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훈에 휘둘리는 꼰대정당"…길 잃은 보수, 어디로 가야하나

머니투데이 박종진 기자, 권혜민 기자, 김상준 기자, 유효송 기자, 서진욱 기자 2020.10.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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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4.0 II] 진보의 위기-보수의 자격<2>(下)

전두환·노태우 구속시킨 '보수'가 어쩌다 전광훈한테…
(서울=뉴스1) 박지혜 기자 = 보석 취소로 재수감되는 전광훈 목사가 9월7일 오후 서울 성북구 사랑제일교회 인근 자택에서 호송차로 이동하던 중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2020.9.7/뉴스1(서울=뉴스1) 박지혜 기자 = 보석 취소로 재수감되는 전광훈 목사가 9월7일 오후 서울 성북구 사랑제일교회 인근 자택에서 호송차로 이동하던 중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2020.9.7/뉴스1


대한민국 보수정당의 근간은 '노태우-김영삼-김종필' 3당 합당으로 1990년 창당한 민주자유당이다. 야합(野合)이란 꼬리표가 붙을지언정 적어도 군사파쇼정당의 외피는 벗었다.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굴로 들어갔다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논리가 궤변이더라도 결과적으로 독재의 시대는 그렇게 사라져갔다.



30년이 흘렀다. 국민의힘 당 대표실(비상대책위원장실) 벽에는 여전히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다. 건국-산업화-민주화의 상징으로서 한국을 이끌어왔다는 보수정당의 자부심이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포스트 코로나, 4차 산업혁명의 파고 속에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이뤄야 할 대한민국 4.0 시대에 보수정당은 아직도 표류 중이다. 미래가 아닌 과거에 발목 잡히고 품격은커녕 수준을 의심받는다.



"전광훈에 휘둘리는 꼰대정당"…길 잃은 보수, 어디로 가야하나
◇전광훈에 흔들리는 보수, 근본가치·신뢰 다 잃어

전문가들은 한마디로 보수가 신뢰를 잃었다고 입을 모은다. 문민정부가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와 함께 물러나고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뒤 다시 보수가 집권했지만 비전을 보여주지 못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이명박은 박정희 시대 경제정책의 상징이고 다른 한 지도자(박근혜 전 대통령)는 직접적인 자녀로서 두 사람 다 박정희 시대 정신을 대변한다"며 "(보수 재집권 후) 국민들이 다시 국가를 믿고 맡길 만한 정책적 국가 비전을 제시한 것을 보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이명박근혜 시대'가 탄핵이라는 비극으로 막을 내렸고 궤멸로 몰린 보수는 태극기로 상징되는 극우와 뒤엉켰다. 김종인 체제에서 변화를 꾀하지만 '8.15 집회' 논란에서 보듯 국민들의 눈에는 별반 차이가 없다.

신뢰를 잃은 데다 강력한 지도자라는 구심점마저 사라지자 '전광훈류'의 선동가에나 휘둘리는 신세로 전락한 모양새다.

극우와 결별하지 못할수록 보수의 근본가치에서는 더 멀어지고 신뢰를 회복할 길도 요원해진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국민의힘은 좌클릭이니 중도클릭이니 하기 이전에 시대 퇴행적인 주장을 일삼는 세력과 완전히 결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서울=뉴스1) 김명섭 기자 =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김현철 김영삼민주센터 상임이사 등 참석자들이 2019년 11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김영삼 대통령 서거 4주기 '자유민주주의자 김영삼의 시대정신과 오늘' 추모행사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2019.11.25/뉴스1(서울=뉴스1) 김명섭 기자 =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김현철 김영삼민주센터 상임이사 등 참석자들이 2019년 11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김영삼 대통령 서거 4주기 '자유민주주의자 김영삼의 시대정신과 오늘' 추모행사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2019.11.25/뉴스1
◇'공동체에 책임' 보수의 자격…5.18 민주화운동특별법 만든 자산 되새겨야

보수의 근본가치는 공동체에 있다. 30년 전 민주자유당 강령 1번에는 '화합하는 정치문화 정착', 2번에는 '형평과 균형을 통하여 모두가 잘 사는 복지경제', 3번에는 '모두가 믿고 살 수 있는 공동체 사회'가 포함됐다. 정책 1번은 '책임정치를 구현한다'였다.

통합과 화합, 공동체의 안전과 유지, 그것에 대한 책임은 보수의 핵심이자 존재의 이유다. 설사 명분에 그치더라도 공동체를 지키는 이 같은 능력에 최소한의 신뢰를 받는 게 보수의 자격이다.

극우와 섞이면 스스로 쌓아온 자산과 자기 정체성도 부인하는 꼴이 된다. 1995년 김영삼 정권에서 통과시킨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1조에는 '국가기강을 바로잡고 민주화를 정착시키며 민족정기를 함양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했다. 5.18 민주화 운동을 기리는 일이 국가기강과 직결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같은 해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구속 시킨 것도 보수정당이 한 일이다. 5.18 특별법을 만들고 독재자들을 감옥에 넣고도 '반민주'로 낙인 찍혀 있는 게 보수정당의 코미디 같은 비극이다. 보수와 극우가 적당히 공존해온 탓이다.

극단적 배제와 색깔론적 공격, 방역도 비웃는 비상식적 행태를 보이는 극우는 '공동체의 유지·발전'에 방점을 찍는 보수의 가치를 파괴한다.

(부산=뉴스1) 여주연 기자 =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16일 오전 부산 금정구 부산대학교 넉넉한터에서 열린 '부마민주항쟁 기념식' 참석 후 차량으로 이동하고 있다. 2020.10.16/뉴스1(부산=뉴스1) 여주연 기자 =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16일 오전 부산 금정구 부산대학교 넉넉한터에서 열린 '부마민주항쟁 기념식' 참석 후 차량으로 이동하고 있다. 2020.10.16/뉴스1
◇극우와 단절, 과감히 결단해야…끊지 못하면 미래 없다

하지만 결별은 쉽지 않다. 유창선 시사평론가는 "지난번 개천절 집회 등에서는 선을 긋는 모습을 보였다"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적극적 비판을 하지는 않는, 거리는 두지만 굳이 내쫓지는 않는 그런 모습"이라고 말했다.

거대 여권을 상대해야 하는 야당으로서 당장 눈앞에 보이는 태극기 부대의 '전투력'은 무시하기 어렵다.

황교안 전 대표가 그랬다. 황 전 대표와 월례 공부모임에서 활동했던 한 인사는 "태극기 세력과 관계를 끊으라고 수차례 강력히 조언을 했지만 결정을 못 하더라"고 말했다.

그러나 극우와 헤어지지 못하면 중도층과 만날 수 없다. 박창환 장안대 교수는 "김종인 위원장이 중도로 가겠다고 강령도 바꾸고 했지만 정작 황교안 체제와 뭐가 달라졌느냐"며 "왼쪽 깜빡이 켜고 우회전하는 꼴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통합과 확장을 통한 수권능력 확보를 위해서도 극우와 단절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임현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중도는 당연하고 진보도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대로라면) 당내 반발이 심할 것"이라며 "보수는 헤쳐모여 다시 한번 해야 하고 극우 등 버릴 건 버려야 한다"고 밝혔다.

박종진, 권혜민, 김상준, 유효송 기자

'보수 재건' 바란다고?…'색깔론'부터 버려라
"1980년대 주체사상에 빠졌던 사람들이 청와대와 정부, 국회를 장악하고 있다."(2019년 1월 29일 당대표 출마 선언)

"사회주의와 연방제 통일을 가슴에 품었던 세력이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개헌까지 시도할 것이다."(2020년 4월 14일 대국민 회견)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가 지난해 10월 2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문재인하야범국민투쟁본부 주최로 열린 제3차 범국민투쟁대회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사진=뉴스1.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가 지난해 10월 2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문재인하야범국민투쟁본부 주최로 열린 제3차 범국민투쟁대회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사진=뉴스1.
국민의힘 전신인 미래통합당을 이끌었던 황교안 전 대표가 공식석상에서 내놓은 발언이다. 황 전 대표는 당권 도전부터 총선 참패로 대표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색깔론'을 설파했다. 총선을 앞두고 미래통합당으로 새 출발에 나선 보수 정당이 몰락한 주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당시 제1야당이 극우와 선을 긋지 못한 이유는 이들을 당의 입지 강화를 위한 지지 기반으로 봤기 때문이다.

황 전 대표 재임 시절 야당 의원들은 이분법적 이념의 잣대에 치우친 발언을 스스럼없이 꺼냈다. '공산주의', '좌파독재', '386 운동권' 등 구시대적 용어들을 총동원했다. 경쟁적으로 이념 편향성 메시지를 내놓는 분위기마저 조성됐다. 지난해 패스트트랙 대치 국면에서 여야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것 역시 색깔론이 득세한 이유다.

이념대결 구도에 승부를 건 여파는 총선 참패로 돌아왔다. 진보 진영 공격으로 보수 진영이 결집하는 효과를 기대했으나, 중도층과 일부 지지자들이 완전히 등을 돌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과거에 얽매인 꼰대 정당'이라는 유권자들의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졌다. 정부여당 지지층이 공고한 상황에서 제1야당은 오른쪽으로만 향했다. 광장에서 마주친 태극기 부대의 열렬한 지지는 '편향된 입'을 더욱 바쁘게 만들었다. 국민 대다수가 극우세력에 혐오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했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가운데)이 지난 6월 1일 비대위원장 취임 직후 첫 비대위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뉴스1.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가운데)이 지난 6월 1일 비대위원장 취임 직후 첫 비대위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뉴스1.
국민의힘 쇄신을 이끄는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은 이념공세를 구태정치로 규정, 명확한 결별을 선언했다. 새로운 당명과 정강정책, 당색에서 보수 정당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으며 '탈이념·탈지역' 정당으로 도약에 나섰다. 김 위원장은 지난 8월 새 당명 선정 과정에서 "지금은 이념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라고 단언했다.

김 위원장의 '무이념 시대' 표현은 국민들이 이념대결 자체에 관심이 없는 상황에서 보수라는 과거의 틀에 갇혀선 안 된다는 뜻이다. 수많은 사회 문제들을 진영 논리로 제단할 게 아니라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차원에서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유권자들이 표를 던지는 대안정당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판단도 깔렸다.

하지만 색깔론과 완전한 결별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 일부 인사들은 여전히 극우단체들과 연대하며 색깔론 발언을 일삼고 있다. 김종인 체제에서도 메시지 관리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방증이다. 지난 7월 이인영 통일부 장관의 인사청문회에서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이 이 장관을 '주체사상 신봉자'라며 색깔론을 제기한 게 대표적이다.

색깔론에 기대 인지도를 확보한 인사들의 정치적 기행을 당 지도부가 일일이 제지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어려움도 존재한다. 자칭 '보수 논객'이라는 정치 유튜버들의 이념편향적 주장에 도매급으로 묶이는 측면도 있다. 일각에서는 온라인 존재감이 상당한 보수 논객들과 접점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국민의힘이 색깔론 메시지를 '금기어' 수준으로 제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일부 인사들의 일탈로 국민의힘이 추진하는 탈이념 행보에 '정치는 레토릭'일 뿐이라는 의심이 고개를 들고 있는 탓이다. 메시지 관리에 실패하면 중도층으로 외연을 확장하려는 지지층 확대 전략에 악영향이 불가피하다.

정치평론가 박창환 장안대 교수는 "진영 논리의 가장 큰 책임은 국민의힘에 있다"며 "과거 냉전시대 논리를 정권의 문제점에 그대로 갖다 붙인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런 문제가 국민의힘이 지지율 30%를 회복하지 못하는 이유"라고 분석했다.

서진욱, 김상준 기자

유연하지 않으니 부러진다…"보수, '불평등' 집중해야"
김재섭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 인터뷰

김재섭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사진=뉴스1김재섭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사진=뉴스1
'불공정한 기득권 타파', '젠더, 환경 문제에 대한 고민'. 진보 진영 인사의 말이 아니다. 보수 진영 청년 정치인 김재섭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이 제시하는 보수 정당이 가야할 길이다. 그는 '보수의 위기'를 '보수 정당의 위기'라 규정하고 그 원인을 '유연함 부족'에서 찾았다.

김 위원은 보수가 사회 변화를 대하는 태도가 언제부터인지 경직됐다고 진단했다. 그는 "보수는 사회 변화를 예민하게 관찰해야 한다. 애초에 급격한 변화에서 오는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게 보수이기 때문에 더욱 변화에 민감하고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보수가 놓치고 있는 '사회 변화'의 키워드는 '사회적 불평등'이다. 김 위원은 "불평등이 심화하면서 초래되는 갈등, 그로 인한 분열을 막아야 하는 것은 사회를 안전하게 한다는 보수의 당연한 책무인데도 보수 정당은 사회복지 정책 등 분배 분야에서 모순적 태도를 많이 보였다"고 지적했다.

'공정' 또한 놓치고 있다고 했다. 김 위원은 공정이 본래 보수의 핵심 가치라고 역설했다. 그는 "보수는 시장을 중시한다. 자원의 최적 배분에 가장 효율적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라며 "그런데 시장에 불공정이 발생하면 그 효율성을 해친다. 보수는 이를 회복시키기 위해 적극 나서왔다"고 했다.

김 위원은 보수가 '기득권' 개념을 재정립해야 '공정'에서 일관성을 보일 수 있다고 봤다. 김 위원은 '정당한 노력으로 성취한 기득권'과 '지위를 악용해 이익을 얻는 기득권'을 구분해야 한다고 했다. 보수는 공정한 기득권은 지키되 불공정한 기득권은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보적 의제에 대해서도 전향적 태도 변화를 보여야 할 때가 됐다고 봤다. 김 위원은 "특히 젠더, 환경은 보수와 진보로 나뉜 프레임으로 정의할 수 없다"며 "보수가 사회 변화에 민감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면 왜 해당 의제가 이슈가 되는지, 사회의 유지와 번영을 위해 보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면밀히 논의하고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김 위원은 보수가 이러한 유연함 없이 낡은 이념에 사로잡힐 때 답답함을 느낀다고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대한 태도가 대표적이다. 김 위원은 "탄핵은 당연히 인정해야 한다. 아직도 이를 둘러싸고 정쟁을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며 "보수의 핵심인 법치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보수 정치인의 기본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극우와의 단절'도 하루빨리 성취해야 한다. 김 위원에게 이는 목표가 아닌 전제다. 극우와 단절은 국민에게 신뢰를 회복하는 과정일 뿐 그 이후에 보여주는 실제 '퍼포먼스'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는 "보수의 명확한 정책 노선 설정과 실제 이행이 필요하다"며 "불평등·갈등 해결을 위한 정책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궁극적 변화가 가능하다"고 했다.

이같은 변화를 위해 지금 보수 정당에 필요한 건 인물 육성이다. 김 위원은 '국민의 지적을 귀담아 듣는 인물'이 많아져야 한다고 봤다. 그는 "청년들이 어떤 형태든 당 안에서 교육 받고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돼야 한다. 생각의 유연함이 청년 정치의 본질이고 현재 보수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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