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전원합의체./ 사진=뉴스1
'삼성 합병비율'에 배신감…법적 분쟁 비화일성신약은 합병 전 옛 삼성물산 지분을 2.11%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건희 회장(1.37%)보다도 지분이 많았다. 일성신약이 옛 삼성물산 지분을 이렇게 많이 가진 것은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故) 이병철 회장과의 파트너십이 있었기 때문이다. 윤병강 일성신약 회장이 이 회장과 친분이 있어 오래 전부터 삼성물산에 장기 투자를 해왔다고 한다.
일성신약 직원의 특검 진술에 따르면 2015년 3월 윤 회장은 김신 당시 삼성물산 사장, 이영호 부사장과 함께한 골프 모임에서 삼성물산 합병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중 "삼성물산에 손해가 가지 않는 한도에서 합병이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2개월 뒤 삼성물산은 1:0.35 합병비율을 발표했고, 윤 회장은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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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는 지금 검찰이 주장하는 이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승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삼성 합병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삼성전자에 대한 이 부회장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 옛 삼성물산의 주가가 낮아질수록 이 부회장에게 득이 된다는 점은 인정했다. 나아가 합병 당시 상황은 이 부회장의 삼성전자 지배력 강화와 연관지어 판단해야 한다고 전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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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는 옛 삼성물산 주가가 기업가치보다 저평가돼 있었다고 판단했다. 그 원인으로는 2015년 상반기 옛 삼성물산의 실적 부진, 제일모직 상장 이후 불거진 합병설 두 가지를 들었다. 재판부는 "2015년 상반기 건설업 호황으로 주요 건설사들이 주택신규공급을 대폭 확대했으나 옛 삼성물산은 주택신규공급을 확보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삼성물산은 "신규 수주는 서울 강남권 등 사업성이 양호하다는 점이 확인된 프로젝트에 주로 참여하기로 한 것"이라며 영업전략이었다고 해명했으나, 재판부는 "주장을 뒷받침할 자료가 제출되지 않았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카타르 화력발전소 공사를 수주한 사실을 2015년 7월28일에 공개한 점도 문제삼았다. 이 공사대금은 2조원으로 옛 삼성물산에 상당한 호재였다. 재판부는 그해 5월쯤 수주를 거의 확정짓고도 7월17일 삼성 합병이 성사된 후에 공개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판단했다. 옛 삼성물산 주가가 뜨지 않도록 호재가 될 만한 뉴스를 일부러 늦췄다는 것이다.
삼성물산은 공사 수주가 완전히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표하지 못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런 점들을 토대로 재판부는 "옛 삼성물산의 실적부진이 누군가에 의해 의도됐을 수 있다는 의심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번에 검찰이 작성한 이 부회장의 공소장은 이 판단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다만 재판부의 판단 취지는 '그러한 의심을 할 만하다'는 것이지 '옛 삼성물산의 주가가 조종됐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삼성의 항변 "삼성물산 주가는 시장이 움직인 것…정해준 공식 따랐을 뿐"재판부가 실적부진 못지 않게 시장의 기대심리도 중요한 변수였을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제일모직이 상장했을 때부터 시장은 옛 삼성물산과의 합병은 물론, 합병비율에서 제일모직이 우위를 점할 것까지 예상하고 있었다. 이 예상이 주가에 반영돼 옛 삼성물산 주가가 저조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옛 삼성물산의 주가는 누군가의 의도가 아닌 시장의 판단에 따라 움직인 것으로 결론낼 수 있다. 재판부가 제일모직 상장 이전 시점으로 돌아가 주식매수청구가격을 산정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대법원이 이 사건에서 어떤 판단을 내리느냐에 따라 이 부회장 사건 재판 판도가 변할 수 있다.
삼성은 옛 삼성물산 주가는 시장논리에 따른 결과라는 판단에는 동의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제일모직 상장 시점으로 돌아가 다시 숫자를 계산해야 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자본시장법과 그 시행령에서 정한 숫자와 공식에 따라 합병비율을 산출했고 주주들의 동의까지 다 받아 마친 일인데, 이제와서 법이 아닌 다른 기준을 따르라고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취지다. 법정에서도 이 점을 강력하게 주장할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