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손보험은 2003년부터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판매되기 시작했다. 당시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 등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였다. 가입자들은 보험금 청구서류를 작성한 후 영수증이나 진료비 세부내역서 등 필요한 서류를 구비해 보험회사로 직접 방문하거나 팩스 등을 통해 청구했다. 번거롭다 보니 소액의 경우 보험금 청구를 하지 않고 지나치는 경우도 많았다.
실손보험금 청구를 간소화하면 가입자는 병원이나 약국에서 진료를 받은 후 별도의 서류 제출 없이 앱을 통해 간단하게 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게 된다. 서류 제출 등이 번거로워 적은 액수는 보험금 청구를 안 했던 가입자들도 절차가 간단해 지면 빼먹지 않고 청구할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보험금 지급이 늘어나고 이른바 ‘낙전수입’이 사라져 보험사 입장에서는 사실 좋은 일이 아니다. 그래서 보험사들도 처음에는 보험금 청구가 크게 늘어날까 봐 제도 도입에 반대했다. 지금도 이런 걱정은 여전하다.
문제는 의료업계다. 의료계는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가 시행되면 가입자의 개인정보 유출 우려가 있다고 반대한다. 소비자 불편을 초래하는 절차를 유지하는 게 ‘소비자보호를 위해서’라는 것이다. 또 보험사들이 보험금 지급이 늘어나는 제도를 도입하자고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숨은 의도’가 있다고 주장한다. 실손보험금 청구 간소화 시스템을 보험금 지급 거부 수단으로 악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이는 결국 보험사만 이익을 얻게 되는 결과를 야기할 것이라는 논리다.
반면 보험사들은 개인정보 유출 문제나 보험금 지급 거부에 악용할 가능성은 충분히 보완책을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보험금 청구망의 보안 수준을 높이고 악용을 막기 위한 별도의 수단을 강구하면 된다는 것이다. 사실인즉슨 현재도 건강보험이나 자동차보험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을 통해 보험금 청구가 이뤄진다. 정보유출과 관련한 문제는 없다. 전산화 대상 정보를 진료비 영수증, 진료비 세부내역서, 처방전상의 질병분류번호로 한정해 법률안에 명기하는 것도 방법이다. 보험사를 핑계로 제도 자체를 막는 것이 궁색한 이유다.
이 시각 인기 뉴스
일각에서는 의료계가 실손보험금 청구 간소화에 반대하는 진짜 이유로 보험사가 아니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을 꼽는다. 진료비의 적정성을 평가하는 심평원에 진료정보가 공유되면 진료비가 깎일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거부감이 크다는 것이다. 의료기관마다 가격이 천차만별인 비급여 진료비까지 공개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국회에서 실손보험 청구절차 간소화의 법적 기반마련을 위한 보험업법 개정안이 잇따라 발의됐다. 소비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소비자단체들도 이례적으로 보험사의 편에 서서 제도 도입을 촉구하고 있다. “실손보험금 청구 간소화는 소비자 편익증진을 위한 것이지 보험사의 청구거절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안”이라는 성명까지 냈다. 의료계도 ‘소비자보호’라는 실체 없는 구호 뒤에서 나와 소비자들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귀를 기울일 때가 됐다.
![머니투데이 금융부 차장 전혜영](https://thumb.mt.co.kr/06/2020/10/2020101415110318905_1.jpg/dims/optimiz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