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은 삼성전자 주식 등 18조원가량(리움 등 개인소장 국보급 미술품 등 제외)을 유산으로 남기고 떠났다. 매일 1000만원씩 써도 4931년 이상 쓸 수 있는 규모다.
칼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라는 책에서 “(상품소비) 욕구가 위장에서 나오는가, 또는 환상에서 생기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그 물건(화폐 포함)의 유용성은 그 물건으로 하여금 사용가치가 되게 한다”고 말했다.
직장인 A씨에게 18조원은 매일 1000만원씩 4900년 이상 안락한 삶을 살 수 있는 돈일 수 있지만 기업가 이건희에게 18조원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기업을 잘 관리하기 위한 ‘종갓집 곳간’ 열쇠의 의미였다.
고인은 이 열쇠를 쥐고 1987년 삼성 회장에 오른 후 2020년까지 33년간 ‘우리나라의 자랑이 된’ 삼성이라는 그룹의 곳간을 지킨 맏며느리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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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87년 현대와 대우에 이어 재계 3위(자산 5조8880억원, 계열사 36곳)였던 삼성의 곳간 양식을 803조원(2019년 말 기준 금융그룹 포함)까지 늘렸다.
간혹 정치권 관리들이 곳간 양식을 탐해 곤욕을 치른 적도 있지만 고인은 재계 1위, 글로벌 톱 기업으로 성장시킨 선관주의 의무에 충실한 관리자였다. 한솔·CJ·신세계그룹 등을 분가시키고도 이룬 성과다.
현재 상속세 논란은 대주주의 상속세율이 일반 개인과 달리 최고 60%로 과도하다는 데 집중돼 있지만 더 큰 문제는 높은 상속세율로 인해 삼성 곳간의 열쇠를 더 대규모 자본인 외국계 등 다른 쪽에 넘겨줘야 할 수도 있다는 데 있다.
전통사회에서 종손이 물려받은 종갓집 곳간 재산은 종손 개인의 몫이 아니다. 종가 공동의 재산을 잘 관리하고 이를 잘 불려서 다음 세대에 물려주라는 선량한 관리자의 의무를 부여하고 곳간 열쇠를 맡기는 것이다.
상속세 논란의 핵심도 상속재산의 절반 이상을 상속세로 낸 후 삼성그룹의 곳간을 안정적으로 잘 관리·운영하는 환경이 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선친만큼은 안 되지만 현행법대로 상속세를 다 내고도 하루 1000만원씩 2000년 이상 쓸 돈이 있고 후대에 남길 만큼의 부가 있다.
다만 이 돈의 성격은 생활에 쓰는 그런 가치의 돈이 아니라 곳간을 더 키우는 열쇠의 역할을 부여받은 자본이다. 그 열쇠가 약해질 때 곳간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약 803조원의 삼성그룹 자산이 담긴 곳간을 지키는 열쇠를 누군가는 쥐어야 하고 가업승계를 한 이가 월급을 받는 대리인보다는 더 나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 것이다. 종갓집 종손의 책무와 명예가 있기 때문이다.
고인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작은 기업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키우고 수만 명의 일자리에서 수십만 명의 일터로 성장시키는 금고지기 역할을 했다.
이제 그 역할을 이 부회장이 맡을 상황에서 상속세 최고 명목세율 60%가 곳간의 열쇠를 뺏는 일이 아니기를 바란다. 단순히 상속세를 줄여주라는 게 아니라 가업승계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라는 얘기다. 황금주를 도입하든, 상속세 연납기한을 늘리든 가업승계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떨까.
삼성은 법에 따라 상속세를 낸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사회 일각에서 삼성의 의사와 무관하게 상속세 논란이 있는 것은 이 부회장의 상속세가 개인을 넘어 삼성, 더 나아가 국가 경제의 향배와 무관치 않기 때문이다. 쓸데없이 재벌총수 상속세를 걱정해준다고 비아냥거리며 무시할 사안은 아니다.
기업가 가문에서 자라났고 그 자식에게는 그 길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한 기업가가 선량한 관리자로서 제대로 기업을 운영해 국가 경제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몫이다.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