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 입사할 때 작문시험 제시어 '부자'가 떠올랐다.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인 경주 최부자 얘기를 쓰면서 노무현 정부 당시 양극화 문제와 연결지어 졸고를 냈다. 사회가 바뀌고 정권이 수차례 교체됐지만 그때 답안지에 적었던 최부자 가문의 규율은 현재 핵심 화두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고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민생), 흉년에 남의 논밭을 사지 말라(공정) 등이다. 1년 수확량의 3분의 2를 베풀던 이 집안은 일제에 나라를 뺏기자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바친다.
기존 체제를 뒤엎는 급진적 시도로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적 선동에는 반대한다. 겸손한 신중함을 추구한다. 미국 정치비평가 러셀 커크는 역작 '보수의 정신'에서 "보수주의자들은 무장한 교리와 이념의 통제에 저항한다. 비록 이 땅에 천국을 창조할 수는 없지만 이념에 사로잡히면 지구 상에 지옥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고 역설했다.
#탄핵 후 4년, 한국 보수의 처참한 몰락은 진행형이다. 코로나 사태와 부동산 대란으로 민심은 들끓지만 국민들이 보수에 마음을 열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 부정평가가 치솟는데도 내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국민의힘 자체조사에서 여당 여론조사 1위 인물과 야권 인사들을 일대일 대결로 붙여보니 이기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후문이다.
보수가 보수다워져야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정당 지지율, 인물난 따위는 결과일 뿐이다. 당장 인기를 끌 수 있는 이벤트나 정책, 새 얼굴 몇 명 내민다고 해결될 수준이 아니다. 민주화 이후 수십 년 간 곪아온 문제다. 시대와 호흡하는 정치를 치열하게 고민하기는커녕 박정희 산업화시대의 향수와 빨갱이 타령으로 용케 버텨오다가 계파 싸움으로 자멸한 대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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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가치, 근본부터 다시 세워야 한다. 공정과 민생, 복지, 약자보호는 원래 보수의 존립근거다. 공동체를 보호·발전시키기 위한 유연한 노력, 공동체에 헌신이야말로 보수의 원동력이다.
2020년 한국 공동체는 벼랑 끝에 섰다. 방역과 경제, 외교, 그리고 민주주의의 총체적 위기다. 누군가 악착같이 제 식구, 자기편만 챙길 때 보란 듯 자기를 던지는 결단이 이 나라를 지켜왔다. 달콤한 환상을 속삭이는 포퓰리즘의 유혹으로부터 공동체와 민주주의를 지켜줄 보수의 깐깐함이 간절하다. 보수가 건강하면 사이비 진보가 백주 대낮에 사슴을 말이라고 우겨대는 일도 감히 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