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명 집단변사 '오대양 사건'…인자했던 사장 박순자의 충격적 실체

머니투데이 류원혜 기자 2020.11.27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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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양 공예품 공장 대표 박순자./사진=온라인 커뮤니티오대양 공예품 공장 대표 박순자./사진=온라인 커뮤니티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오대양 집단 변사 사건'이 재조명됐다. 이 사건은 1987년 8월29일 경기도 용인의 오대양 공예품 공장에서 사장 박순자와 가족, 종업원 등 32명이 변사체로 발견된 사건이다.



지난 26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에서는 대전 서부경찰서에서 한 기자가 목격했던 이야기가 소개됐다. 당시 기자는 직장동료 사이이던 20~30대의 청년 13명이 중년 부부를 창고에 가두고 12시간 집단 폭행한 현장을 봤다고 했다.

앞서 한 중년 부부의 큰 딸은 공예품 회사에 비서로 입사한 뒤 동생들을 추천했고, 7남매가 모두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중년 부부는 1987년 이 회사에 5억원을 투자했다. 이 회사는 대전에 본사를 두고 용인에 또 다른 공장을 둔 금속공예품 만드는 전도유망한 회사였다.



회사 사장은 자수성가한 여성 사업가 박순자였고, 남편은 도청의 고위 공무원이었다. 박순자는 직원들의 자녀를 위한 학사를 무료로 지원하는 등 복지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또 부모 없는 아이들을 위한 최고급 보육 시설도 지었다. 박순자의 회사는 지역사회에서 '꿈의 직장'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한편 돈이 필요해진 중년 부부는 투자금을 돌려받고자 했다. 하지만 큰딸은 "사장님과 직접 이야기해 보라"며 부모를 회사로 불렀고, 중년 부부는 그 길로 회사에 감금돼 폭행을 당했다. 큰딸과 사위가 폭행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부부는 5억원을 돌려받지 않겠다는 포기각서를 쓰고 간신히 풀려났고, 경찰에 신고했다.

이후 박순자는 직원 13명과 참고인 자격으로 경찰 조사를 받던 중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 하지만 박순자는 병원에서 자신의 세 자녀와 함께 행방불명됐다. 문제는 이들뿐 아니라 박순자가 운영하던 보육원 아이들과 회사 직원들 등 총 80여명이 한꺼번에 자취를 감춘 것.


박순자의 남편은 실종자들을 찾기 위해 대전 공장으로 향했고 사라진 80여명 중 공장 창고에 숨어있던 49명을 찾아냈다. 하지만 나머지 실종자들을 찾지 못해 용인 공장으로 발걸음을 돌려, 공장을 지키고 있던 식당 아주머니를 추궁했다. 식당 아주머니는 처음에는 입을 굳게 다물었지만 실종 닷새째 되던 날인 8월29일 오후 1시에 결국 "공장에 찾으시는 분들이 있다"고 실토했다.

이후 박순자의 남편은 공장의 천장 위 조그만 구멍 사이로 속옷만 입은 채 목을 맨 공장장 최씨를 발견했다. 최씨 주변에는 목이 졸린 흔적이 남은 총 31구의 시신이 더 있었다. 박순자 사장과 자녀 셋도 포함돼 있었다.

시신들은 두 곳에 나뉘어 겹겹이 쌓여있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속옷 차림에 손과 발이 결박돼 있고, 목에는 뚜렷한 교살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부검 결과에서도 독극물 등 약물도 검출되지 않았다. 사망 추정 시각은 박순자 남편이 식당 아주머니를 추궁하던 새벽이었다.

경찰은 나무판자 위로 스티로폼이 쌓인 천장 바닥을 조사하던 중 스티로폼 사이에 총 67조각으로 찢어진 쪽지를 발견했다. 쪽지에는 "절대로 입 닫아라", "이미 의식 없으시다", "네 시간 전부터 5명 정도 죽였다", "오늘 중으로 거의 갈 것 같다"는 등의 충격적 내용이 담겨 있었다.

경찰은 특히 "너만 이 깨물어라", "성령 인도로 너만 버텨라"라는 구절에 의심을 품고 조사에 나섰고, 주방 아주머니가 마지막 생존자임을 밝혀냈다.

조사결과 박순자는 몇 년의 암 투병 끝에 기도로 완치 판정을 받자, 자신을 스스로 선택받았다고 여긴 사이비 교주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직원들은 모두 신도였다.

박순자는 원금 30~40%를 이자로 주는 조건으로 투자자들을 모았고 3년 동안 이를 지키며 채권자들과 신뢰를 쌓았다. 전국의 돈을 끌어모은 박순자는 이들에게 "함께 지내자"며 신도로 끌여들었다. 이후 자신을 따르는 신도들과 집단 시설에서 함께 생활하며 170억 원에 이르는 거액의 사채를 빌려 썼다.

당시 더욱 충격이었던 것은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시신으로 발견된 32명 안에 못 들어서 자괴감 또는 '들림' 받지 못해서 서운했다는 증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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