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교사 안은영ㅣ 괴랄한 판타지라도 정유미라면③

김수현(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0.09.29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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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넷플릭스 사진제공=넷플릭스


넷플릭스 오리지널 ‘보건교사 안은영’을 보고 나서야 알게 됐다. 정유미가 출연한 거의 모든 작품을 봤단 사실을 말이다. 단편영화 몇 편을 제외하곤, 정유미가 출연한 드라마, 영화, 예능을 모조리 섭렵(?)했더라. 일부러 챙겨볼 정도로 정유미의 대단한 팬인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돌이켜보면 정유미라는 배우의 선택을 나도 모르게 따라갔던 것 같다. ‘믿고 보는’이라는 수만 번은 들었던 상투적 표현이 내게도 적용된 말이었다니.

‘보건교사 안은영’을 기대한 이유도 비슷한 맥락에서였다. 정유미의 안은영은 어떨까, 이 전대미문의 캐릭터를 정유미는 어떻게 소화했을까. 뭔가 달라도 다르겠지.



솔직히 말하자면, 1~3편의 허들을 넘는 것이 내겐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수도 없이 일시정지를 누르고 중도하차를 고민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언제부턴가 소설과 판타지 장르에 흥미가 떨어졌다. 현실이 너무 퍽퍽한 탓인지, 현실성 없는 판타지물이나 ‘가짜 이야기’인 소설을 외면하곤 했다. 더더욱 솔직히 말하자면, 1~3회의 정신없이 몰아치는 전개를 따라잡기 버거워 한국어 자막을 켰다. 아, 이렇게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중도하차하고 마는 것인가.

하지만 옴잡이 백혜민이 등장한 4회부터는 숨도 안 쉬고 몰입해 봤다. 다른 게 아니라 옴잡이에게 연민을 느끼는 정유미의 표정 때문이었다. 순간, 정유미의 전작들 가운데 내가 좋아했던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영화 ‘폴라로이드 작동법’에서 동아리 선배의 얼굴을 떨리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순간, 영화 ‘가족의 탄생’에서 봉태규를 붙잡으며 “그냥 다 미안해”라며 울먹였을 때, ‘내 깡패 같은 애인’에서 첫날밤을 보낸 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개의 밤”이라고 말해 박중훈을 발끈하게 했던 장면, 그리고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친정엄마에게 빙의해 오열했던 장면까지. tvN 드라마 ‘로맨스가 필요해’의 달콤하고도 애잔했던 여러 순간들도 빼놓을 수 없다.

아, 나 정유미의 팬 맞구나. 그제야 인정하게 됐다.

정유미의 우는 연기를 좋아한다. 동그랗고 커다란 두 눈망울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그의 얼굴에서는 소중한 것을 빼앗길까 두려운 아이 같은 순수함과 소중한 것을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어른의 견고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젤리 따위 보지 않고 평범하게 살고 싶은 안은영에게 옴을 제 위산으로 녹이고는 죽고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한 옴잡이 혜민의 삶이 얼마나 가여웠을까.


그 마음이 TV를 뚫고 고스란히 전해져 가슴이 아려왔다. 인물에 마음이 녹아들자, 이 기괴하고도 괴랄한 작품에 흠뻑 빠져들기 시작했다. 좋은 배우의 좋은 연기는 흔히 말하는 개연성이라든지 플롯의 공백마저 말끔히 메운다.

사진제공=넷플릭스 사진제공=넷플릭스
정유미에겐 가짜도 진짜처럼, 영화적인 설정도 더없이 일상적인 무언가로 바꾸는 강한 힘이 있다. 무엇보다 자신이 맡은 캐릭터가 놓인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단순한 세트장이 아닌, 오랫동안 존재해왔던 현실성 넘치는 곳으로 탈바꿈시킨다. ‘보건교사 안은영’의 젤리 괴물이 통통 튀는 학교도, ‘82년생 김지영’의 쓸쓸했던 베란다, ‘폴라로이드 작동법’의 동아리방이 스크린 너머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으로 느껴졌던 것은 상당 부분 정유미의 자연스러운 연기 덕분이었다.

‘판타지 알레르기’가 있는 내게 ‘보건교사 안은영’이 어느 순간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슬픈 드라마로 다가온 것도 아마 비슷한 이유 때문일 테다. 활자와 영상화된 안은영 세계의 간극을 정유미가 좁힌 셈이다.

“너는 말이야 캐릭터 문제야. 그럴수록 칙칙하게 가지 말고 달리는 모험 만화로 가야 해. 그럼 애들이 싫어하지 않을 거야. 다치지 말고 유쾌하게, 사람들한테 사랑받으면서 살라고.”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이자, 이 작품의 세계관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대사이기도 하다. 누구나 아킬레스건 하나쯤은 갖고 있다. 안은영에겐 그것이 젤리를 보는 것이고, 홍인표(남주혁 분)에겐 다리를 저는 일, 혜민에겐 옴잡이로서의 숙명이 그것이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나쁜 것만 아니라면 평범한 것보다 이상한 편이 더 낫다고 위로한다.

정유미의 연기도 마찬가지다. 전형적이지 않은 그의 연기는 누군가에겐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을 터. 조금 낯설면 어떤가. 결국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을 텐데. 굳이 ‘윰블리’라는 수식어를 끌어다 쓰지 않더라도, 이미 정유미의 연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가 됐다. 안은영처럼 다치지 않고 유쾌하게 제 필모그래피를 다져온 결과일 것이다. ‘보건교사 안은영’을 보며 새삼 정유미라는 배우의 힘을 깨닫게 된 어느 가을날이다.

김수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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