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직장인, 결혼 15년만에 서울에 내집…이제 ‘영끌 대출’만 남았다

머니투데이 최성근 이코노미스트 2020.08.29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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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 랜딩]"미친듯이 오른 집값을 보면서 이제라도 집을 사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걱정 엄습"

편집자주 복잡한 경제 이슈에 대해 단순한 해법을 모색해 봅니다.

/그래픽=임종철 디자인기자/그래픽=임종철 디자인기자


“(OO아파트) 청약 당첨을 축하합니다”

40대 직장인 A씨는 최근 서울 은평구 모 아파트 청약에 당첨됐다는 문자를 받았다. 결혼한 지 15년 만에 그것도 집을 사기가 가장 어렵다는 서울에서 마침내 내 집 마련에 성공한 것이다. A씨는 전셋집을 전전했던 지난 10여년 세월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평범한 직장인 A씨는 신혼 초 내 집을 마련할 여유가 없었다. 서울에서 외벌이로 직장 생활을 시작한 탓에 조그마한 빌라의 전셋집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하나 둘 태어나고 자라면서 불편한 점들이 늘기 시작했다. 주차난부터 시작해 냉난방은 물론 습기 곰팡이까지 불편함은 끝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전셋집 주인이 보증금을 내줄 형편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불안요인이었다. 당시만 해도 전세보증보험이 활성화되지 않아서 집을 옮기고 싶어도 A씨는 새로운 세입자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아마도 전셋집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세입자들이 이사하는 일이 마치 외줄타기처럼 얼마나 아슬아슬하고 불안한 경험인지 알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A씨의 경우처럼 집주인이 보증금을 내어주지 못하거나 혹은 은행 근저당이라도 잡힌 깡통 전셋집인 경우 세입자가 독자적으로 이사를 계획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혹시 집주인이 추가로 대출이라도 받지 않았을까 노심초사해야만 한다.

막상 전셋집에서 이사를 하려고 해도 난관은 하나 둘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전셋집 이사에서 가장 힘든 점은 보증금 스케줄을 맞추는 것이다. 세입자는 새로운 임대인에게 보증금을 연쇄적으로 주고받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 날짜를 맞춘다는 게 보통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대출까지 받아서 보증금을 주어야 하는 경우 대출일자까지 사전에 조율해야 한다.



A씨의 경우엔 운 좋게도 새로 들어오는 세입자가 자기 돈으로 보증금을 마련해 들어오는 케이스여서 그쪽은 크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문제는 새로 이사갈 집을 찾는 것이었다. 기존 세입자가 빠져야만 보증금을 건네주고 이사를 할 수가 있는데 일단 스케줄에 맞는 전세 매물을 찾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가물에 콩 나듯 나오는 집을 앞뒤 안가리고 계약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좀 더 환경이 나은 집을 찾아 발품을 팔고 부동산을 이리저리 찾아다녀야 했다. 마침내 A씨는 조금 외진 지역이지만 작은 아파트를 전세로 계약을 하고 이사를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전셋집의 불편함은 단지 이사 과정에만 있지 않다. 세입자에게 가장 불안한 점은 2년마다 재계약을 해야 하는 주거의 불안정성이다. 최근 임대차 3법이 개정된 배경이기도 하지만 세입자는 재계약 문제에 있어서 항상 '을'의 입장이 될 수밖에 없다.

A씨는 새로 이사한 집에서 장차 내 집 마련을 하기까지 가급적 오래 살고 싶었지만 이런 계획은 보기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당시만 해도 부동산 시장이 침체기여서 집주인은 보증금에 비해 얼마 높지 않은 가격에 매수자가 나타나자 전세 중간에 집을 매도해 버렸다. 문제는 새 집주인이 2년 계약 종료시점에 맞춰 자신이 직접 거주하겠다며 통보를 해온 것이다. 이런 경우 세입자로선 다시 새로운 전셋집을 찾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당시만 해도 집값이 전세보증금에 비해 높지 않았고 조금만 대출 받으면 어렵지 않게 매입할 수 있었지만 부동산 시장이 워낙 침체돼 있었기에 같은 단지의 낡은 아파트에 별로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다. A씨는 내심 첫 내 집은 그래도 조금 더 좋은 지역에서 시작하고픈 개인적인 소망이 있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비교적 깨끗한 신축 빌라를 택해 새로운 전세 계약을 했다. 그런데 또다시 문제가 발생했다. 아파트가 아닌 빌라인 탓에 주변 도로는 어린아이들에게 위험천만했고 매일 학교와 학원으로 아이들을 데려가고 데려오는 생활에 A씨의 아내는 금방 지치고 말았다.

결국 A씨는 2년만에 다시 아이들이 걸어서 등교할 수 있는 학교 주변으로 이사하기로 결심하고 집을 찾아봤다. 문제는 부동산 규제 완화와 함께 집값이 크게 뛰기 시작해 집을 구매하기가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더욱이 서울 시내에서 초등학교 주변은 아무래도 집값이 만만치가 않았고 보증금에 대출까지 받아 집을 사기엔 너무 부담스런 수준이 됐다. 결국 또다시 집 사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전세 대출을 받아 초등학교 주변으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집 사기를 포기하고 나니 집값이 겉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뛰기 시작했다. 2017년 문재인 정부가 집값을 잡겠다고 한 이후부터 오히려 집값은 더욱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정책이 나올 때마다 잠시 주춤했지만 1년 마다 아파트 매매가격은 1억원 넘게 뛰어 올랐다. 전셋집에 사는 A씨는 미친듯이 올라가는 집값을 바라보면서 허탈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더욱 답답한 것은 대출 규제까지 묶인 탓에 이제 서울에서 내 집을 마련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는 점이었다. 그제서야 A씨는 '진작에 빚을 내서라도 집을 살 걸'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이제 A씨가 서울에서 집을 마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청약에 당첨되어 새로 분양을 받는 것뿐이었다. 다행히 직장 초기부터 가입한 청약통장을 숱한 해지 유혹(?)을 참아가면서 유지를 해 온 것이 큰 도움이 됐다. 자녀 둘에 오랜 무주택 기간에 10년 넘는 청약통장 기간까지 해서 청약 점수는 60점대가 됐다. 때마침 중도금 대출이 가능한 은평구 소재 분양단지의 청약공고가 발표되자 A씨는 용기를 내어 아파트 청약을 신청했다. 신청 결과 A씨는 당첨 됐고 결혼 15년 만에 드디어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룰 수가 있게 됐다.

A씨는 내 집 마련에 큰 소망도 욕심도 없었다. 하지만 정말 미친듯이 올라가는 집값을 바라보면서 이제라도 집을 사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걱정이 엄습했다. 2년마다 돌아오는 재계약의 불안도 이제 40대 중반인 그로서는 더이상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물론 적지 않은 금액을 대출받아야 하지만, 이제 세입자가 아닌 집주인이 돼 자신의 이름으로 등기된 집에서 살 수 있다는 것, 2년 마다 재계약이나 보증금 주고받는 걱정 없이 내가 원하는 대로 거주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집에 못 하나 박는 것도 자기 맘대로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에 A씨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이제 A씨에겐 영혼까지 끌어모아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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