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이 명함을 탁 내밉니다. 어떤 것은 눈에 쏙 들지요. ‘흠, 이거 책갈피로 쓰면 좋겠군!’ 대개는 그저 그렇습니다. ‘이거 어디에 쓰나?’ 명함을 받았으니 나도 드려야 하는데 드릴 게 없습니다. 조금 미안하지요. 나는 엉거주춤 이름을 중얼댑니다. 전화번호라도 드릴까 살핍니다. 그리곤 속으로 생각하지요. ‘나도 명함을 하나 팔까?’
기자 시절에는 한 달에 명함 한 통이 부족했습니다. 그만큼 받는 명함도 많아서 명함철이 넘쳤습니다. 주기적으로 정리하고 관리하고 되새김하는 것도 일이었지요. 그러지 않으면 얼굴과 이름이 따로 놀아 얼굴은 알겠는데 이름이 안 떠오르거나, 그 반대가 되곤 했습니다. 이 명함이 어디서 굴러왔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았지요.
도시를 떠나 산골로 오니 그 반대가 되는군요. 일로 얽힌 번다한 관계가 떨어져나가는 대신 이웃과 사귀는 친밀한 관계가 생겨납니다. 관계가 좁고 깊어지는 거지요. 이웃끼리 만나는 데 구태여 명함을 주고받지 않습니다. 계급장 떼고 그냥 맨몸으로 만납니다. 그런데 나에겐 그게 어색했지요. 내세워 광고할 것도 없고, 매너나 교양 같은 것으로 가릴 것도 없는 내남 없는 만남들이 부담스러웠지요. 일 말고 정으로, 고객 말고 이웃으로, 남남 말고 우리로 만나는 일에 나는 무척 서툴더군요. 나의 만남은 늘 용무를 밝히는 자리였지 나를 드러내는 자리가 아니었던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바로 그 자리, 나를 드러내는 자리에 서서 나를 돌아봅니다. 당신과 만나려는 나, 그 나는 누구인가? 명함 한 장 없는 나는 누구인가? 당신과 만나기에 앞서 나는 나를 만난 적이 있던가? 내면의 나를 만나 사귀고 이해하고 사랑한 적이 있던가? 당신을 만났을 때 버벅대는 것은 드러낼 내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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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당신이 나를 막막하게 하는 건 얼른 나부터 만나라는 신호군요. 당신을 통해 나를 끄집어내고 당신의 거울에 비추어보라는 뜻이로군요. 당신, 고맙습니다. 명함에 가려 우리는 만날 틈이 없었습니다. 명함이 뻐근해질수록 나는 나를 잊었습니다. 명함이 나인 줄 알았습니다. 이제 명함을 내려놓고 내가 누구인지 묻습니다. 번지르르한 명함을 다 던져 버리고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는 ‘노바디’가 될 때 그때 비로소 내 안에서 나만의 ‘섬바디’가 드러나지 않을까요. 그때 비로소 당신과 나의 진정한 만남이 시작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