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독점, 숙청의 역사"…권력나눈 백두혈통 '처음이야'

머니투데이 김지영 기자 2020.08.22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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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국정운영과 관련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동생인 김여정 제1부부장 등 일부 측근들에게 '위임통치'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대남·경제·군·전략무기 부문의 전결권을 측근들에 나눠 부여하되 최종 결제권을 김 위워장이 쥐는 형식이다.

김 위원장의 '통치 스트레스 경감', '당 시스템 정상화'가 명분이지만, 공식 후계자 외 2인자를 인정하지 않았던 북한 최고지도자의 그간 행보와 비교되는 모습이다. 그간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세습 과정에서 벌어진 숙청과 권력독점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른바 위임통치는 더욱 놀라운 변화다.



김정은, 1인 지배체제…집권후 반복된 '숙청'의 역사
북한 최고지도자는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늘 대규모 '숙청'이 뒤따랐다. 견제 세력을 제거하며 자신에 대한 절대 충성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1인 지배체제를 강화해 왔던 셈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9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6차 전원회의를 열고 내년 1월 8차 당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고 20일 북한 매체들이 보도했다. /사진=뉴스1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9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6차 전원회의를 열고 내년 1월 8차 당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고 20일 북한 매체들이 보도했다. /사진=뉴스1


김 위원장은 지난 2012년 권력을 잡은 뒤 그 해 7월 리영호 총참모장을 숙청하면서 평양에 '숙청의 바람'이 몰아쳤다. 리영호의 후임으로 총참모장 자리를 넘겨받은 뒤 인민무력부장까지 오른 현영철도 2015년 4월 전격 숙청됐다. 특히 2013년 11월에는 자신의 고모부로 '북한 2인자' 평가를 받던 장성택을 고사포 사격으로 처형해 국제사회가 경악했다.



2015년엔 북한 노동당 대남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을 맡았던 김양건이 석연찮은 교통사고로 숨진 일도 있었다. 이에 북한 내부에서는 ‘딴 마음’을 먹을 수 있는 권력자들에게 경고을 날렸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급기야 2017년엔 김정은에게 골칫거리였던 이복형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사망했다. 당시 현장에서 김정남을 공격한 인도네시아 여성과 베트남 여성은 곧바로 기소됐지만, 시간이 지나 알 수 없는 이율 기소가 취소됐다. 자연스럽게 김 위원장이 형을 암살했다는 쪽에 무게가 실렸고, 이런 숙청을 통해 김정은은 ‘어리다’ ‘경험이 부족하다’ 등 세간의 평가를 불식시켰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주재로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에서 김여정 당 제1부부장이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보선됐다.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에 실린 김여정 당 제1부부장.   /사진=뉴스1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주재로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에서 김여정 당 제1부부장이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보선됐다.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에 실린 김여정 당 제1부부장. /사진=뉴스1
김정일, 김일성 사후 2000여 명 숙청
김정은의 권력 장악은 아버지 김정일과 비슷하다. 김정일 후계구도가 굳어지던 1976년 김동규 부주석과 장정환 인민무력부 부부장, 유장식 대남사업 담당 등은 김정일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다 숙청됐다. 이보다 앞선 1967년 4월에는 조선노동당 중앙위 제4기 15차 전원회의에서 체제에 위협이 될 인물로 꼽힌 박금철·이효순 등 반대파 20명의 죄를 폭로한 뒤 당에서 축출해 아버지를 향한 충성심을 과시했다.


또 유일 후계자로 낙점받기 위해 이복동생과 친인척 등을 제거하는 작업에도 몰두했다. 1970년대 초반 삼촌 김영주를 자강도 강계로 쫒아내 외부와 철저히 차단하고 격리했다. 김정일은 32세 때인 1974년 2월 중앙위원회 5기 8차 전원회의에서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으며 김일성의 공식적인 후계자로 추대됐다.

1992년 소련 유학파 장교 일부가 소련과 내통한다는 보고를 받은 김정일은 소련 프룬제군사대학 출신 장교 20여 명을 처형하고, 600여 명을 강제로 제대시켰다. 이는 김정일이 군부를 장악하는 계기가 됐다.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후 김정일에도 '피의 숙청'은 계속됐다. 1990년 후반 사회안전성(경찰)을 통해 당 간부와 가족들을 무려 2000여 명이나 처형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보냈고, 2009년엔 화폐개혁 실패의 희생양으로 박남기 노동당 계획재정부장을 처형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일성, 한국전쟁 당시 자신의 추종세력 '빨치산파'도 제거
1948년 북한 정권이 처음 수립될 당시엔 좌파 연합 형태였다. 김일성파(派)인 '빨치산파'와 남로당 계열의 국내파, 중국 만주와 함경도 일대에서 항일 투쟁한 갑산파, 중국 연안 중심으로 활동한 연안파, 소련계 한인 그룹 소련파 등이 함께 손잡았다.

권력을 잡은 후 김일성파는 여타 세력을 제거해 나갔다. 김일성은 자신의 추종세력인 ‘빨치산파’에도 숙청의 칼을 겨눴다. 1969년 군벌타도를 명분으로 군 총참모장 최광 대장 등을 제거했다.



권력을 지켜야하는 김일성에게 사선(死線)을 함께 넘은 어제의 동지도 라이벌로 인식되는 순간 숙청 대상자일 뿐이었다. 김일성은 이렇게 정권 초기부터 수많은 정적과 혈투를 벌이며 유일체제와 주체사상을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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