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건희 회장을 움직인 유일한 이의 눈물

머니투데이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2020.10.30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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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 별세, 그 후] 54년 평생 반려자를 잃은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2010년 2월 5일 삼성 창업자인 호암 이병철 회장 탄생 100주년 기념식이 열린 호암아트홀에서 고 이건희 회장과 동생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이 마주 보며 눈물을 보이고 있는 중간에 이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도 함께 울고 있다./사진제공=머니투데이 DB2010년 2월 5일 삼성 창업자인 호암 이병철 회장 탄생 100주년 기념식이 열린 호암아트홀에서 고 이건희 회장과 동생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이 마주 보며 눈물을 보이고 있는 중간에 이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도 함께 울고 있다./사진제공=머니투데이 DB


이건희 삼성 회장이 지난 25일 향년 78세를 일기로 영면한 가운데, 조문 당시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언급한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의 발언에 관심이 쏠린다.



박 의원은 고 이건희 회장 조문 후 한 방송에 출연해 단순히 "위로를 전했다"는 다른 조문객들과 달리 유족들과 나눈 이야기를 공개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두 걸음 나와서 손을 잡고 와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한 것과 함께 "홍라희 여사의 '간절한 말씀'이 있었다"며 "그 말씀을 전하기는 그렇다"고 말해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가 말한 '간절한 말씀'이 어떤 것인지는 지난 1967년 이 회장과 결혼해 54년간을 함께 한 평생의 반려자를 잃은 홍 전 관장의 평소 모습을 볼 때 충분히 짐작이 간다.

홍 전 관장은 이건희 회장과 함께 할 때는 항상 옆에서는 손을 잡고 다니는 등 54년 평생 반려자로서 '조용한 내조'를 해왔다. 간혹 이 회장이 서두를 때는 다른 방식으로 그의 속도를 조절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또 이재용 부회장이나 이부진 사장, 이서현 이사장 등 딸들 옆에서는 항상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로서 주변 사람들에게는 머리 숙여 당부의 말을 전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삼성전자 서초사옥 전경/ 사진=김창현 기자 chmt@삼성전자 서초사옥 전경/ 사진=김창현 기자 chmt@
2015년 날씨가 쌀쌀했던 어느 날 오후 9시를 조금 넘긴 시간 서울 서초사옥 로비에서 홍 전 관장과 이 부회장을 만난 적이 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어머니의 옆에서 맞춰 걷던 이 부회장이 로비에서 마주친 기자를 소개하자 홍 전 관장은 "(아들을) 잘 부탁합니다. 잘 부탁합니다"라며 머리 숙여 인사했다. 딱히 부탁할 일이 없는데도 자식을 둔 여느 부모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박 의원과 만났을 때도 홍 전 관장의 모습은 다르지 않았으리라 본다. 이 부회장 등 자녀들과 어디를 가든 홍 전 관장은 자식 걱정을 한다.

홍 전 관장의 면모를 볼 수 있는 또 다른 에피소드도 있다. 2010년 이건희 회장이 경영일선에 복귀한 후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5년이나 10년 후 삼성의 1등 제품은 모두 사라질 것'이라는 위기감을 갖고 조기 출근할 때의 일이다.

이 회장이 워낙 일찍 일어나 출근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누구도 말리자 못하자, 홍 전 관장은 이 회장의 옷을 코디를 해준다는 핑계를 들어 출근 시간을 늦췄다고 한다.

2011년 12월 1일 자랑스런 삼성인상 시상식을 참석을 위해 삼성전자 서초 사옥을 방문한 고 이건희 회장이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는 사이, 이 회장 뒤로 부인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중앙 붉은 옷부터), 장녀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차녀인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이 서 있다./사진=머니투데이 DB2011년 12월 1일 자랑스런 삼성인상 시상식을 참석을 위해 삼성전자 서초 사옥을 방문한 고 이건희 회장이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는 사이, 이 회장 뒤로 부인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중앙 붉은 옷부터), 장녀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차녀인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이 서 있다./사진=머니투데이 DB
삼성 출신 사장들의 말을 종합하면 홍 전 관장은 이 회장이 일찍 출근하면, 회장 밑에 부회장부터 모두 출근을 서둘러야 하는데 6시부터 일찍 출근하려는 사람을 마땅히 잡을 길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회장이 입는 옷맵시를 핑계 삼아 여러 번 옷을 바꿔 코디를 하면서 이 회장의 출근 시간을 늦췄다고 한다.

홍 전 관장은 또 이 회장 생일인 1월 9일 하루 전에 꼭 경기도 의왕시 오전동에 위치한 천주교의 대표적인 한센병 환자 시설인 성라자로 마을을 찾아 봉사활동을 했다. 1970년대말부터 40년간 조용히 이어온 활동이다.

동양방송 앵커와 국회의원을 지낸 봉두완씨(성 라자로 마을 돕기회 상임고문)는 지난 2016년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홍라희 여사는) 37년간 이 회장의 생일인 1월 9일만 되면 찾아와 조용히 봉사를 하고 갔다"고 말했다.

이어 "한번은 누가 ‘왜 이렇게 오랫동안 봉사를 하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제일 사랑하는 한센인들이 남편을 위해서 기도해주지 않겠느냐'고 하더라"고 말했다.

홍 전 관장은 이런 활동이 공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려 한때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몰리는 취재인력들이 한센인들의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줄 수 있다며 언론취재 자제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런 그의 간절함을 담았던 봉사활동에도 불구하고 지난 25일 54년의 평생 반려자를 먼저 떠나보냈다.

홍 전 관장은 또 이 회장이 출국할 때나 입국할 때 항상 옆을 지키며, 혹시라도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정정해주는 등의 내조도 아끼지 않았다. 2011년 3월 31일 김포공항에서의 일이다.

2011년 3월 31일 김포공항으로 출국전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 성과와 관련한 '낙제발언'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 회장 뒤로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의 모습이 보인다./사진=머니투데이DB2011년 3월 31일 김포공항으로 출국전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 성과와 관련한 '낙제발언'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 회장 뒤로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의 모습이 보인다./사진=머니투데이DB
이 회장은 그달 10일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회의 참석 때 '이명박 정부의 경제성적은 어떻게 보시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흡족하다기보다는 낙제는 아닌 것 같다"고 답하고 곤욕을 치렀었다. 낙제가 아니라는 얘기지만 '낙제'라는 단어자체에 당시 청와대와 여당이 대로했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 달 31일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영국으로 출국길에 또 기자들과 만났다. 그 자리에서 이 회장은 "(낙제점 발언에 관한) 내 뜻은 그게 아닌데 완전히 오해들을 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경제성장이 잘 됐고, IMF 금융위기도 다른 어떤 나라보다 빨리 극복했다. 이런 저런 면에서 잘했다는 뜻이었는데 이상하게 전달됐다"고 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1998년 IMF 금융위기로 말이 잘못 나온 것에 대해 기자가 재차 "글로벌 금융위기를 말씀하시는 거죠?"라고 하자 옆에 있던 홍 전 관장이 "맞다"고 정정하고, 이 회장도 이를 듣고 다시 말을 고쳤다.

김대중 정부 때의 IMF 금융위기를 잘 극복했다는 문맥으로 보도됐다면, 이명박 정부에서 '설화'로 또 한번 곤란을 겪을 위기를 홍 전 관장의 내조로 넘긴 셈이다.

지난 27일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간 빈소에는 전일 박 의원에게 '간절한 말'을 했다는 홍 전 관장은 반려자를 잃은 슬픔에 탈진해 보이지 않았고, 이 부회장과 고인의 두 딸과 사위, 손자만이 자리를 지켰다. 발인날인 28일 홍 전 관장은 다시 일어나 아들과 딸들의 손을 잡았다.

(서울=뉴스1) 사진공동취재단 = 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발인식이 28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다. 영결식에 참석하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오른쪽)이 차량에서 내려 어머니 홍라희 여사 손을 잡아주고 있다. 2020.10.28/뉴스1  (서울=뉴스1) 사진공동취재단 = 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발인식이 28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다. 영결식에 참석하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오른쪽)이 차량에서 내려 어머니 홍라희 여사 손을 잡아주고 있다. 2020.10.28/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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