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면 떴는데...가치주 펀드 어쩌나

머니투데이 정인지 기자 2020.12.09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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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철 디자이너 / 사진=임종철 디자이너임종철 디자이너 / 사진=임종철 디자이너


#"펀드수익률이 부진한 것에 전적으로 동감하며 머리숙여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이채원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대표(당시 부사장)이 고객들에게 보낸 사과문이다. 글로벌 증시 충격에 많은 펀드들이 손실을 입었지만 이 대표는 대표펀드인 '한국밸류 10년투자' 운용보고서를 통해 "증시상황에 관계없이 고객들의 소중한 자산에 손실이 발생한 것은 전적으로 밸류운용의 잘못"이라고 밝혔다.

#2011년 유럽 재정위기 때는 허남권 신영자산운용 대표(당시 자산운용본부장)가 사과 편지를 보냈다. 그는 대표 펀드 중 하나인 마라톤펀드이 최근 1년간 수익률이 부진했다며 "대형 수출주 편중의 극심한 양극화가 원인"이라고 짚었다. 허 대표는 당시 "지난 15년간 여러 차례 고비를 겪었지만 투자의 일관성을 유지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며 "기존의 가치투자 철학을 유지하면서도 어떻게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개선시켜 나갈 것인가 계획을 수립했다"고 밝혔다.

가치주 펀드가 또다시 위기를 맞았다. 올해 대형 성장주 중심의 장세가 펼쳐지면서 가치주들이 소외를 받았다. '가치주는 기다리면 오른다'며 기다리던 투자자들도 환매에 나서면서 자금 유출이 수익률 악화를 부르는 악순환도 계속되고 있다.



9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오는 11일 우리나라 가치투자 1세대 매니저인 이채원 한국밸류자산운용 대표가 자진 사임한다. 가치투자를 표방하는 한국밸류자산운용은 그동안 증시 상황에 따라 성장과 침체를 반복해왔다. 이 대표는 최근 3~4년간 가치주가 고전을 하면서 성과 부진에 책임을 지고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 사임을 결정했다.

이 대표는 허남권 신영자산운용 대표와 함께 대표적인 가치투자자다. 이 대표와 허 대표는 2012년~2014년 각각 대표펀드인 '한국밸류10년투자'와 '신영밸류고배당' 수익률을 크게 끌어올리면서 '가치주 붐'을 일으켰다. 2012년 한국밸류10년투자는 수익률이 20.81%에 달했고, 신영밸류고배당은 16.64%를 기록해 국내 주식형 펀드 평균 수익률 6.32%를 크게 웃돌았다.



두 펀드에 자금도 몰리면서 한국밸류10년 투자펀드는 2013년 설정액이 1조원을 돌파, 2014년 신영밸류고배당은 설정액이 3조원을 넘겼다. 금융위기 이후 최대 '공룡펀드'다. 2017년 이 대표와 허 대표는 나란히 대표로 승진하면서 대형 운용사의 사장까지 올라섰다.

그러나 가치주는 다시 한번 침체 위기를 맞고 있다. 2015년 이후 줄곧 성장주가 주목 받으면서 수익률 침체와 함께 자금 이탈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밸류10년투자는 최근 5년간 1조원이 빠져나가면서 운용규모가 3252억원으로 급감했다. 신영밸류고배당도 5년간 1조3211억원이 환매되면서 운용규모가 1조8094억원으로 줄었다.

'매니저가 사과하면 가치주는 오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가치주 투자자들은 장기 투자에 익숙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금이 줄이탈 하는 것은 가치 투자에 대한 회의감이 커진 탓이다.


가치주 펀드 부진의 원인으로는 과대했던 설정액과 개인들의 직접 투자 증가 등이 꼽힌다.

투자 자금이 조단위를 넘어가면서 운용의 효율성이 떨어졌다는 지적이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해외에서는 펀드 규모가 일정금액 이상을 넘어가면 소프트클로징(잠정 판매 종료)를 하거나 투자자들이 기피하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그는 "설정액이 1조원을 넘긴 공룡펀드는 흥행에서는 성공했지만 높은 수익률을 유지하기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운용 규모가 컸던 만큼 자금 유출도 컸다는 점도 악영향을 줬다. 펀드 환매가 시작되면 자산운용사는 보유 주식을 팔아 투자자들에게 현금을 돌려줘야 한다. 자산운용사의 매물이 주가 하락을 부추기고 이는 수익률 악화로 이어진다.

올해 개인투자자들의 직접 투자가 급증하면서 '오르는 주식만 오르는' 대형주 장세가 이어진 점도 타격이었다. 가치투자는 보통 '기업가치에 비해 주가가 낮은 주식'을 매수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비싼 주식을 더 비싸게 사는' 최근의 장세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1~2개월간 경기 회복 기대감에 가치 경기민감주가 상승하면서 펀드의 수익률도 향상되고 있지만 떠나간 투심을 잡기에는 부족하다. 신영밸류고배당C의 1개월 수익률은 10.95%, 6개월 수익률은 18.42%로 올라섰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투자자 이탈은 비단 가치주 펀드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성장주 대표 펀드인 한국투자네비게이터1의 경우에도 최근 5년간 설정액이 8628억원이 감소해 '1조 펀드'의 이름을 내려놓았다. 현재 운용 규모는 3217억원이다. 이 펀드의 최근 1년 수익률은 34.84%로 양호한데도 올해에도 1219억원이 빠져나갔다.

사모펀드가 활성화되면서 자산운용업계 전반적으로 대표 매니저들이 대거 퇴사한 데 반해 ETF(상장지수펀드)와 같은 패시브 투자나 직접 투자가 활성화 됐기 때문이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맥쿼리 인프라의 경우 공모 펀드인데도 불구하고 '투자 회사형'이기 때문에 장내에서 자유롭게 매매가 가능하다"며 "일반 주식형 펀드도 액티브 ETF 등을 활용해 거래가 쉽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투자 회사형'의 경우 법인격(회사)로 인정받아 일반 종목 상장과 동일한 방법으로 매매되고 있다. 반면, '투자 신탁형'인 일반 펀드들은 증시에 상장돼도 기타 수익증권으로 분류돼 일반 투자자들이 HTS(홈트레이딩서비스) 등에서 종목 창에서 검색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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