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만나는 북한 문화유산] ⑦ 묘향산 보현사

뉴스1 제공 2020.11.28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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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최대 사찰로 많은 역사 유적 보유
사찰 활용한 종합박물관으로 변모

[편집자주]북한은 200개가 넘는 역사유적을 국보유적으로, 1700개 이상의 유적을 보존유적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지역적 특성상 북측에는 고조선과 고구려, 고려시기의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지난 75년간 분단이 계속되면서 북한 내 민족문화유산을 직접 접하기 어려웠다. 특히 10년 넘게 남북교류가 단절되면서 간헐적으로 이뤄졌던 남북 공동 발굴과 조사, 전시 등도 완전히 중단됐다. 남북의 공동자산인 북한 내 문화유산을 누구나 직접 가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하며 최근 사진을 중심으로 북한의 주요 문화유산을 소개한다.



(서울=뉴스1) 정창현 머니투데이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장 = 서산대사 휴정은 우리나라 대표적 네 산을 평하여 "금강산은 수려하나 장엄하지 못하고(秀而不壯), 지리산은 장엄하나 수려하지 않으며(壯而不秀), 구월산은 장엄하지도 수려하지도 못하고(不壯不秀), 묘향산은 장엄하면서도 수려하다(亦壯亦秀)"고 하며 묘향산을 조선 4대 명산의 으뜸으로 꼽았다. 휴정 스스로가 묘향산을 근거지로 활동하기도 했다.

만폭동 계곡에서 본 묘향산. 이 계곡길을 더 오르면 단군의 전설이 전해오는 단군대와 단군사(檀君祠, 단군굴)가 나온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만폭동 계곡에서 본 묘향산. 이 계곡길을 더 오르면 단군의 전설이 전해오는 단군대와 단군사(檀君祠, 단군굴)가 나온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


묘향산에는 불교, 도교, 민간신앙의 흔적과 전승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고려 때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단군이 탄생한 민족의 영산(靈山)으로 인식됐다. 또한 묘향산은 고려 때부터 선승들의 수도처로 이름이 높았고,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휴정이 일으킨 승병의 근거지가 되면서 더욱 명성을 떨치게 됐다.



묘향산에는 7세기경부터 사찰들이 건설되기 시작했고, 그 중 대표적인 사찰이 보현사다(국보유적 제40호). 현재 보현사 경내에 남아 있는 보현사비의 기록에 따르면 1028년(현종 19) 승려 탐밀(探密)이 묘향산에 안심사라는 절을 세웠고, 그의 조카이자 제자인 굉확(宏廓)이 1042년(정종 8) 243칸 규모의 보현사를 세웠다고 한다. 이와 달리 또 다른 기록에는 968년 안심사가 창건됐고, 굉확법사가 982년(성종 1)에 보현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창건 이후 보현사는 여러 차례 중건됐고, 현재 남아 있는 대웅전과 만세루 등은 6·25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된 후 1970년대에 복원된 것이다. 보현사란 이름은 실천·행동·도덕 등을 관장한다는 보현보살(普賢菩薩)에서 따온 것이다. 북한은 1947년 5월 보현사 전체를 '묘향산력사박물관'으로 지정해 현재까지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박물관에는 보현사 뿐만 아니라 금강산에 있던 유점사종 등 수많은 유물과 유적이 옮겨져 보관 전시되고 있다.

평양-향산고속도로 옆으로 보이는 청천강의 상류.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평양-향산고속도로 옆으로 보이는 청천강의 상류.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
평양에서 보현사까지는 차로 2시간 정도 걸린다. 평양-향산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이 612년(영양왕 23) 중국 수나라의 군대와 맞서 대승을 거둔 살수대첩의 현장인 청천강을 볼 수 있다.


보현사는 5만여 평방미터의 부지에 남북 축으로 1전(대웅전)-2탑-1루(만세루)-3문(조계문·해탈문·천왕문)의 형식을 갖추고 동서 축으로 만수각, 관음전, 영산전과 수충사, 팔만대장경보존고가 자리 잡고 있다. 또한 경내에 다라니석당과 종각이 옮겨져 관리되고 있다.

2007년 5월 보현사 해설강사가 ‘묘향산문화유적안내도’ 앞에서 보현사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2007년 5월 보현사 해설강사가 ‘묘향산문화유적안내도’ 앞에서 보현사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
보현사 해탈문과 천왕문. 조계문부터 대웅전까지 전각들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보현사 해탈문과 천왕문. 조계문부터 대웅전까지 전각들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
보현사 조계문. 관서지방의 사찰을 모두 관장하는 지위에 있음을 알려주는 ‘관서총림규정문(關西叢林糾正門)’이란 편액을 걸려 있다.(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보현사 조계문. 관서지방의 사찰을 모두 관장하는 지위에 있음을 알려주는 ‘관서총림규정문(關西叢林糾正門)’이란 편액을 걸려 있다.(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
관서지방의 사찰을 모두 관장하는 지위에 있음을 알려주는 '관서총림규정문(關西叢林糾正門)'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 조계문을 들어서면 보현사비(1141년), 보현사중건비(1788년), 묘향산보현사사적비(1739년), 보현사향불답비(1701년), 보현사령산전불답비(1749년) 등 보현사역사를 기록한 많은 비석들이 서 있다.

그중 보현사비(국보유적 제144호)는 보현사의 연혁을 기술한 사적비로 1141년(고려 인종 19)에 세웠다. 높이 2.45m, 너비 1.1m, 두께 0.12m이다. 비신 앞면 윗부분에 인종의 글씨로 새긴 '묘향산보현사지기'(妙香山普賢寺之記)라는 제액이 있고, 그 아랫부분과 뒷면에 보현사의 내력을 적은 1200여 자의 비문이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한 김부식(金富軾)이 짓고, 문공유(文公裕)가 썼다.

보현사의 역사를 기록한 여러 비석들. 조계문과 해탈문 사이에 모아져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보현사의 역사를 기록한 여러 비석들. 조계문과 해탈문 사이에 모아져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
2007년 5월 보현사 해설강사가 보현사비(普賢寺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보현사의 내력을 기록한 보현사비는 1141년에 세워졌으며, 김부식(金富軾)이 내용을 썼다.(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2007년 5월 보현사 해설강사가 보현사비(普賢寺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보현사의 내력을 기록한 보현사비는 1141년에 세워졌으며, 김부식(金富軾)이 내용을 썼다.(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
보현사 해탈문에서 본 천왕문.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보현사 해탈문에서 본 천왕문.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
보현사비를 뒤로 하고 해탈문과 천왕문을 지나면 4각9층탑(국보유적 제7호)과 만세루가 나온다. 1044년(고려 정종 10)에 건립된 9층 석탑이다. 화강암을 정교하게 다듬어 만든 사각형의 탑으로 화강암으로 된 장대석 여러 개를 결구한 지대석 위에 2층 기단을 올리고, 그 위로 9층의 탑신석을 쌓은 후 꼭대기에 상륜을 장식했다. 지대석 한 변의 길이는 3.55m이며, 탑의 전체 높이는 6m이다. 위층 탑신석들보다 높게 올린 1층 탑신 남쪽 면에는 네모난 감실이 있다. 예전에 이 불감 속에 다보여래가 안치되어 있었다고 해 다보탑이라고도 한다. 1층 감실 뒷면에는 탑을 세우게 된 내력과 목적이 명문으로 새겨져 있다.

천왕문에서 본 보현사 4각9층탑과 만세루. 만세루는 6.25전쟁 때 파괴돼 1979년에 복원됐고, 4각9층탑은 1962년에 복구됐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천왕문에서 본 보현사 4각9층탑과 만세루. 만세루는 6.25전쟁 때 파괴돼 1979년에 복원됐고, 4각9층탑은 1962년에 복구됐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
보현사 천왕문의 천장과 사천왕상.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보현사 천왕문의 천장과 사천왕상.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
1979년에 복원된 만세루를 지나면 보현사 8각13층탑(국보유적 제143호)과 대웅전이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다. 고려 후기에 세워졌으며, 화강석으로 만든 석탑으로 높이가 8.58m이다. 3단의 지대석 위에 단층기단, 13층의 탑신부, 상륜부로 구성된 다각다층석탑이다. 지대석과 기단의 장식이 화려하고 상륜부를 금속으로 장식한 점이 특이하며, 고려시대의 석탑으로서는 층수가 가장 많으면서도 그 형태가 완전한 탑이다.

8각으로 된 매층 옥개석은 각각 2단씩의 옥개받침이 있고 추녀 끝마다 풍경이 104개 달려 있다. 80개의 풍경이 달려 있는 오대산 월정사의 팔각구층석탑을 연상시킨다. 이곳의 김영숙 해설강사가 믿기 어려운 일화를 하나 들려줬다.

"보현사는 서산대사가 임진왜란 당시 73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킨 장소로 유명하단 말입니다. 하루는 서산대사가 낮잠을 자고 있는데 석가탑(8각13층탑)의 방울들이 '왜란 왜란 왜란'하고 울려 잠을 깼더란 말입니다. 종소리에 왜적들이 쳐들어온 것을 알게 되고 전국의 승려들에게 격문을 보내 승의병을 조직해 평양성 전투를 진두지휘하고 승리로 이끌었단 말입니다. 보현사의 종은 역사적인 순간에 울려 사람들에게 의로운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답니다."

보현사 대웅전과 8각13층탑. 대웅전은 6.25전쟁 때 파괴된 것을 1976년에 복원한 것이고, 8각13층탑은 1962년에 보수됐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보현사 대웅전과 8각13층탑. 대웅전은 6.25전쟁 때 파괴된 것을 1976년에 복원한 것이고, 8각13층탑은 1962년에 보수됐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
일제강점기 때 보현사 대웅전과 8각13층탑. 보현사에는 원래 24채의 전각이 있었데, 6.25전쟁 때 관음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불탔다. 8각13층탑의 상륜부도 지금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일제강점기 때 보현사 대웅전과 8각13층탑. 보현사에는 원래 24채의 전각이 있었데, 6.25전쟁 때 관음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불탔다. 8각13층탑의 상륜부도 지금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
대웅전은 전쟁 때 파괴돼 1976년에 복원됐다. 대웅전에는 현재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석가여래와 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의 오른쪽에 관음전(국보유적 제57호)이 있다. 관음전은 조선 초기에 다시 지은 건물로, 1894년에 고쳐지었다. 6·25전쟁 때도 파괴되지 않아 현재 보현사의 전각 중에서 가장 오래 된 것이다. 이 건물은 큰 부엌 칸과 여러 개의 온돌방이 덧붙어있어 주로 승려들이 생활하던 곳으로 보인다.

보현사 관음전. 조선 초기에 중건한 건물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보현사 관음전. 조선 초기에 중건한 건물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
관음전의 동쪽에 나란히 영산전(국보유적 제141호)이 서 있다. 원래 보현사 동쪽 500m 지점에 있던 것을 1983년 현재 위치로 옮겨 왔다. 지금의 건물은 1875년(조선 고종 12)에 다시 지은 것이다. 예로부터 이 영산전에서 불공을 올리면 특히 영험이 있다고 하여 참배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고 한다. 보현사 안의 주요 전각의 처마는 짧은 서까래를 덧댄 부연(婦椽) 형태로 지어져 있다.

보현사 영산전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보현사 영산전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
보현사 영산전 편액과 내부 모습.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보현사 영산전 편액과 내부 모습.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
관음전과 영산전을 지나면 서산대사와 사명당·처영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수충사(국보유적 제143호)가 있다. 조선 정조 때 서산대사를 기려 세운 사당이다. 수충사 앞 쪽에 새로 지은 팔만대장경 보관고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 해인사 팔만대장경으로 찍은 판본을 비롯해 여러 불경들이 소장돼 있다. 이 유물들은 6·25전쟁 때 묘향산 비로봉 밑 금강암으로 옮겨 보관해 소실되지 않았다고 한다.

서산대사와 사명당, 처영의 영정을 모신 수충사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서산대사와 사명당, 처영의 영정을 모신 수충사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
팔만대장경의 인쇄본과 경전들이 보관돼 있는 팔만대장경보관고 외부 모습.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팔만대장경의 인쇄본과 경전들이 보관돼 있는 팔만대장경보관고 외부 모습.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
팔만대장경 보존고를 둘러보고 입구 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다리니석당(陀羅尼石幢, 국보유적 제59호) 하나가 서 있다. 다라니석당이란 다라니불경을 돌에 새겨 기둥처럼 세워놓은 돌구조물을 말한다. 이 석당은 원래 평안북도 용천군의 불정사라는 옛 절터에 있었는데, 1987년 이곳으로 옮겼다. 6각형 석주에는 '대불정다라니당(大佛頂陀羅尼幢)'이라고 쓴 제목과 2388자의 범어로 된 경문을 음각해 놓았다. 이 석당은 고려시대 석당의 전형적인 형식이며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당 가운데 걸작품으로 평가되고, 당시의 수준 높은 조각술과 건축술을 보여준다. 석당의 높이는 6.23m이다.

평안북도 평천군 불정사터에서 옮겨 온 성동리다리니석당. 고려 초기의 건축술과 조형미를 보여주는 독특한 형태의 석탑 중 하나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평안북도 평천군 불정사터에서 옮겨 온 성동리다리니석당. 고려 초기의 건축술과 조형미를 보여주는 독특한 형태의 석탑 중 하나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
성동리다리니석당을 지나 절 입구 쪽에 조그만 종각이 있고, 이 안에 유점사 종(국보유적 제162호)이 걸려 있다. 1469년(조선 예종 1년)에 처음 제작되었고, 1729년(영조 5)에 처음 것보다 크게 주조했다고 한다. 원래 강원도 금강산의 최대 사찰인 유점사(楡岾寺)에 있던 것을 유점사가 6·25전쟁 때 폐사되자 보현사 경내로 옮겨왔다.

금강산 유점사에서 옮겨온 유점사(楡岾寺) 동종(銅鐘)과 종각 전경. 1729년에 다시 주조된 동종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금강산 유점사에서 옮겨온 유점사(楡岾寺) 동종(銅鐘)과 종각 전경. 1729년에 다시 주조된 동종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
호텔에서 한 굽이 돌아가면 밝고 산뜻하게 지은 야영소가 있다. 평양시 학생소년들의 야영생활을 조직하는 '과외교양지'이다. 해마다 4월부터 11월까지 1만여 명의 학생들이 와서 야영생활을 한다. 보현사를 방문할 때마다 직장이나 단체별로 이곳을 찾은 주민들도 만날 수 있었다. 매일 1000여 명의 주민들이 보현사역사박물관을 참관한다고 한다. 이들은 보현사를 둘러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2003년 8월 직장, 학교별로 보현사를 방문해 대웅전을 둘러보고 있는 북한 참관객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2003년 8월 직장, 학교별로 보현사를 방문해 대웅전을 둘러보고 있는 북한 참관객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1.28.©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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