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넷플릭스
‘보건교사 안은영’을 기대한 이유도 비슷한 맥락에서였다. 정유미의 안은영은 어떨까, 이 전대미문의 캐릭터를 정유미는 어떻게 소화했을까. 뭔가 달라도 다르겠지.
하지만 옴잡이 백혜민이 등장한 4회부터는 숨도 안 쉬고 몰입해 봤다. 다른 게 아니라 옴잡이에게 연민을 느끼는 정유미의 표정 때문이었다. 순간, 정유미의 전작들 가운데 내가 좋아했던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 나 정유미의 팬 맞구나. 그제야 인정하게 됐다.
정유미의 우는 연기를 좋아한다. 동그랗고 커다란 두 눈망울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그의 얼굴에서는 소중한 것을 빼앗길까 두려운 아이 같은 순수함과 소중한 것을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어른의 견고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젤리 따위 보지 않고 평범하게 살고 싶은 안은영에게 옴을 제 위산으로 녹이고는 죽고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한 옴잡이 혜민의 삶이 얼마나 가여웠을까.
이 시각 인기 뉴스
그 마음이 TV를 뚫고 고스란히 전해져 가슴이 아려왔다. 인물에 마음이 녹아들자, 이 기괴하고도 괴랄한 작품에 흠뻑 빠져들기 시작했다. 좋은 배우의 좋은 연기는 흔히 말하는 개연성이라든지 플롯의 공백마저 말끔히 메운다.
사진제공=넷플릭스
‘판타지 알레르기’가 있는 내게 ‘보건교사 안은영’이 어느 순간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슬픈 드라마로 다가온 것도 아마 비슷한 이유 때문일 테다. 활자와 영상화된 안은영 세계의 간극을 정유미가 좁힌 셈이다.
“너는 말이야 캐릭터 문제야. 그럴수록 칙칙하게 가지 말고 달리는 모험 만화로 가야 해. 그럼 애들이 싫어하지 않을 거야. 다치지 말고 유쾌하게, 사람들한테 사랑받으면서 살라고.”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이자, 이 작품의 세계관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대사이기도 하다. 누구나 아킬레스건 하나쯤은 갖고 있다. 안은영에겐 그것이 젤리를 보는 것이고, 홍인표(남주혁 분)에겐 다리를 저는 일, 혜민에겐 옴잡이로서의 숙명이 그것이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나쁜 것만 아니라면 평범한 것보다 이상한 편이 더 낫다고 위로한다.
정유미의 연기도 마찬가지다. 전형적이지 않은 그의 연기는 누군가에겐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을 터. 조금 낯설면 어떤가. 결국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을 텐데. 굳이 ‘윰블리’라는 수식어를 끌어다 쓰지 않더라도, 이미 정유미의 연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가 됐다. 안은영처럼 다치지 않고 유쾌하게 제 필모그래피를 다져온 결과일 것이다. ‘보건교사 안은영’을 보며 새삼 정유미라는 배우의 힘을 깨닫게 된 어느 가을날이다.
김수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