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쳐다보지도 말라"던 해운투자, 물꼬 트였다

머니투데이 세종=김훈남 기자 2020.08.10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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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환점 돈 해운재건]②-1 해운맞춤 정책금융기관, 위기마다 자금 수혈역할 톡톡

여의도 금융가에 "바다 위에 떠 있는 건 쳐다보지도 말아야 한다"는 말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대우조선해양과 한진해운 등 조선·해운 업계에서 굵직한 기업들의 좌초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 쏟으면 거둬들일 수 없으니 말 그대로 바다에 돈을 붓는 격이었다. '수익'과 '안정성' 사이 줄타기가 일상인 투자 업계에서 순수하게 해운업계 자금을 조달하는 것은 상상 속의 일이었다.

2022년까지 해운업계를 금융위기 이전 수준으로 되돌린다는 해운재건 5개년 계획에서도 금융투자업계의 유동성을 끌어올리는 것은 꼭 넘어야 할 과제였다. 투자의 뒷문을 책임지는 수문장 해양진흥공사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해운맞춤 지원 맡은 해진공, 다시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
경남 거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서 건조 중인 HMM 2만4000TEU급 컨테이너선 HMM헬싱키호. 한척당 1700억원, 총 2조원이 투입되는 초대형 컨테이너선 12척 건조대금 중 후순위 채권 7771억원을 해양진흥공사가 보증했다. / 거제(경남)=김훈남 기자경남 거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서 건조 중인 HMM 2만4000TEU급 컨테이너선 HMM헬싱키호. 한척당 1700억원, 총 2조원이 투입되는 초대형 컨테이너선 12척 건조대금 중 후순위 채권 7771억원을 해양진흥공사가 보증했다. / 거제(경남)=김훈남 기자


해양진흥공사는 현재 정책 금융기관 중 가장 이질적인 기관이자, 세계 해운업계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조직이다.

세금이 투입되는 정책금융기관이라도 투자와 보증에 따른 리스크 관리는 필수다. 이 때문에 정책금융기관은 대부분 여러 산업에 걸쳐 포트폴리오를 갖는다. 하지만 '해운재건 5개년 계획'에 따라 2018년 7월 출범한 해양진흥공사는 해운업계 지원 업무에 특화돼있다.



해양수산부와 기획재정부 등 정부 몫 1조5500억원을 포함한 3조원에 달하는 자금이 선박도입과 유동성 확보지원 등 해운산업 지원에만 쓰인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해운업 불황이 10년 넘게 이어진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위험을 안고 해양진흥공사를 설립한 셈이다. 세계적으로 봐도 해운업계 지원을 위한 상시 조직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해양진흥공사의 존재감은 설립 직후 드러났다. 정부는 해운재건 계획의 핵심으로 현대상선(현 HMM)의 정상화 목표를 제시했다. 이를 위해 세계 최대규모인 2만4000TEU(20피트 컨테이너 1개분) 컨테이너선 12척 건조에 착수했다.

배 한척 당 비용은 1700억원. 총 2조원이 필요했다. HMM 부담분을 제외하고 △선수위 채권 40% △중순위 채권 15% △후순위 채권 35%으로 조달계획을 짰다. 중순위 채권은 산은 등 정책금융기관이 맡았다.


문제는 40%. 무보증 선순위 투자금 8000억원을 조달하는 것이었다. 바다는 쳐다보지도 말아야 한다는 말처럼 금융투자업계는 해운재건 계획을 외면했다. 해운업 불황기인 데다 정부 지원으로 겨우 사업을 이어가는 HMM에 수천억원을 넣을 금융기관은 없었다. 해수부와 HMM 담당자들이 여의도 금융가를 돌며 선순위 채권 투자를 권했지만 돌아오는 건 부정적인 대답뿐이었다.

이때 등장한 게 해양진흥공사다. 해양진흥공사는 후순위 채권 7771억원을 모두 떠안았다. 2조짜리 고위험 투자가 1조1000억원짜리 안정적 투자로 바뀐 셈이다. 바꿔말하면 망하더라도 일단 7771억원은 가장 나중에 상환받기로 한 셈이니 선수위 채권 매력도가 올라가는 셈이다..

후순위 채권 리스크를 던 덕에 미래에셋과 메리츠종금의 자금이 절반씩 들어왔다. 이렇게 조달한 자금으로 만든 배 12척은 올해 9월까지 HMM 인도를 마친다. 올해 4월 첫 운항을 시작한 HMM 알헤시라스호부터 6호선까지 만선행렬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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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M 정상화 지원이 해양진흥공사 업무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HMM 외에도 국내 48개 선사가 해양진흥공사의 투자와 보증을 받아 새 배를 건조하고 유동성을 확보하고 있다.

해양진흥공사에 따르면 올해 6월말 기준 해운업계 지원 금액은 4조2622억원이다. HMM의 2만4000TEU 컨테이너선 건조 보증과 친환경 설비 개량, 구조개선 작업 등에 2조8034억원이 들어갔다.

나머지 선사 48곳에 대한 지원은 1조4588억원이다. HMM 지원의 절반을 조금 넘는 수치다. 세부적으로는 선사 2곳이 해양진흥공사 투자를 받아 배 7척을 도입했고, 해양진흥공사 보증을 통해 배를 만든 선사는 7곳, 25척이다. 탈황장비 등 IMO(국제해사기구) 친환경 기준을 맞추기 위한 지원도 진행, 25개 선사가 보유 중인 배 128척에 친환경설비를 장착했다.

중소형 선사에 가장 특화된 지원은 S&LB(세일 앤 리스백)이다. 신규 선박을 매각해 유동성을 확보한 다음, 다시 장기임대(리스)해 사업을 진행하는 것. 한번에 큰 자금을 들이기 어려운 중소형 선사가 안정적으로 배를 운용하기 위해 찾는 방법이다. 해양진흥공사의 지원 2876억원으로 18개 선사가 배 25척을 도입했다.

해수부 관계자는 "해운업계의 높은 리스크 탓에 선사들은 유동성 조달이 쉽지 않고, 돈을 빌리더라도 비싼 금리 부담을 진다"며 "해양진흥공사의 보증 시 기존 금리보다 연 2% 이하 수준에서 자금을 조달가능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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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쳐다보지도 말라"던 해운투자, 물꼬 트였다
올해 초 전세계를 덮은 코로나19(COVID-19)는 해운업계에도 큰 충격이었다. 주요 교역국 중국을 포함한 전세계가 항구를 걸어닫고 배는 바다 위에서 멈췄다. 항구에는 빈컨테이너만 쌓이고 일감이 '뚝' 끊겼다.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없인 해운재건 계획도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놓였다.

우리 정부가 해운업계에 내놓은 지원규모는 1조6000억원. 이 가운데 해양진흥공사가 맡은 것만 1조2000억원이다. 유례없는 위기상황에선 단일 포트포리오 리스크보단 집중지원의 장점이 부각된 결과다.

대표적인 예가 긴급경영자금 지원이다. △여객선사에 300억원 △외항화물운송사에 900억원 △항만하역사에 300억원 등 총 실탄 1500억원을 준비했다. 해양진흥공사가 자금을 금융기관에 예치하면 금융기관은 시중보다 낮은 금리로 자금을 빌려주는 방식이다. 대출 리스크를 공사가 떠안는 구조 덕에 가능한 일이다.

지난 3일 기준 75개사가 긴급경영자금 지원을 신청했다. 이 가운데 33곳이 총 616억원을 빌렸다. 신용등급을 책정받지 못하거나 B등급 미만 기업 역시 시중에서 자금조달이 어려운 신용도에서도 최대 20억원까지 긴급경영자금 조달을 진행 중이라고 해수부는 설명했다.

한 해운업계 관계자는 "정부의 정책 지원은 꾸준하게 잘 작동하는 사례 가 해양진흥공사"라며 "급격한 시황변동으로 위험도가 큰 해운분야 투자에 안전판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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