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세지는 ESG의 'E' 압박, 통관도 거부당한 日 소니

머니투데이 황국상 기자 2020.12.0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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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새로운 10년 ESG] <23>-② 법보다 강한 '투자자 압박'…기후변화 리스크 재무제표 공시 의무화 움직임

편집자주 ESG(환경, 사회적책임, 지배구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ESG 친화기업에 투자하는 글로벌 자금은 30조 달러를 넘어섰고, 지원법을 도입하는 국가도 생겨났습니다. ESG는 성장정체에 직면한 한국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단이자 목적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2020 새로운 10년 ESG’ 연중기획 기획을 통해 한국형 자본주의의 새 길을 모색합니다.

(서울=뉴스1) 박정호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이 27일 오전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2050 탄소중립 범부처 전략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2020.11.27/뉴스1(서울=뉴스1) 박정호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이 27일 오전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2050 탄소중립 범부처 전략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2020.11.27/뉴스1


국민연금이 기후변화 관련 기업 대응을 촉구하는 투자자 그룹인 AIGCC(기후변화 관련 아시아 투자자 그룹)에 가입하며 환경 관련 대응에 본격 나설 것을 시사했다. 이는 E(환경)과 관련한 압박이 규제 형태로 한층 가시화되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투자자들이 나서서 기업에 압박을 가하는 모습도 올해부터 본격화됐다. 올 1월 운용자산 8조달러 규모의 세계 1위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CEO(최고경영자)가 블랙록의 투자대상 기업 CEO들에게 기후변화 관련 리스크를 재무제표에 반영해 공시하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투자금을 회수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발송한 바 있다.



운용자산 3조5000억달러 규모의 세계 3위 자산운용사 SSGA(State Street Global Advisors)도 ESG 기준을 밑도는 기업에 ESG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내면서 올해부터는 의결권 행사 등 주주총회 개입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는 내용을 통보하기도 했다.

규제로 바뀌는 ESG, 그 중심에 있는 ‘E’
한 때 ‘ESG’는 ‘착한 투자’ ‘착한 경영’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는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규범으로 성격이 변하고 있다. ESG가 리스크 관리 전략의 핵심으로 자리잡으면서 생겨난 일이다.



상대적으로 E(환경)는 S(사회)나 G(지배구조)에 비해 리스크 요인의 계량화 및 사후관리가 쉬어 규제 형태로 가장 빨리 변모한 영역이다. 석탄·석유 등 화석연료나 전기 소비량을 통해 기업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직·간접적으로 계산하는 방식은 수십 년을 거치며 정교해졌다. 이에 근거해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나 탄소세 등 각국 상황에 맞는 규제가 가시화됐다.

E와 관련한 압박이 무역장벽의 형태로도 나타난 것은 이미 오래 됐다. 1995년 1월 WTO(세계무역기구) 출범 후 지금껏 26년에 걸쳐 관세 등 전통적 수단을 활용한 무역장벽은 당사국 사이의 WTO 제소 등을 통해 번번히 허물어졌지만 ‘환경’을 명분으로 내세운 무역장벽은 공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2001년 일본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게임기 130만여대가 중금속 기준 미충족을 이유로 통관이 거부돼 2000억원 가량의 손실을 입었던 것이 대표적이다.

거세지는 ESG의 'E' 압박, 통관도 거부당한 日 소니

TCFD 등 포괄적 기후규제 확산 본격화
보다 광범위한 형태의 환경 규제도 곧 가시화될 조짐이다. E 중에서도 특히 기후변화와 관련해서다. 금융 등 제조업 이외의 산업까지 동원하는 포괄적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점에서 그 무게가 다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대표적으로 G20(주요20개국)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회의 산하 협의체 FSB(금융안정위원회)의 TCFD(기후변화 관련 리스크의 재무제표 공시를 위한 태스크포스팀) 권고안을 꼽을 수 있다.

TCFD는 “현재와 200~300년전 산업혁명 이전 시기의 지구 평균 기온차를 2도(2℃) 이하로 줄여야 한다”는 2015년 파리기후협약 합의(2℃ 시나리오)를 달성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조직이다. 온실가스 배출권 가격의 상승에 따른 부담금 증가를 비롯해 대규모 홍수 등 기후재해로 인한 공장폐쇄 가능성 등 기후변화와 관련한 제반 리스크를 금액으로 환산, 재무제표에 공시토록 하는 권고안을 이미 2017년 6월에 내놨다.

현재는 권고안에 불과하지만 점차 규정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영국 금융행위감독청은 TCFD 권고안을 기준으로 주요 상장사에 의무적으로 기후변화 관련 리스크를 2025년부터 공시토록 했다. 영국에 본사를 둔 기업 뿐 아니라 영국 증시에 상장된 외국기업에까지 이 규정이 적용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DR(주식예탁증서) 형태로 런던에 상장한 한국 기업도 관련 정보를 공시해야 한다.

물론 아직까지는 모든 G20 회원국들이 영국처럼 TCFD 권고안을 자국 규정으로 만들지는 않고 있다. 미국은 2018년 TCFD 권고안에 따른 규제를 마련해 달라는 기관투자자 요구에 대해 ESG 공시가 기업의 약점을 노출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이같은 요구를 거부한 바 있다. 일본에서도 TCFD 권고안의 법제화 여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TCFD 권고안이 각국 규제로 구체화 되는 것은 이미 대세가 됐다. 기후변화의 재무영향을 비교 가능한 형태로 만들기 위한 기준이라는 점에서 권고안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탓이다. 주요 기업들의 경영활동과 기관들의 투자가 국경을 넘어 글로벌 시장에서 전개되고 있는 만큼 기후변화 리스크에 대한 계량적 평가 역시 표준화될 필요가 있다는 이유에서 TCFD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크다.

(서울=뉴스1) 안은나 기자 = 21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에서 열린 기후위기비상행동 '1.5도를 지키는 동네방네 기후행동 in 서울'에서 참가자들이 과감한 2030년 온실가스 감축과 2050년 배출제로를 촉구하며 다이인(Die-in)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2020.11.21/뉴스1(서울=뉴스1) 안은나 기자 = 21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에서 열린 기후위기비상행동 '1.5도를 지키는 동네방네 기후행동 in 서울'에서 참가자들이 과감한 2030년 온실가스 감축과 2050년 배출제로를 촉구하며 다이인(Die-in)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2020.11.21/뉴스1
“한국은 룰팔로워, 룰세터가 아니다”
국내에서도 TCFD 도입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은 FSB 및 G20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의 회원국으로 관련 논의에 참여한 바 있다. TCFD 권고안을 구체화하기 위해 주요국 59개 중앙은행·금융감독기관이 모인 협의체인 NGFS(중앙은행·금융감독기관 녹색금융 네트워크)에도 한국은행이 참여하고 있다.

지난 5월에는 환경부가 국내 정부부처 중 최초로 권고안에 대한 공식 지지를 선언했고, 10월에는 한국거래소가 증권유관기관 중 최초로 TCFD 지지를 선언했다. 이 때문에 권고안이 국내에도 법규 형태로 도입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관측이다.

우려를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올해처럼 코로나19(COVID-19)로 경제 전반에 걸친 충격으로 기업들이 어려워 하는 상황에 기후 이슈로 재차 부담을 주는 게 옳은지에 대한 지적이다.

그러나 세계 경제의 일원으로서 전방위적으로 진행되는 기후압박 흐름에서 벗어날 방도는 없다. 은행·보험·연기금 등 기관투자자를 중심으로 글로벌 차원의 환경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결성된 UNEP FI(유엔환경계획 금융 이니셔티브) 한국대표를 맡고 있는 임대웅 에코앤파트너스 대표는 올 초 머니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아쉽게도 한국은 글로벌 차원의 규제가 만들어지고 이행되는 과정에서 ‘룰 세터’(Rule Setter, 규칙을 제정하는 자)가 아니라 ‘룰 팔로워’(Rule Follower, 규칙을 따르는 자)로서의 위상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또 “국내 버전 규제가 만들어지고 있지 않는 상태임에도 세계 무대에서 활동 중인 우리 기업들은 이미 압박을 체감하고 있을 것”이라며 “지금 바로 기후경제로의 체제변화를 하더라도 결코 빠르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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