능이 시키는 대로 다들 잘 먹고 잘 살아라. 한 잔 하자. 피~스….”

나는 소주잔을 세 손가락으로 들고 건배라는 말 대신에 피~스를 큰 소리로 외쳤다. 왠지 밥상보 꼭지를 잡는 듯한 묘한 기시감이 전해졌다. 두 사람을 앞에 두고 소주잔을 비우고 나서 우연히 식당 출입구 유리창 바깥에 눈이 갔는데, 이게 웬일인가? 창밖으로 눈에 익은 두 사람, 유 이사와 박 이사가 어깨동무를 하고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둘 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듯 비틀거렸지만 아주 친해 보였다.

다음날 G전자 영업팀의 박 이사가 운전하는 차로 평택의 G전자를 가게 되었다. 영업팀은 큰 매출 규모의 업체를 직접 관리하는 OEM 영업팀과 중소기업을 고객으로 둔 국내 대리점들을 관리하는 디스티 영업팀으로 크게 양분된다. 나는 OEM 영업팀의 기술 및 마케팅 지원하는 마케터로 오늘 잡힌 고객 미팅에 가는 중이다. 보통 타 경쟁사를 따돌리고 오더를 받기 위해 영업 사원은 담당 업체에 기술 지원부터 가격, 물량 등 모든 가능한 좋은 조건을 제시하고 지원해야 한다. 오늘은 G전자 구매팀을 만나 제품 로드맵을 보여주고 우리 회사의 제품으로 진입할 수 있는 G사의 모델을 발굴하러 가는 길이다. 박 이사는 유럽계 T사 출신으로 차분하면서 아랫사람에게도 항상 존댓말로 대하는 정감 있는 사람이다. 유 이사처럼 어느 시점에 편안해지면 말을 놓을까 기회를 엿보는 하이에나 같은 스타일은 아니다. 어제 유 이사와 어깨동무하던 모습이 떠올랐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어제 유 이사 쪽 테이블에 있던데, 많이 마셨어요?” 박 이사가 먼저 말을 건넸다.
“아니오, 처음에 그쪽에서 맥주 조금 마시다가 이곳저곳 자리를 옮겼죠. 많은 분들과 빨리 친해져야 하니까요.”
“천천히 알아 가는 것도 좋아요.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잖아요. 천천히 자기 진가를 보여주면 알아서 사람들이 다가온다고 생각해요.”

박 이사는 T사 쪽 라인으로 붙으라고 채근하지 않는다. 그는 나름 사람을 대하는 여유가 있고 직설적이지 않다. 전형적 유럽계 회사 출신의 성향이다. 하지만 과연 이런 스타일이 외국계 사모펀드 자본이 들어간 신생회사에서 통할 지는 의문이다. 합병 회사는 투자자들의 배당금을 챙겨주려고 앞으로 가시적인 실적에 대한 압박이 거세질 것이고 직원들을 숫자에만 신경 쓰게 만들 것이다. 온갖 인센티브 프로그램으로 유혹하기도 하고 숫자를 못 채울 때는 엄청난 압박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외국계 회사의 국내 대리점에 근무하면서 지켜본 수많은 외국계 회사들의 실상을 보고 느낀 점이다. 실적이 좋으면 굽신거리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조직은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한다. 실적이 좋으면 좋을수록 더 높은 목표를 부여한다. 조직의 생각은 개인이 뛰어난 역량으로 오더를 가져온다기보다는 고객이 회사의 가능성을 보고 최종 주문을 하며, 사람은 언제든지 부품처럼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정도는 나보다 업계 경험이 더 많은 박 이사가 더 잘 알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번에 지사장 교체 얘기가 있나요?”
“하하, 제이슨 과장님도 신경이 쓰이시나 봐요?”
“아무래도 그렇죠.”
“지난주에 미국 본사 CEO와 싱가포르 아태지역 영업 본부장이 지사장 예비 후보들과 줌으로 화상 면접했나 봐요. 코로나 때문에 한국에 못 들어오고 들어와도 2주간 자가 격리를 해야 되니 화상 면접으로 대체했다는 소문이…”
“그럼, 지금 지사장은 짤리는 건가요?”
“아뇨, 김 지사장도 면접 대상이라고 하던데요.”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동안, 차가 G전자에 도착했다.

미팅을 마치고 나는 회사로 돌아와 오늘 있었던 G전자 구매팀과의 미팅 미닛을 쓰고 있다. 영업팀의 박 이사가 지사장에게 간단하게 내부 보고를 하겠지만 오늘 미팅은 기술 및 마케팅 이슈들이 많아서 내가 자세히 본사 담당자에게 리포팅을 하고 박 이사를 포함한 유관 팀에 CC(참조)를 넣기로 했다. 오늘 구매팀과의 회의에선 단골 메뉴인 가격에 대한 인하 요청이 회의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거래 중인 주요 메모리 제품에 대해 매분기별로 10퍼센트씩 가격을 내려달라는 요청과 거기에 맞는 반도체 미세화 공정 계획 여부, 본사 전담 기술 엔지니어가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기술 세미나 개최할 수 있느냐는 다소 무리가 있는 요청이 주를 이뤘다. 미팅 미닛 작성에 집중하고 있는데 파티션 너머 저쪽에서 깔깔거리며 “굿! 나이스!”하는 소리가 들린다. 유 이사와 I사 출신 몇몇이 저녁 식사 후에 골프채로 자기 자리 주변에서 퍼팅 연습을 하고 있다. 합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 이사가 태연하게 혼자 퍼팅을 하자 박 이사가 회사에서 뭐하는 짓이냐, 면서 몇 번 제지했으나 몇 주 지나고 다시 시작하니 이제는 포기한 듯하다. I사는 자유로운 미국 회사인데다 파티션도 사람 키보다 높았고 독립된 공간이어서 퍼팅 연습도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앉아서 고개만 들면 다른 사람의 행동이 훤히 보이고 더구나 이제 막 합병된 신생회사에서 서로 튀지 않게 조심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는 지사장이 있어도 그런 자신의 행동에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다. 어떤 종류의 자신감일까?

미팅 미닛을 본사 담당자와 싱가포르 아태 마케팅 본부에 있는 나의 보스, 그리고 유관 부서에 보냈다. 한국은 비즈니스 규모가 작다. 그래서 본사와 직접 연락하면서 지원을 받는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동남아를 관할하고 있는 싱가포르 센트럴 마케팅 조직에 속하고 거기에 우선적으로 보고를 하는 게 원칙이다. 직속 상사가 눈앞에 없어도 한국 지사장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면서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일명 매트릭스 구조이다. 조직이 날실과 씨실이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어 항상 긴장해야 하고 방심은 금물이다.

혼자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 하고나서 퇴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박 이사가 내 자리로 찾아왔다.

“미팅 미닛, 정리 잘 했던데요.”
“별말씀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구매팀 오 부장님과 좀 전에 통화했는데 오늘 발표한 제품 로드맵을 PDF나 PPT 파일로 좀 보내달라고 하네요.”
“네, 어떻게 보내드릴까요?”
“과장님이 제게 메일로 보내주면 제가 오 부장님께 전달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미팅 미닛 작성한다고 식사도 못했을 텐데, 나가면서 저녁 겸 술 한 잔 해요.”
“아, 그럼 그럴까요.”

밖으로 나오니 6월이지만 신록의 기운이 다하고 서둘러 찾아온 이른 초여름 밤이다. 한반도가 뜨거워지고 이미 아열대 기후로 바뀌었다는 걸 입증이라도 하듯, 좀 전에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지더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비가 멎었다. 이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마케팅팀 직속 상사가 있는 싱가포르 ‘앙목교’라는 지역으로 출장을 갔을 때 만났던 비가 생각이 났다. 도착하자마자 세상 끝장 낼 듯한비가 오더니 어느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멈춰버리는 비. 그때 싱가포르에서 경험한 그 비는 1에서 0으로 찰나에 얼굴색을 바꿔버리는 ‘디지털 비’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았다. 반면에 한반도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를 지니고 있다고 어릴 적 학교에서 배웠었는데 이제 온탕과 냉탕만 오가는 이진법적인 기후로 바뀐 듯하다. 0과 1의 이진수로 대표되는 디지털 정보화 시대의 글로벌 선두 주자라서인가? 양 극단 기후 사이에 끼어 사색의 여유를 제공하던 아날로그적인 완충지대가 사라지고 있다. 몸이 적응할 시간을 주지 않는 삭막함과 피곤함이, 찌든 도시 한복판 신논현역을 끼고 있는 강남에도 쏟아진다.

박 이사와 나는 길 건너 ‘원주 추어탕’으로 향했다. 주변에 고층 빌딩이 들어서든 말든 수십 년을 고집스럽게 추어탕만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다. 위치도 좋아서 당장 내놔도 부동산 시세도 엄청날 텐데…. 남모를 이유나 비밀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하여간 뭔가 고집스럽게 한 분야만 파는 모습이 보기 좋다.

길 건너 식당에 도착하니 출입구 쪽에 양동이가 하나 놓여져 있다. 큰 수조에서 앞으로 자신의 생에서 일어날 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유유히 헤엄치는 횟감용 물고기와는 달리, 그 안에는 수십 마리의 미꾸라지가 치열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 해감을 위해 뿌린 소금 때문인지 입에 거품을 물고 버둥거린다. 입 속에 있는 진흙과 유기물 등 찌꺼기를 뱉어 내게 만드는 과정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 바닥에는 미꾸라지 세척을 위한 호박잎이 깔려 있다. 호박의 가실가실한 털이 미꾸라지 살과 맞대어져 몸에 묻은 이물질과 더러운 때를 벗겨준다. 자기들끼리 서로 치받으며 상하좌우로 뒤집는 미꾸라지의 역동적인 몸부림을 볼 때 사람이 세척을 위해 별도로 치댈 필요는 없어 보인다. 순간, 새로 뽑히게 될 지사장의 미래가 연상이 된다. 대기업 출신이든 누구든 주어진 매출을 달성하기 위해 그도 몸부림을 칠 것이다. 기존의 쌓아둔 자신만의 훌륭한 인맥이나 뛰어난 기술력을 토해 내고 탈탈 털릴 것이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입증하고 고액 연봉의 당연성을 본사에 보여주기 위해서, 궁극적으로는 생존을 위해 몸부림 칠 것이 분명하다. 본사는 한국 지사에 판을 깔아주고 소금만 한 줌 뿌려주면 된다. 찌지고 볶고 토해내는 것은 미꾸라지들의 몫이니까.

식당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전복 추어탕 어때요? 더운데 몸보신도 하고 소주도 한 잔 하면서 스트레스도 확 풀어버립시다.”
“네, 좋습니다.”
“그런데, 아까 유 이사가 퍼팅 연습할 때 신경 쓰이지 않았어요?”
“솔직히 회사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회사가 놀이터도 아니고….” 갑자기 속에 응어리진 뭔가가 치받기 시작했다.
“내가 일전에 한바탕 했는데도 말 안 듣고 계속 그러니…. 나 원 참!”
“참! 이사님, 이번 지사장 면접 결과가 나왔나요?”
“싱가포르 쪽 영업 본부 라인을 통해서 알아보니 의외로 현 지사장이 유력하다는 소문이 있어요.”
“네? 지금 지사장은 ‘레임덕’에다 ‘갈참’ 아니었나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유 이사가 손을 쓴 것 같아요.”
“네,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있죠?”
“지사장 후보들이 대기업 임원 출신이거나 전·현직 외국계 회사 지사장들이 대거 지원 했다고 해요. 본사 입장에서는 서로 박빙의 상황에서 뚜렷하게 눈에 들어오는 지사장 후보도 없고 그렇다고 마찬가지로 후보인 지금의 지사장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해서 본사 CEO가 유 이사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나 봐요. I사 출신이라 유 이사를 모를 리 없잖아요. 유 이사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현 지사장은 자기 손에 떡 주무르듯이 다룰 수 있다는 계산에서 현 지사장을 엄청 띄워줬다, 라는 소문이 있어요.”

어쩐지 유 이사가 회사에서 기세등등하게 다니면서 저녁에 사내에서 퍼팅하는 꼴불견을 보고도 지사장 이하 아무도 참견을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러면서 자기 사람을 많이 확보하고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하는 것도 자신의 영향력을 키워 지사장이 무시하지 못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하려고 하는 수작임이 분명했다.

“한마디로 꼭두각시를 키우는 거네요.”라고 내가 말했다.
“그런 셈이죠.”

내가 뭔가 말하려는 순간, 박 이사 핸드폰 벨이 울렸다. 지사장의 호출이다. 방금 미팅 미닛 내용 관련하여 회의를 하자며 나와 같이 지사장실에 바로 들어오라고 했다. 나와 같이 있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굴까? 나올 때 골프채를 들고 있던 유 이사와 마주친 눈빛이 뇌리를 스쳤다.

지사장실에 들어가니 유 이사가 구석에 다리를 꼬꼬 팔을 소파 등받이 윗부분에 쭉 펴서 걸친 채로 거만하게 앉아 있었다.

“아, 둘 다 앉아 봐요. 아니, G전자가 어떤 요구를 했다는 거예요. 미팅 미닛만 휙 보내면 다예요. 이런 중요한 사항은 구두 보고를 해줘야죠. G전자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지사장이 유 이사를 곁눈질하며 박 이사에게 따지듯 말했다. 내 얼굴은 본 척도 하지 않는다. 유 이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선다.
“아니, 구매 물량이 얼마나 되길래 분기당 10퍼센트나 내려달라는 거예요? 만약 본사에서 그렇게 내려주면 A전자는 가만히 있겠어요?”
“그냥 제 고객의 요청사항을 여기 마케팅의 제이슨 과장과 같이 가서 경청하고 싱가포르와 산호세 본사에 전달한 것 밖에 없습니다. 제이슨 과장이 작성한 상세한 미팅 미닛을 지사장님께 참조 넣어 드렸고요.”

결정적인 순간에 왠지 나를 물고 들어가는 듯해서 기분이 안 좋았지만 엄중한 분위기에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러자 그동안 외면하던 지사장이 자기 자리에서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제이슨 과장은 이런 중요한 내용을 이메일 참조만 넣으면 돼요? 내가 당신 직속상관이 아니라서 마음대로 하겠다는 건가요? 싱가포르에 당신 보스에게 그동안 봐온 당신의 행적을 낱낱이 말할 테니 각오하세요. 나를 아주 우습게 보는데 말이야.”
“대리점에서 온지 얼마 안 돼서, 외국계 회사 분위기 파악하는데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 같기도 하고….” 유 이사가 깐죽거렸고 이어서 지사장의 말이 이어졌다.
“하여튼 이왕 이렇게 된 거, 본사의 답변을 기다려 봅시다. 반응을 보고 다시 회의를 소집할 테니. 유 이사만 남고 다들 나가봐요.”

우리 둘은 다시 추어탕 가게로 돌아왔다. 박 이사가 음식 주문을 하고 소주부터 먼저 한 병 시켰다.

“유 이사님!” 나는 결기 가득한 목소리로 눈을 부릅뜨고 이름을 불렀다. 그는 나의 갑작스런 태도에 놀라 뒤로 빼며 움찔했다.
“네에 말씀하세요.”
“제가 일개 과장이지만, 이번 일을 막고 싶습니다. 이사님도 저와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야 사실 영업 쪽이 아닌 마케팅이고 저의 보스도 해외에 있어서 한국지사 내의 헤게모니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외국계 회사에 오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새로운 출발을 해야겠다는 다짐이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순간, 박 이사의 눈이 희번덕거리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렇죠! 외국계 회사의 대리점 계실 때 우리를 동경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까 보셨다시피 여기 현실은 이렇게 정치판입니다. 어디 가나 비슷하겠지만 나름 더 똑똑한 엘리트들이 모여 있다는 이곳이 진흙탕 머리싸움이 더 치열하죠.”

나는 그가 나름 더 똑똑한 엘리트, 라는 말이 대리점을 하대하는 듯해서 귀에 거슬렸지만 그냥 큰 맥락에서 이해하려고 했다.

“그래서 생각하시는 어떤 전략이라도 있으신지요?”
“사실, 본사에서는 어떻게 하면 한국의 대기업 A전자 비즈니스를 많이 가져올 수 있는가에 관심이 많아요.”
“아, 그렇겠군요.”
“하지만 A전자는 같은 자매사인 A반도체가 가격, 기술 등 모든 면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서 아쉬운 게 없죠. A반도체가 관심 없는 Low-End 제품, 즉 저가 제품에 좀 더 치중하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그 시장은 아시다시피 자잘한 업체들이 필사적으로 지키는 시장이라 경쟁이 치열해요.”

나는 박 이사의 논리적인 전개가 귀에 쏙쏙 들어오긴 했지만 사설이 좀 길다는 생각에 살짝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떤 구체적인 대안이 있나요?”
“제 생각에는 차라리 우리의 다양한 중저가 제품으로 공략할 수 있는 G전자에 우리의 리소스를 투입해서 진행한다면 승산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럼 토마스 이사님은 A전자보다는 G전자에 더 집중하고 G전자 영업을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지사장이 되었으면 한다는 건가요?”
“우와, 제이슨 과장님! 대단한데요.”
“이사님, 그러면 혹시 PS, ES과장 그리고 저까지 대리점 출신 세 명이 T사 출신 분들에게 합류한다면 도움이 될까요? PS와 ES는 제가 책임지고 우리 쪽으로 데려올 수 있습니다.”
“그래요?”
“저희 세 명이 합류하면 T사 성향의 인원이 52퍼센트가 됩니다. 아무래도 지원 인원이 많으면 이사님이 생각하는 계획에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물론 큰 도움이 되죠. 안 그래도 부탁을 드릴까 했어요. 지금 G전자와 비밀리에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 제이슨 과장님만 알고 계세요”
“네, 알겠습니다. 뭔데요?”
“아시다시피 G전자가 글로벌 가전시장 1위여서 TV, 세탁기, 냉장고 등 생산 물량이 엄청나잖아요?”
“네, 그렇죠.”
“G전자가 우리 회사를 전략적 공급 파트너로 선정해서 거기에 들어가는 메모리 상당 부분을 우리 회사에서 공급 받겠다는 내부 계획이 있어요. 그래서 G전자 구매 본부장인 김 부사장과 오 부장이 우리 회사 CEO와 내일 목요일 저녁에 온라인 화상 회의를 할 예정이에요. 구매팀에서 저에게 힘을 실어 주려고 저만 거기에 초대 받았어요. 마이클 지사장도 초대 못 받았는데 말이죠.”
“아, 그럼 내일 우리 한국지사 분위기를 말 하시면 되겠네요.”
“그렇죠, 바로 그거죠. 김 부사장님이 이렇게 큰 물량을 안정적으로 공급 받으려면 G전자 상황을 잘 아는 한국 지사의 지사장이 필요하다고 운을 띄우시면 제가 한국 지사의 전체 분위기를 말씀하신 52퍼센트 얘기를 곁들여서 할 생각입니다. 어때요?”
“아주 좋은데요. 박 지사장님! 하하하.”
“아이고, 그런 말씀 마세요. 아직. 하하하.”

그때 마침 전복 추어탕이 나왔다. 우리는 말을 잠시 멈추고 식탁에 추어탕이 놓일 공간을 분주히 마련하고,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추어탕에 들깨, 다진 마늘 등 풍미를 더할 양념을 넣으면서 소주도 한 병 시켰다.

금요일은 일주일의 피곤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날이다. 회사와 집 근처에서 혼자 술을 2차까지 마셨다. 자정이 다되어서 집에 와서 샤워를 하고 몽롱한 취기를 몸에 두르고 침대에 누웠다. 오늘 일을 떠올린다. 아, 결국 사람은 자기 살 궁리만 하는 존재구나, 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무리 계획이 좋아도 내 돈을 갖고 하는 사업이 아니라서 CEO도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고, 현금을 투자한 사모펀드가 A전자를 가져가지 않고는 미래가 없다며 심한 거부 의사를 밝혔다는 박 이사의 말들, 말들, 말들.

얼마 전에 TV에서 본 ‘향수’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비릿한 생선 가게에서 태어나 버려진 주인공은 눈보다 코로 느끼는 것이 편했다. 심지어 코로 보는 세상을 더 믿었던 주인공의 향기에 대한 탐닉. 골뱅이 캔에서 나온 냄새를 초파리도 거부할 수 없다. 냄새와 감에 의존해 날아가고 살아가고 붙고 빠지고 서로 닮은꼴로 살아간다.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꺼내 유튜브 앱을 열었다. 국내 메탈 밴드 ‘크래쉬’의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를 검색해서 에어플레이Airplay로 TV에 연결했다. 머리가 복잡하고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때 금속성의 강력한 헤비메탈 비트에 몸을 맡기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때론 질책하며 어느 순간 나를 잊어버린다. 그 과정에서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코로나 스파이크 단백질’처럼 깊이 박혀 있던 감정의 찌꺼기가 떨어지면서 새순 같은 힐링 에너지가 샘솟는다. 어느덧 밴드의 보컬이 포효하듯 거칠고 탁한 음색으로 질러대는 소리에 빠져든다. 거친 호흡으로 목을 긁어서 소리를 내는 그의 그로울링 창법을 최대한 흉내내며 가사를 따라한다. 마치 켜켜이 쌓인 하루의 스트레스 덩어리를 끌어올려 토해 내듯이…….

사는 대로 사네 가는 대로 사네 그냥 되는 대로 사네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네 인생 전부를 걸어 보고 싶은 그런,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그 나이를 처먹도록 그걸 하나 몰라!
그 나이를 처먹도록 그걸 하나 몰라!

이거 아니면 죽음, 정말! 이거 아니면 끝장, 진짜!
네 전부를 걸어 보고 싶은 그런,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술김에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곯아떨어졌고 눈을 떠보니 오전 10시 44분이다. 토요일 아침은 세상에서 누구에게도 침범받고 싶지 않는 가장 편안한 하루다. 머리맡에 둔 스마트폰을 손에 들었다. 포털사이트에 들어가서 실시간 검색어를 내려 보다가 언론사의 관심뉴스를 미리 설정해 둔 ‘MY뉴스’에 들어가 IT관련 뉴스를 살펴봤다. 우리 회사 관련 기사가 보여서 클릭했더니 ‘I&T 메모릭스, 현 지사장 마이클 김, 유임’이라는 기사가 떴다. IT신문에서 기자는 이례적으로 지사장과의 대담 내용을 실었다. 거기에는 현 지사장인 마이클 김 체제로 가면서 글로벌 탑티어 한국 업체인 A전자와 G전자에 대한 적극적인 영업 및 마케팅을 위해 유 이사와 박 이사를 담당 임원으로 선임해서 고객 지원 역량 강화 및 매출 증대를 도모할 것이다. 또한 그 둘은 우연찮게도 고등학교 및 대학교 동기로서 같은 전자공학과를 나온 친구이며 선의의 경쟁을 펼치며 회사의 매출 극대화를 위해 달려갈 것이다, 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그 기사를 접하고 등골이 오싹해지며 뭔지 모를 배신감이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새어나왔다.

“그래, 둘이서 다 해 처먹어라.”

극과 극은 통한다, 고 했던가? 하기야 Extremes meet, 라는 서양 속담에서 유래했으니 동·서양에서 모두 받아들여진 진리이다. 왜 이것을 몰랐을까? 그들은 눈앞에서 연극을 하면서도 뒤에서 따로 만나서 사람들을 분석하며 수군거렸을 것이다. 극과 극이 직접 통한다면 나 같은 불순물이 소통의 매개체로 할 역할이 없어진다. 반도체를 도체로 만드는 나의 역할이 없어지는 건 아닐까?

갑자기 가슴 속이 답답하고 갈증이 밀려와 냉장고 앞으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안에는 며칠 전에 넣어둔 골뱅이 캔과 물기가 빠져 약간 딱딱하게 굳은 국수사리가 눈에 들어온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 고 했던 ES가 떠오른다. 남들이 가는 길을 쉽게 갈 수 있는데 자신의 후각을 믿고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파리를 건져낸 골뱅이 캔의 커버가 살짝 열려 있다. 문득 내가 그 사이로 풍겨 나오는 비릿한 골뱅이 냄새에 멋모르고 뛰어든 건 아닐까, 기득권의 짜 맞춰진 세계에 무모하게 뛰어든 사회 초년생이 아닐까, 하는 자괴감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뭘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멀뚱히 서서 생각에 잠겼다. 냉장고 문을 오래 열어 두어서인지 ‘삐~삐~삐~삐’하면서 경고음이 ‘정신 차려, 이 친구야 예~예~예~예‘ 하는 노래 가사처럼 들렸다.

골뱅이가 반쯤 남아 있는 캔을 냉장고에서 꺼냈다. 캔에 담긴 골뱅이와 국물을 화장실 변기에 버렸다. 물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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