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출신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를 기억해주세요"

뉴스1 제공 2020.08.15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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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뉴스1) 손연우 기자
광복회 총사령 고헌 박상진 의사 © News1광복회 총사령 고헌 박상진 의사 © News1


(울산=뉴스1) 손연우 기자 = "우리동포는 조국의 애국애족의 마음으로 일치단결해서 광복회의 의로운 깃발아래 왜적을 몰아내고 국권을 기필코 회복해야한다. 우리 사천년 종사는 허사가 되고 이천만 민족은 노예로 되어 오랑캐의 악정폭행은 날로 더하고 달로 늘어 돌이켜보면 피눈물이 샘솟는다"

울산지역 대표 독립운동가이자 무장항일투쟁을 이끌었던 광복회 총사령 고헌 박상진(1884~1921)의사가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부호들에게 발송한 포고문의 일부다.



1910년대 일본의 폭압적인 무단통치 속에서 광복회의 수장으로 활발한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박상진. 김좌진을 부사령으로 거느리며 국내 60여개와 만주와 중국까지 지부를 갖추고 항일투쟁에 앞섰지만 안타깝게도 잊혀진 독립운동가로 그의 공적은 저평가되고 있다.

울산지역에서는 8월 11일 순국 99주기이자 제75주기 광복절을 맞아 그를 알리고 서훈향상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진행 중이다.



'박상진 순국 100주년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는 '우리역사 바로세우기 운동본부'는 올해 6월 북구 공항인근 700평 규모의 논에 박상진 얼굴을 새기는 모내기 작업을 진행한데 이어 내년까지 인근 박상진 생가까지 코스모스길을 조성해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북구에 들어설 송정역사 이름을 '박상진역'으로 정하는 작업과 2021년 8월 7일부터 15일까지를 순국 주간으로 운영하는 등의 계획도 적극 추진 중이다.

울산대표 무용에인 처용문화제을 비롯한 각종 문화행사에 '박상진 순국100주년 기념'이라는 주제를 넣는 등의 '네이밍 작업'과 '잊혀진 독립운동가'라는 주제로 2부작 다큐, 100주년 특별전시회도 적극적으로 진행, 국민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있다.


고헌 박상진 의사를 기리는 창작뮤지컬/ 뉴스1 © News1고헌 박상진 의사를 기리는 창작뮤지컬/ 뉴스1 © News1
이용희 우리역사바로세우기 운동본부 사무처장은 "박상진을 알리기 위한 사업들은 그동안 지속적으로 진행됐지만 제자리 걸음이고, 지금도 많은 난관에 부딛혀 힘을 잃고 있는 상황"이라며 시민들의 관심과 지지를 당부했다.

그는 "나라사랑운동본부가 시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박상진에 대해 알고 있는 시민은 17%, 전국으로는 1%미만으로 나왔다"며 "이후 박상진을 알리기 위한 노력이 지속됐고 송철호 시장을 필두로 '서훈 등급상향을 위한 상훈법개정 촉구' 서명운동도 진행됐지만 입증자료, 예산 부족 등의 이유로 흐지부지됐다. 국민들이 박상진을 모른다는 것이 큰 원인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념과 지역을 넘어서 위대한 영웅에 대한 역사를 바로세우는 일에 다같이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박상진의사는 1884년 12월 7일 울산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13세에 의병을 일으켜 무력항쟁에 나섰던 허위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가 상경해 1906년 양의정숙에서 법률과 경제를 전공했다.

판사시험에 합격한 뒤 1910년 평양법원으로 발령을 받았지만 그해 허위가 서대문형무소 최초의 순국자가 되고 안중근이 처형당한데다 8월에는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되자 그는 법복을 벗어던지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10년대 일제 탄압이 극심해 그 누구도 독립운동에 나서지 못했던 암흑의 시기에 박상진은 일본의 무단통치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는 무력투쟁이 불가피할 것으로 판단해 만주에 군사학교를 세웠다.

만주로 군자금을 보내주기 위해 귀국한 그는 대구에 상덕태상회를 설립하는 등 전국에 독립투쟁 비밀거점을 설립했다.

박상진 의사에 대한 1920년 대구복심법원 판결문(국가 기록원제공)© 뉴스1박상진 의사에 대한 1920년 대구복심법원 판결문(국가 기록원제공)© 뉴스1
이후 박상진은 1915년 8월25일 광복회를 창단, 친일부호들의 집을 습격하고 일본인들이 불법으로 징수한 세금을 압수하는 등의 방법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등 강단있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만주 신흥학교 등과 연대해 독립군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광복회 지휘장을 지냈던 백산 우재룡의 자서전 '백산일기'에 따르면 박상진은 당시 만주 지부장이자 제2대 부사령 김좌진에게 7만원, 현시세 33억9000만원 가량되는 군자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광복회는 독립자금을 기부하지 않는 악질 친일 부호들에 대해서는 암살활동을 벌였다. 박상진은 첫 처단 대상을 일제치하 최고의 부자이자 스승허위가 의병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일본경찰에 밀고했던 장승원으로 정하고 단원들에게 암살을 지시, 그를 처단했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벌이던 그는 다음 해인 1018년 2월 1일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본가를 찾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됐다.

1919년 2월 공주지법 예심에 이어 1920년 9월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도 사형이 선고됐으며 상고는 기각됐다.

당시 대구복심법원결문에 따르면 당시 재판부는 '박상진은 일한병합에 불평을 가지고 구 한국의 국권회복을 호칭하고 여기저기 배회하다 광복회를 조직하고 광복회의 이름으로 장승원을 비롯한 조선인 자산가에게 곡갈로 금원을 받아냈다'고 판단했다.

결국 2021년 8월11일 오후 1시 그는 대구형무소에서 38세의 젊은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국민들에게는 이름없는 독립운동가이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역사학자들을 비롯하 전문가들은 박상진과 광복회가 1910년대 독립운동의 공백을 메우고 민족 의식과 역량이 3·1운동으로 계승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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