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은 왜 화가 났는가

머니투데이 세종=박준식 기자 2020.09.2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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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리포트] 불붙은 지역화폐 논쟁

편집자주 국책연구원이 경제라는 이름으로 ‘팩폭(팩트폭격)’을 시도했다. 유력 대선주자는 화력을 총동원해 ‘본보기 응징’에 나섰다. 여야 유력 정치인들까지 참전을 시작했다. 지역화폐는 무엇인가. 그것은 복지이자 정치이다.

이재명 경기도지사 인터뷰 / 사진=수원(경기)=이기범 기자 leekb@이재명 경기도지사 인터뷰 / 사진=수원(경기)=이기범 기자 leekb@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왜 화가 났을까.

지역화폐(지역사랑상품권) 효용성 논란에서 이 지사가 보인 언행은 감정언어인 '화'라고 표기되기에 충분하다. 지역화폐 효능이 크지 않다고 본 보고서와 연구기관을 '적폐'로 규정했고, 자신을 비판하는 정치인들을 '사기집단'이라고 몰아붙였다. 언어가 과도하다는 것은 단순히 이성보다 감성에 사로잡혀있다는 의미이지만 이 지적이 본인에게는 그만한 자극이 될 이유였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단기필마 이재명은 지역화폐를 먹고 자랐다
(수원=뉴스1) 조태형 기자 =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18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경기도청에서 열린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경기도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증인선서를 마친 뒤 전혜갑 위원장(더불어민주당)에게 전달하고 있다. 2019.10.18/뉴스1  (수원=뉴스1) 조태형 기자 =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18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경기도청에서 열린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경기도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증인선서를 마친 뒤 전혜갑 위원장(더불어민주당)에게 전달하고 있다. 2019.10.18/뉴스1


이재명은 홀로 여기까지 왔다. 정치 입문은 정동영 계로 분류되던 이상호 더불어민주당 부산시당 사하을 지역위원장을 통했다. 2007년 '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을 조직해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경선 국면에서 정동영 후보 비서실 부실장을 지냈다. 하지만 그해 대선에서 패한 뒤 집단은 사분오열했다.

데뷔는 누군가와 함께였지만 뒷배가 빠르게 난파했기 때문에 이후로는 유아독존이었다. 여권 내 지분이 많지 않다는 사실은 전 국민이 안다. 지난 대선 당내 경쟁에서는 문재인 후보와 맞섰다가 친문(親文)의 오랜 견제를 받기도 했다.



정치인 이재명이 유명세를 얻기 시작한 건 권토중래해 오른 성남시장직을 수행할 때다. 이른바 청년수당(국민배당 혹은 기본소득)과 성남사랑상품권(지역화폐)이라는 2가지 정책으로 국민 이목을 사로잡았다. 민주주의에선 국민이 주권자이기 때문에 세정(稅政)은 위정자가 살림을 잘해서 납세자들에게 남은 배당을 해주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정치인 이재명이 가진 우리 사회에 대한 구조적인 문제의식은 자원의 비효율성으로 요약된다. 자본과 기술, 교육과 인구 양극화로 잠재력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남시장 시절 이재명은 포퓰리즘이라는 반대에도 결국 청년배당이라는 명목으로 기본소득을 현실화했다. 그 지급수단으로 활용한 게 성남사랑상품권이다.

이재명은 성남시장 1기(2010~2014)에 복지를 늘리면서도, 전임 시장이 호화청사를 짓느라 늘어난 5400억원대 지불유예 부채를 다 갚았다. 정책 아젠다와 목표를 설정하고 임기 내 비판 속에서도 그를 실현해낸 것이 그에 대한 지지율의 근본이다.


대권으로 가는 길에 만난 '지역화폐 무용론'
가을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백로(白露)가 하루 지난 8일 오후 갑작스런 소나기로 출입이 통제된 서울 청계천에 백로(白鷺)가 찾아와 노닐고 있다. / 사진=임성균 기자 tjdrbs23@가을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백로(白露)가 하루 지난 8일 오후 갑작스런 소나기로 출입이 통제된 서울 청계천에 백로(白鷺)가 찾아와 노닐고 있다. / 사진=임성균 기자 tjdrbs23@
이재명은 비판이 첨예한 정책을 밀어붙여 성공했다. 이런 타입의 정치인으로는 철학과 수단 측면에선 정반대편에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있다.

서울시장 이명박이 남긴 청계천 복원과 버스전용차로는 그 전철이다. 이해관계가 복잡한 현대사회에선 개혁을 위해 당장 분명히 희생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국민들은 정책 결과도 중요하지만 수행자가 이런 반대를 어떻게 설득하고, 어떤 수렴 절차를 거치는지 지켜본다. 독재정권이나 군사정부 시절처럼 그 길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단순히 윽박지르는 수준으로는 지지세를 늘릴 수 없다.

표본편향 vs 확증편향…화폐는 기능인가 존재인가
(세종=뉴스1) 장수영 기자 =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16일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이 지난 15일 발표한 지역화폐의 역효과를 분석한 보고서에 대해 '근거 없이 정부정책 때리는 얼빠진 국책연구기관'이라고 정면으로 반박한데 이어 경기연구원은 '부실하고 잘못된 연구 보고서를 비판한다'는 입장문을 발표해 지역화폐의 기능을 놓고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사진은 16일 세종시 반곡동에 위치한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모습. 2020.9.16/뉴스1  (세종=뉴스1) 장수영 기자 =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16일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이 지난 15일 발표한 지역화폐의 역효과를 분석한 보고서에 대해 '근거 없이 정부정책 때리는 얼빠진 국책연구기관'이라고 정면으로 반박한데 이어 경기연구원은 '부실하고 잘못된 연구 보고서를 비판한다'는 입장문을 발표해 지역화폐의 기능을 놓고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사진은 16일 세종시 반곡동에 위치한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모습. 2020.9.16/뉴스1
이재명 지사가 지역화폐 논쟁에 과도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로 전문가들은 크게 2가지를 든다.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모두 이재명이라는 위정자를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지적이다.

첫째는 지역화폐에 비판적인 조세재정연구원 보고서 발간 시기가 석연치 않다는 것이다.

국책 연구원 관계자는 "이재명 지사는 최근에 여권 내에서 공고했던 지지율 1위를 제치고 선두권에 올랐다"며 "해묵은 자료로 만든 보고서가 왜 현 시점에 보수여론지 단독 기사로 쟁점화됐는지에 대해 충분히 의심을 가질만하다"고 했다.

이어 "지난 대선 이후 이 지사는 오랜 기간 법정투쟁과 여권 내 정치공세를 맞닥뜨려왔는데 어렵게 얻은 지지율 1위가 여권이나 정부 입김에서 자유롭지 않은 국책연구원 보고서로 흔들리는 것이 달갑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연구자들도 인정하듯이 폴리페서가 만연한 시대다. 철 지난 데이터로 만들어진 보고서는 표본편향(sample bias)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물론 연구결과에 대한 정치적인 해석과 과도한 비난도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둘째로 학문적인 측면에서 이재명 지사의 반발은 화폐라는 수단을 '기능'으로 볼 것이냐, '존재'로 볼 것이냐의 근본 관점 차이에서 불거진다.

조세연 보고서는 화폐를 기능론적 관점에서 보고 쓴 것이고, 이 지사의 반발은 화폐가 기능보다는 호혜적인 신뢰관계에 기초한 지불수단이라는 해석에 근거한다.

진보진영 정치인인 이재명의 철학은 시장 실패에 따른 정부 개입을 기초로 한다.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양극화가 심화됨에 따라 분배를 형평성 있게 하기 위해선 인위적인 주권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한국에선 실제로 지역적으로 수도권으로만 사람과 투자, 시설이 몰리고 지역 내 소비도 대기업 계열 마트와 중앙집중식 온라인 주문에 가중된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화폐 정책은 기능론적인 목적이 아니고, 당위론적인 불가피성을 가진다는 의미다.

지역 연구원 관계자는 "내버려두면 고사할 것이 뻔한 지역경제와 상권을 살리기 위해 지역화폐를 만든 것"이라며 "지역화폐는 보고서가 지적하는 것처럼 사회적 후생을 단기적으로 늘리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정부 예산이나 비용을 감수하고서라도 지역경제를 위해 보조하는 정책"이라고 했다.

2차 재난지원금 논란서 매몰…다시 '화폐전쟁' 승부수
(수원=뉴스1) 조태형 기자 =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후보(오른쪽)가 30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경기도청에서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2020.7.30/뉴스1  (수원=뉴스1) 조태형 기자 =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후보(오른쪽)가 30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경기도청에서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2020.7.30/뉴스1
지역화폐 논쟁은 이런 측면에서 보면 크게는 진보와 보수 진영 싸움이면서, 작게는 여권 내 수정 자본주의론자 사이 정책 대결이기도 하다.

이재명의 말은 거칠고 투박하지만 '카투사 휴가연장 정쟁'에 매몰됐던 정치를 다시 코로나19(COVID-19) 이후 전국민의 후생경제 논쟁으로 끄집어올린 역할을 하고 있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언어의 품격'을 지적했지만, 윤희숙 의원은 '얕은 수준'이라며 정책적 비판을 하기 시작했다. 이 지사는 지역화폐 논쟁을 도발하면서 '분서갱유'라는 비판을 얻지만 역으로는 자신이 주도한 정책에 대한 국론 토론의 기회를 얻게 됐다. 이재명은 승부사인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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